시나이 반도는 서쪽의 수에즈 만 및 수에즈 운하와 동쪽의 아카바 만 및 네게브 사막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반도로서, 북쪽은 지중해, 남쪽은 홍해와 접해 있다. 면적은 6만1,000㎢, 동서의 최대 너비는 210㎞, 남북의 최장 길이는 385㎞다. 시나이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나이 사막은 수에즈 만과 수에즈 운하에 의해 이집트의 동부 사막으로부터 분리되지만, 동쪽으로는 뚜렷한 기복의 변화 없이 네게브 사막까지 이어진다. 보통 지리적으로 아시아 지역이나, 실제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의 북동쪽 끝 지역에 해당하며 동쪽으로 이스라엘 및 가자 지구와 인접해 있다. 이 반도는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군에 점령당했으나, 1979년 미국의 주도한 켐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 따라 1982년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시나이 반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흔적이 있다. 이곳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구리 광석을 찾기 위해 시나이를 탐험한 것을 기록한, BC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시나이라는 이름은 훨씬 오래 전에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인 숭배 대상 가운데 하나인 ‘신’(Sin:달의 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시나이 반도를 지나간 것은 확실하지만, 출애굽의 경로와 날짜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시나이는 모세에게 10계명을 준 장소로 유명하나, 실제적인 장소가 시나이 산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시나이 북부 연안을 따라 난 길은 여러 세기 동안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주요 교역로의 역할을 하였는데, 이집트에서는 이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믹돌]들을 잇따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제국이 무너진 후 페트라에서 온 나바테아인들이 106년 로마인들한테 패배할 때까지 시나이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그 뒤 시나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아랍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시나이 반도는 성경과 관계된 곳이 많은 중요한 지역이다. 이스라엘 남쪽 국경이었던 애굽 하수가 이곳에 있으며, 또한 해변길 또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이곳에 있다. 모세가 피신해 살았던 호렙산도 이곳에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출애굽과 연결되어 수루광야, 신광야, 바란광야가 이곳에 있고, 마라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갔던 여정의 장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 갔을 때도 지나간 곳이며,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이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시나이 반도의 남부 산악지역은 수많은 은자(隱者)들과 고행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530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모세의 산 아래에 카타리나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 후 이곳은 시나이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교도들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수도원은 중세기 내내 순례지의 역할을 했다. 1517년 이후 시나이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낸 관리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초 이집트가 터키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독립한 뒤 이곳의 상황은 악화되어, 반도를 여행하기가 어렵게 된다. 알아리시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군과 영국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전쟁이 끝나자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에게 양도되어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군에 의해 장악될 때까지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다. 시나이는 1949년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서 접전지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반도의 북동부에 있는 기디 고개와 미틀라 고개는 1956, 1967, 1973년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시나이는 2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지역은 카트리나 산(2,642m), 움샤우마르 산(2,585m), 앗타브트 산(2,437m), 시나이 산(2,285m) 등이 솟아 있는 남부 고산지역으로, 남부지역은 본질적으로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협곡과 같은 와디들이 산지를 깊이 개석하여 수에즈 만이나 아카바 만으로 배수한다. 이 황량한 산괴(山塊)는 서쪽으로는 수에즈 만과의 사이에 좁은 해안평야가 있으나, 동쪽에서는 아카바 만에서 곧바로 치솟아올라 평지가 거의 없다. 북쪽에서 이 산괴와 접하며 시나이 반도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는 2번째 지역은, 900m 이상의 고지로부터 지중해 쪽으로 경사져 내려가는 거대한 고원지대다.

이 지역의 특징은 와디 알아리시의 드넓은 평원, 수많은 고립산괴, 드넓은 모래언덕이 있는 서부와 북부 연안의 넓은 평원들이 있다. 시나이 반도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하나의 두드러진 능선이 편자 모양의 곡선을 그리며 달리고, 이 능선으로부터 3대 유역이 발달해 있다. 와디 알아리시가 주류의 역할을 하는 북부(또는 지중해) 유역의 물은 알아리시 시(市) 부근에서 지중해로 흘러든다. 동부(아카바 만과 사해) 유역과 서부(수에즈 만) 유역에는 수많은 작은 시내들이 흐르고 있다. 시나이 사막에는 해마다 20억㎦ 이상의 비가 내리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물 가운데 1/3은 지표에서 유수로 흐르고 비슷한 양의 물이 지하 대수층으로 스며들어 수자원을 형성하고 있다.

시나이 반도의 기후는 아프리카 북부지역과 아시아 남부지역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건조지대에 속한다. 시나이의 건조함은 지표면의 침식, 드넓은 모래언덕, 염화(鹽化), 와디들로 나타난다. 이전에는 기후가 덜 건조했었는데, 가끔 나타나는 호수의 두꺼운 충적토 침전물로 이루어진 단구(段丘)가 이를 증명해주는 증거이다. 토지의 높낮이가 완만한 시나이의 북부, 즉 지중해 연안지역의 경우 겨울은 상대적으로 강우량이 많고(125㎜), 여름은 건조하고 몹시 더우며, 봄·가을에는 남쪽에서 메마른 함신 열풍이 불어오고 이따금 많은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기도 한다. 남부 또는 홍해 지역은 산악지대라는 지형적인 특수성 때문에 기후가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높은 산봉우리들은 1년 내내 구름으로 덮여 있으며 겨울에는 얼음으로 덮여 있을 때도 있다.

또한 겨울에는 비가 조금 내리며, 여름에는 이따금 남동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이 많은 비를 내리는 때도 있다. 여름의 낮 더위가 심할 때도 밤이면 다시 서늘해지고, 언제나 부는 산들바람은 주로 북쪽에서 불어온다. 연안은 대개 습도가 비교적 높은데, 지중해 지역은 74%, 홍해 지역은 60%를 기록하고 있다. 북부 연안 평야에 새로 관개시설을 한 지역을 빼고는, 시나이 사막의 식물은 대부분 단명하지만 남부의 가파른 비탈과 북부의 고원에는 다년생 관목도 있다. 반(半)사막인 연안 평원에는 다즙 식물과 염생(鹽生) 식물이 살며 약용식물과 꼴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동물은 드물지만 대표적인 종류는 야생 염소·영양·사막여우·표범·살쾡이·재칼·산토끼·고슴도치·두더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이 원산인 동물은 매와 독수리이며 메추라기·자고·뇌조와 같은 철새도 있다.

얼마 안 되는 시나이 주민은 대부분 석유 산업과 망간 산업이 발달한 서부지역 변두리와 물이 충분하게 공급되는 북부지역 변두리에 몰려 살고 있다. 정착민은 농사·토지개간·목축을 주업으로 삼으며, 또 석유산업·광업·어업·관광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유목민인 베두인족은 과거에는 대부분 물과 목초지를 찾아 유랑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부족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남부 산악지대에서는 동방 정교회 수도사들이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1910년 시나이 서부 지역의 타나카 산에서 처음 발견된 석유는 시나이 반도에서 개발된 가장 중요한 광물 중 하나이다.

앞으로 개발할 수 있는 광물로는 망간과 우라늄을 꼽을 수 있으며, 석재·백운석·모래·자갈도 풍부한 지하 보고이다. 지하수 또는 나일 강에서 양수기로 끌어올린 물을 이용, 토지간척과 관개를 통해 북부 연안 평야의 수십 만㏊의 토지를 새로 경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새로 개발하고 있는 농토에서는 보리, 과일, 시장용 채소, 대추야자, 올리브 등을 생산하며 목재용 나무를 기르기도 한다. 대추야자 숲은 시나이 반도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일부 지역의 베두인 원주민들은 아직까지 유목생활을 하며 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처음 만난 광야는 바로 수르 광야이다[출 15:22]. 수르 광야에는 마라의 샘이 있고 가까이에 엘림도 있다. 수르 광야는 수르 대신 애굽어로 에담 광야라고 기록되기도 하므로 에담 광야와 수르 광야는 동지 이명이라고 할 수 있다[민 33:8].

창 16:7에는 수르 광야를 술로 표현했다. 수르 광야는 아하로니 지도에 의하면 수에즈에서 폐루슘에 이르는 애굽의 동쪽 국경을 지키기 위해 ‘왕자의 방벽’이 쌓았던 곳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방벽은 연속된 돌담이 아니고 여러 곳 군데군데 만들어진 성벽으로 인하여 연결될 수가 있어서 이곳을 에담 광야 또는 수르 광야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즉 수르라는 뜻은 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지금도 이곳을 제벨 에스 수르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김용규 목사
령천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중동 선교사
성지 가이드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