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2백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성경의 기록을 찾아서 확인을 하여 보자. 특히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민수기 1장 2절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와 민수기 26장 2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에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의 말씀처럼 모세에게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을 계수하라고 명하신다. 어떤 학자들은 60만명 이상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 목록에 여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너무 늙어서 싸울 수 없는 노인들을 합하면 600만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인구가 300만명이 못 된다고 추정하고 있어서, 이 수는 현실성이 희박하다. 특히 애굽에서의 큰 인구 감소를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사실로 보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출애굽의 증거물. ⓒ크리스찬해피투어
그런데 조지 멘델흘 교수는 주로 천 ‘1,000’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엘레프”(복수형은 알라핌)는 가끔 한 부족의 소단위를 가리킨다고 설명을 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사사기 6장 15절에서는 똑같은 단어가 가족 또는 집안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천 ‘1,000’으로만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멘텔혼 교수는 민수기 1장 23절의 “시므온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59,300명이었더라”는 말씀을 “시므온 지파의 수는 59(알라핌) 단위들로서 300명이었더라”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세 당시의 군사들은 평균 5,000명에서 6,000명이었다. 멘텔혼의 주장에 따르면 모세의 백성들은 5,550명의 군사들과 그 아내들, 아이들, 노인들로 구성되며, 대부분 알고 있는 가정된 수백만보다는 적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도 문제는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민수기 1장 46절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런데 멘텔혼 교수는 민수기 1장 46절은 “본래 598알라핌(단위들)과 5,550알라핌(군사들)을 기록하였는데, 그 구절을 복사하는 후기의 서기관들이 같은 문장에서 엘레프가 두 개의 의미로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더하였다면 603,550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민수기 26장 51절에서도 유사하게 한 서기관이 596알라핌과 5,730알라핌을 함께 더하여 601,730의 총계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알레프가 진실로 하나의 단위로만 번역된다 할지라도 모세와 함께 애굽을 떠났고 또 약속의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싸웠던 사람들의 숫자는 여전히 큰 숫자이다. 낮은 숫자라고 가정할 경우 애굽에 있는 동안 예상되는 요셉과 그 형제의 숫자와도 적절하게 맞다. 그리고 그 정도의 숫자라면 그들이 떠났어도 애굽의 인구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쯤은 우리가 생각을 하여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아멘호테프 3세라고 추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서 새롭게 출애굽의 바로를 찾아보자. 출애굽의 시점들 중 왕국으로 추정하여 제12대 왕조의 말기를 통치하던 왕들의 기록을 찾아 보면 그 기록들이 남아있다. 세소스트리스 3세, 아메넴헤트 3세, 그리고 소벡네페루(Sobekneferu) 여왕들이 있다. 소벡네페루 여왕의 죽음과 함께 제12대 왕조도 막을 내렸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 보자. 성경에서는 그녀의 양자로 추정되는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12왕조는 소벡네페르 여왕이 마지막 파라오가 되었고, 13왕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 12대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한참 동안 불안정한 기간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실제로 보인다. 13왕조의 처음 파라오 14명이 숨가쁘게 대를 바꿨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초기에 속하는 왕들은 아마도 제12대 왕조의 몰락 이전부터 나일강의 삼각주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즉 12왕조 말부터 13대 왕조의 왕들은 삼각주의 북동 지역을 이미 통치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던 그들이기에 12대 왕조가 몰락하자마자, 곧바로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제13대 왕조를 열수 있었을 것이다. 온 이집트에 대한 통치 권좌에 등극하기 위하여 이 왕들 간에는 맹렬한 정권 쟁탈전이 전개되어,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짧은 통치기간으로 이어지는 결과들을 초래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정권 쟁탈전은 네페르호테프 1세의 즉위와 함께 가라앉아, 그의 재위 11년의 기간 동안 상당부분 안정을 회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던 상대자 바로를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라고 생각하고 현지 가이드들도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필자는 투디 모세로 추정한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 이집트의 역사학자 마네토의 기록에 의하면 13왕조의 마지막 파라오가 투디모세라고 한다. 그리고 투디모세의 사후 ‘어떤 민족인지 알 수 없는 침략자’들이 이집트에 쳐들어왔고, 그 외국인들이 한 번도 저항을 받지 않고 이집트를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전에 이집트에 덮친 재앙 때문일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쳐들어온 어떤 민족들은 아바리스에서 초대 통지자로 살리티누스를 세우고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을 역사학자들은 힉소스 왕조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투 없이 이집트를 점령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그리고 이집트 군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성경의 기록, 즉 출 14:28에 의하면 아마 홍해의 밑바닥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디모세를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미이라는 지금껏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용규 목사
령천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중동 선교사
성지 가이드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