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제라블>. 용서받은 장발장은 어린 코제트를 구원한다.

빵 한 조각을 훔치려다 19년간 감옥에서 노역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난 남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했다. 그래서 오갈 데 없는 그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베풀어 준 주교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그의 은식기를 훔쳐 수도원에서 달아난다. 얼마 못 가 경찰에 잡힌 그는 이를 선물받았다고 거짓말해 확인차 수도원으로 끌려오고, 주교는 “왜 내가 준 선물을 다 가져가지 않고 일부만 가져갔느냐”며 은촛대를 건넨다. 주교의 거듭된 사랑은 지난 삶을 뉘우치게 했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화 <장발장>의 내용은 여기서 끝. 영화에서는 스펙터클한 화면과 함께 20분 만에 서둘러 마무리된다.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장발장과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의 차례다. 한국에서 500만여 관객을 동원하며 뮤지컬 영화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경신한 <레미제라블>은 다음과 같은 주교의 당부를 장발장이 나머지 2시간 10분간 채우는 이야기다.

‘자베르와 장발장’에서 떠오르는 ‘율법과 복음’, 그리고 성경 인물들

 

▲19년간 감옥에 있던 장발장(왼쪽)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돼 시장에까지 오른 장발장.

“나의 형제 장발장, 그대는 이제 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선에 속한 자입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그대의 영혼을 샀습니다. 나는 그대의 영혼을 어둔 생각과 파멸의 영으로부터 건져내 하나님께 바치려고 합니다.”

 

장발장은 실제로 그렇게 됐다. 버러지 같았던 이전의 삶을 이름까지 바꾸면서 청산하고, 8년 후 시장에까지 올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생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가석방 상태에서 사라진 장발장을 계속 뒤쫓는 이는 자베르 경감. 감옥에서 태어난 그는 ‘주님의 뜻’을 좇아 정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지만, “한 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라 믿는 그에게는 정작 주님의 뜻이 품고 있는 ‘사랑과 자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자베르와 장발장은 마치 ‘율법과 복음’, ‘죄책감과 은혜’처럼 쫓고 쫓기는 관계다. 둘은 마치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나 ‘향유옥합을 붓는 마리아’가 연상되는 팡틴, 팡틴의 딸 코제트, 성인이 된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부딪친다. 어찌 보면 누가복음 15장의 용서받은 탕자와 불평하는 그의 형, 마태복음 21장의 ‘싫소이다’ 했지만 뉘우치고 갔던 둘째 아들과 ‘가겠소이다’ 하고 가지 아니한 첫째 아들 등도 오버랩된다.

장발장은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전파하고 직접 삶으로 보이신 ‘베풂과 용서’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용서받은 그는 자신과 같은 주변의 ‘레미제라블’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도우며, 살려준다. 그는 삭개오처럼, 바울처럼, 어거스틴처럼, 용서함을 받은 후 자신의 삶을 그 분께 드린다. 그가 데려다 키우는 팡틴의 딸 코제트는 주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태어난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다.

▲자베르(왼쪽)와 장발장은 쫓고 쫓기며 대결을 펼친다.

장발장은 그러나 계속해서 자베르의 그림자에 쫓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이미 용서받은 자’가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아직 씻어야 할 죄’가 있는 듯 행동하는 것처럼. 그는 선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됐지만, 과거의 유산 때문에 계속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결국 마지막 자베르와의 만남에서 이를 극복해낸다.

자베르는 ‘몽학선생’과도 같은 율법의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신이 뒤쫓던 장발장은 그를 여러 번 구해줬지만, 그는 이 ‘사랑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자베르는 “바위 같이 단단한 신념이 틀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와 나는 세상에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가 오늘 내 목숨을 살려줌으로써, 내 영혼까지 죽였다”고 판단한다. 그런 그에게 장발장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너 같은 죄인”일 뿐이다. 하지만 장발장은 주교를 통해 ‘나 같은 죄인 살리신(Who am I)’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한다. 자베르의 결말은 마치 예수의 사랑과 은혜,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던져 버리는 가룟 유다와 겹쳐진다.

‘베풂과 용서’ 통해 변화된 장발장… 우리의 ‘배제와 포용’은

 

▲볼프의 저서 <베풂과 용서>, <배제와 포용>.

‘용서’라는 문제는 극한 상황에서 더 극적일 수 있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 청소’라는 아픔을 겪고 목격하며 ‘용서’의 문제를 누구보다 실제적으로 고민했던 크로아티아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도 <베풂과 용서(복 있는 사람)>에서 장발장과 자베르 이야기를 다룬다. “장발장은 새 사람이 되어 선행에 힘쓴다. 그는 자베르 경감의 목숨을 살려주기까지 한다. 자베르는 장발장을 범죄자로 의심하여 감옥에 넣으려던 자였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용서한다. 주교의 베풂과 용서를 통해 자신이 변화됐기 때문이다.”

‘장발장에게 임한 신의 은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베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용서를 경험했다 해서 누구나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베르는 용서받고 나서도, 남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에게 얽어맨 규정이 그를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용서를 거부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살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절대적인 정의를 실행에 옮기지 않으려면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볼프는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IVP)>을 통해 이같은 생각을 신학적으로 더 깊이 전개하기도 했다. 강영안 교수(서강대)는 이 책의 해설을 통해 “눈앞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근대 철학·정치적 프로그램은 실패했으며, 포스트모던 정치철학도 대안이 아닌 지점에서 볼프의 신학은 출발한다”며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닮고 따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을, 이론적이면서도 실천적 함의를 가득 담아 풀어간다”고 했다.

▲위험에 빠진 팡틴(오른쪽)을 구하는 장발장.

상대방으로부터 해를 입을 때,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용서는 쉽지 않다. 여기에 ‘엄격한 보상적 정의’에 따른 정당한 요구를 할 권리마저 억눌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적인 고통’을 통해 악인까지도 받아줄 수 있다. 그럼에도 용서만으로는 화해와 평화가 발생하지 않고, 포용(Embrace)이 필요하다.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원수와 악인의 포용을 보여주는 전형적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완전히 잊어버리기’가 필요하다. 만물이 새롭게 창조될 때, 옛 것이 다 지나가고 그것에 대한 기억까지 폐기될 때에야 비로소 구속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생자의 호소는 어떻게 되는가? “아직 메시아가 영광 중에 오시지 않았기에”,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가 대신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혁명은… 용서받은 자들의 ‘사랑과 용서’ 통해

대통령 선거 후 ‘48%를 위한 힐링 무비’라는 세간의 평 때문에 가졌던 선입견은 러닝타임 2시간 30분 동안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적어도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사함받은 우리가, 먼저 사함받은 내가 어떻게 하면 장발장처럼 그 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혁명의 깃발 아래 다함께 바리케이트에 모여 혁명을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 용서받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되어 찬송할 날을 꿈꾸며.

이 영화는 특히 2천년 전 예수와 2백년 전 장발장이 그러했듯, 진정한 혁명은 지난해 유행했을 뿐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도 동조했던 ‘분노하라’, ‘1%대 99%’ 등의 프레임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라는 성경적 방법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고 본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들, 특히 서양의 고전들이 ‘신의 선택과 구원’에 때로는 분노하고 반항하며, 때로는 조롱하고 비웃어 왔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피와 폭력, 복수로 쟁취하는 자유와 인권보다는 함께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닦아주는 마음, 함께 아파하며 껴안아주는 은혜와 사랑, 구원의 힘을 다시금 입증한다.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한국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 또한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교회는 ‘왼손 모르게 하던 일’을 ‘왼손도 알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일’에 부쩍 힘을 써 왔지만, 이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진하게 남기고 간 ‘사랑의 힘’을 믿고 기억하며, 실천하는 게 먼저 아닐까. 물론 우리 주변의 ‘레미제라블’들을 품고 돕는 일, 그들이 다시 꿈꿀 수 있도록(I dreamed a dream) 하는 일에는 지금처럼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다. 위고의 말처럼, “인간의 최고 의무는 타인을 기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