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루한 기분으로 그 남루한 반 지하방으론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반감이 일었다. 어저께의 악몽이 와글와글 부글거리며 다가왔다.

아저씨. 다시 이태원으로 가주세요.

금희는 수정을 하였다.

직진을 하던 차가 우회전을 하려던 참이었다. 운전사가 백미러 속으로 찔러보는 눈길을 피하려고 되도록 오른편 창문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고 금희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통증이 되살아났고 등짝도 두통처럼 욱신거렸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초라한 방이나마 돌아가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니었다. 연탄불은 이미 꺼졌고 동굴 같이 어두운 방엔 냉기만이 가득 차 있을 테고, 룸메이트인 순자도 집에 가고 없다.

폭행죄라니. 얼마나 기막힌 단어인가.

네눈박이 여자는 날감자 같은 남자까지 달고 와서는 초라한 살림살이에 발길질을 하고 화장품 바구니를 집어던지고, 미친 짐승처럼 눈을 까뒤집고 덤비더니 머리채까지 낚아챘더랬다.

상스런 욕을 퍼붜대며 제멋대로 날뛰는 그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반항을 한 것이 여자의 코피가 터지고 안경알이 박살났다. 어이없게도 금희는 경찰서에 넘겨졌다.

주소와 이름, 나이는-?
동자동 연립주택 102호. 홍금희. 스물 하나.
직업은-?

금희는 아직은 신생삼류대학 음악과 1년 재학생이었으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겨울방학이 되면서부터 ‘월드팝스’에서 아르바이트로 춤을 추고 있었으므로.

밤8시부터 12시까지 네 시간씩 원탁 스테이지에서 비키니차림으로 춤을 추는 값이, 저녁 5시부터 꼬박 7시간 목과 팔목이 뻣뻣하도록 맥주홀에서 경음악을 치는 것의 세 배가 넘었다.

장인후라는 남자하구 어떤 관계야?
관계라니, 없다.

그는 샹들리에 불빛을 받으며 잘름잘름 혼자 와서 혼자 술 마시고 물뱀처럼 스르르 사라지는, 술손님이었다. 조용하고 쇠붙이처럼 고독해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 이외 금희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아르바이트로 춤을 추는 가난이라는 죄목에 걸려들어 어처구니없는 폭행죄를 뒤집어쓴 것은 대체 어떤 삶의 법칙인가. 온실식물 같은 신애의 얼굴이 파도거품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금쯤 ‘월드팝스’에는 미국인 디제이가 신명을 돋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시장기를 안고 금희는 ‘월드팝스’에 당도했다.

‘내부 수리중’

신문지 반절지만 한 종이에 서툴게 쓴 검은 페인트 글자가 겁에 질린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부수리, 라니’ 얼마 전에 새 단장을 했는데 내부수리는 말도 안 된다. 찬찬히 둘러보니 ‘월드팝스’의 네온사인만이 죽어 있었다. 실족한 사람처럼 아찔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지배인 정씨의 젖은 듯 떨리는 목소리와 비둘기 떼처럼 구구거리며 우왕좌왕하는 계집애들.

아직 번호표도 배당받지 못한 채 다시 옷 보퉁이를 싸야 할 웨이터 보조들. 한쪽에 집 쫓겨난 여편네마냥 처량하게 서 있던 뚱보아줌마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홀 안의 궂은 뒤치다꺼리를 하던 진주아줌마였다.

아이구우 홍양, 왜 이제 나와? 글쎄, 이 날벼락을 어쩌면 좋아. 모두들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구먼. 사장님이 무역인지 뭔지에 투자를 했다가 가게를 넘겨주게 되었다는구먼.

울었는지 눈가가 짓무른 아줌마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부탁했다. 온통 썰물에 휩쓸린 듯 삶의 비애가 깔려 있다. 플로어도, 디제이박스도, 앳된 웨이터들이 웅성대던 대기실도, 땀내 나는 핫팬츠를 갈아입던 비좁은 탈의실도, 낯선 절망을 깨물고 조용했다.

멍청한 초짜들은 질질 짜고 있고 다른 업소에서도 이런 꼴을 당해본 애들은 술을 홀짝이고 있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일수 아줌마와 돈 계산을 하며 말다툼하는 애들도 보였다. 진주아줌마가 식빵 두 쪽과 크림스프를 가져다주었다.

금희는 고개 수그리고 먹는 일에 열중했다. 마치 먹는 일만이 벼락처럼 닥친 실직에서 구제될 길인 양.

넌 집시처럼 춤을 춰야 해. 운명의 춤을. 처음에 금희는 생이 주는 실의와 도전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며 알코올의 악성이 타락을 손짓하는 이곳의 들뜬 분위기와 악수를 한 느낌이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짐을 챙겼다. 춤출 때 입은, 옷이랄 것도 없는 손바닥만 한 몸 가리개 몇 개와 목이 긴 인조 가죽부츠 두 켤레와 비닐제의 하이힐 등속이었다.

그녀는 꽤 무게가 나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상주도 없는 초상집 같은 곳을 도둑처럼 빠져나왔다.

밖은 휘황했다.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와 같은 생명력이 넘쳐나는 거리.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눈부신 밤거리의 물살 속으로 금희는 서서히 빨려들어 갔다. 거짓말처럼 금희는 빠트리고 나온 물건이 생각나듯, 실직이 실감되었다. 세상사가 하루 사이에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둔한 머리로 처음 배운 외국어 같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실직---? 왠지 부끄럽고 허전하였다.

앞을 가로막는 여자애는 같이 일하던 이양이었다.

홍언니, 약속 없으면 나랑 술 먹어요. 나 돈 있어요.

그래 술이라도 먹자. 이양을 만난 게 구세주인 양 반가웠다.

참, 홍 언니, 부산서 온 명숙이 있지요? 다음 주에 미국, 간대요. 그 꺽다리 존하구요.

명숙으로선 크나큰 행운을 잡은 셈이었다. 이태원에 서식하는 수백 명의 밤꽃들은 오직 미국으로 가는 게 최대의 소망이었다.

얼마 안 가 이혼을 당할지라도 일단 미군의 아내로 미국 땅을 밟는 것이 그녀들에겐 아메리칸드림의 첫 관문이므로.

이젠 좀 오래 있나보다 했더니, 난 왜 이런 개 같은 일만 생기나 몰라요.

왜, 개가 어때서? 너, 모르는 구나, 개보다 못한 인간이 이 서울에 얼마나 많은 질?

금희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술 먹은 의부가 검돌이에게 발길질을 할 때마다 바락바락 대들다가 실컷 얻어맞곤 했다. 끼니를 굶는 날엔 검돌이밥그릇에 솥단지 헹군 물에 한 술 밀가루를 풀어 주며 한숨을 짓던 엄마는 말하곤 했다.

저 말 못하는 짐승은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의부는 검돌이를 개국집에 팔아넘기려 눈을 번득거렸으나, 엄마가 그랬듯이 금희는 의부가 집을 비울 때면 검돌이의 목줄을 풀어주곤 하였다. 그래도 눈에 슬픔을 담고 어김없이 개는 집으로 돌아와 밥 주던 엄마의 양말을 물고는 부엌거적문 앞에 주저앉아 있곤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