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고성 람세스는 어디에 있나? 출애굽기 1장에 의하면 이집트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의 강압으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국고성들의 위치는 성서지리상으로 매우 중요하기에 학자들은 이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 왔다. 위치 확인은 출애굽의 날짜를 아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불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역사학자들은 출애굽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생기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산 엘 하기르라고 알려진 타니스를 람세스로 여겨왔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점점 더 칸타르를 고대 라암셋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 문헌에 의하면 칸타르는 ‘라의 강’으로서 펠루시악, 즉 나일강의 동쪽 최전방 지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니스는 펠루시악의 바로 서쪽 타이데익 지류에 있다. 위치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칸타르를 오늘날의 텔 에드 다바 부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초기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일 가능성도 있는 곳이다. 라암셋 성의 이름은 람세스 2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람세스 2세는 정통 연대를 기준으로 보면 주전 1279년에서 주전 1213년까지 살았던 애굽의 파라오다. 그러나 성경에서 라암셋이라는 이름을 거론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당시에는 라암셋이라는 지명이 아니었지만 출애굽기의 독자들이 라암셋이라는 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 저자들이 그렇게 언급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가 있다. 칸타르는 애굽 사람들이 아시아족으로 부르는 셈족이 이 지역에 많이 살았다. 따라서 칸타르 셈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 거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오가 억압 정책으로 국고 성을 세우도록 했을 때 이스라엘 노예 노동력을 쉽게 이용할 수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아부심멜 람세스 부조. ⓒ크리스찬해피투어

지금까지는 람세스 2세 때의 조각상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니스를 라암셋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발굴 결과 타니스가 라암셋이라는 이론이 뒤집히고 있다. 타니스는 람세스 2세 시대와 출애굽 시기 훨씬 이후인, 21왕조와 22 왕조 시기에 살았던 파라오들의 중심 거주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타니스에서 발견된 람세스 조각은 람세스 2세가 사망하고 약 200년 후에 칸타르에서 타니스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 칸타르가 라암셋이라면 성경의 사건과 일치하는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칸타르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 거주지일 것으로 추정함으로, 이스라엘 거주지와 왕궁이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출 2: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라는 말씀을 본다면 몸종의 수발을 받으며 나일 강에서 규칙적으로 목욕을 했던 파라오의 딸은 강물에서 떠내려 온 아기 모세를 갈대 상자에서 발견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 자기 백성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는 말씀도 미루어 보아 왕자로서 궁정에서 자라게 된 모세는 쉽게 이스라엘 민족이 노역하던 지역을 돌아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 5:14~15에 의하면 이스라엘 우두머리들이 파라오와 대면할 수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의 재앙 기간에 파라오를 자주 방문했는데, 그러한 알현을 위해 먼 길을 가야 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러한 성경 기사로 보아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있는 곳과 파라오의 왕궁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

최근의 발굴 결과 람세스로 추정되는 칸타르 지역이 상업적·군사적 중심지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1990년대 발굴 결과 거대한 왕실터가 나일 동부 지류의 남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제18대 왕조, 즉 주전 1550~1300년경에 걸쳐 사용되었던 이 왕실 터는 성과 궁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은 강둑에서 약 30m 떨어져 있는 대지 위에 건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동편의 경사로는 성문과 연결되어 언제든 강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성 남쪽에 위치한 궁정은 두꺼운 벽과 무기고, 통로, 그리고 욕실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건축물 모두 신전, 작업장, 진영이 포함된, 벽으로 둘러싸인 주거단지 내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 모세는 이곳을 돌아다녔을 것이고, 출 14:7처럼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뒤쫓기 위해 이 장소에서 전차 600대를 동원하여 모세를 추격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따라 성경상의 미스터리가 밝혀지면서 우리가 순례하여야 할 곳이 변경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거의 없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람세스는 히브리어로 “라암세스 또는 라메세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레가 그를 낳았다”이다. 이곳은 애굽의 동북부에 있던 요새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노역을 시켜서 세운 국고성 중 하나이다(출 1:11). 이 국고 성을 애굽어로 표현한다면 ‘람세스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아마 람세스 2세가 원래 있었던 성읍을 보강·재축한 것에 관련된 명칭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라암세스는 하이집트의 중요한 성읍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고센은 ‘라암세스의 땅’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창 47:11). 이스라엘 사람의 애굽 탈출은 이곳을 출발 지점으로 하여 이루어 졌다(출12:37). 아시아계의 힉소스 왕조도 최초에는 도성을 카이로 남쪽의 멤피스로 정하였으나, 후에 이 람세스로 옮겼다. 이것은 아시아와의 관계를 긴밀히 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을 요새로 삼았고, 후에 아바리스라는 지명이 탄생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이집트의 18왕조 아흐메세는 힉소스 왕조를 추방한 후 그 도성 아바리스를 황폐한 채로 나두었으나, 제19왕조에 이르러 애굽의 아시아 정책 전개에 따라 전진 기지로서 중요성이 인정되어 람세스 2세는 이 요새를 재건하였다. 람세스 2세는 이 새로운 도시를 피 라메세스라 명명하고, 항구로서 또 요새의 성읍으로서 발전의 터전을 잡았다. 여기서 발굴된 신전은 고대 애굽 최대의 조영물 중 하나라고 한다. 그것은 람세스 2세가 이 성읍의 수호신인 셋을 위해 건립한 신전인데, 길이가 330m에 달하는 광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입구의 거대한 탑문위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30m 중량 900톤에 달하는 람세스 2세의 석상이 세워졌고, 그 석상의 엄지손가락의 굵기는 사람의 몸통 만하다. 이 석재는 이곳에서 약 1,200km떨어진 아스완에서 잘라내어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된 것이다.

그 밖에 많은 상, 스핑크스, 원주, 창고의 폐허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곳이 당초에 건설되었던 라암세스가 아니라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타니스, 즉 성경상의 소안이었다. 이 발굴로 인하여 고고학자들은 상당히 당황하였다.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65년 오스트리아 비테크 교수가 라암세스로 알려진 텔 엘 다바를 발굴하였고, 이곳에 설치되었던 조형물들이 2백년 후 타니스로 옮겨졌다고 밝혀냈다. 현재의 산 엘 하가루인 타니스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고 있으나, 입구에는 붉은색 석회암에 양각된 여신 하둘의 상이 놓여 있고,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적색 화강암으로 만든 람세스 2세의 비석이다.

이곳 람세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눈물과 고통이 서려 있는 강제 노역장이다. 이러한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시련이며, 이런 시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 이끌어내려는 하나님의 계획된 과정에 포함된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애굽의 보호아래 번창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때가 되었다. 애굽의 물질문화에 익숙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려면, 그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시련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 우리가 세상에서 뛰쳐나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 이를 깨닫게 하는 곳이 바로 람세스 성이다.

김용규 목사
령천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중동 선교사
성지 가이드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