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대교회 시대: 파문과 선교(Propaganda; missio)
(2) 초대교회 후기의 교리이단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바깥 고트족에게로 확산되어 번영해나갔다. 에베소에서 431년 열린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정죄되었다. 네스토리우스와 그가 속한 안디옥학파는 예수의 인성을 보존하기 위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라 부르던 관행을 거부했다. 곧 그러한 용어는 마리아가 낳은 그분이 참 인간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테오토코스가 ‘사람을 낳은 자(anthropotokos)’ 개념을 동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를 사용하기를 즐겨 했으며, 이는 신성을 강조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나 마리아 숭배를 강조했던 자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좌우간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성자피조설의 아리우스주의, 그리고 성자의 인성을 부인한 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강조했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한 프로소폰(prosopon) 안에서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그 자신은 이 단어를 인격으로 지칭했으나, 그를 반대한 자들은 그 단어가 네스토리우스에게서 ‘모습(양태)’으로 해석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단일화되기에 이르렀다고 비판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양태론적 단일군주신론이 세 위격을 포기하고 성자와 성령을 하나의 성부의 신성 안에 함몰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의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성자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보았던 단성론자의 견해와 동일선상에서 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네스토리우스는 로고스와 인성이 불가분 연합되었으나 두 본성의 혼합이나 변모가 있지 않았으며, 두 본성은 적절히 유지되었고, 인성만 고통을 받아 죽어 부활했으며 단 한 분 성자만이 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대감독이었던 키릴루스는 로마제국 동방지역을 장악하려는 속셈으로, 그의 정적이었던 네스토리우스가 ‘테오토코스’를 거부했다는 미명 하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즉 네스토리우스가 ‘하나님을 낳은 자’ 개념을 거부했다며 성자의 신성을 부인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특히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안디옥학파에 대해 크게 오해했다. 그들이 성자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예수 생애 동안 일어났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편견에 불과했다. 또한 키릴루스는 예수의 구원행위들이 인성을 통해서만 일어났다는 것이 네스토리우스의 견해였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와 그가 속한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인 로고스가 융합된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네스토리우스는 한 분 그리스도를 두 인격 혹은 두 격체(hypostasis)로 나누었다는 이유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그는 한 인격 안에 실재성을 지닌 두 본성을 함축한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런데 그는 그 두 본성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연결 혹은 결합(synapheia)으로 정의했다. 이는 자연적 혹은 본질적 결합이 아니었다. 로고스는 마치 성소 안에 거하는 것처럼 인간 예수 안에 거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두 본성은 각각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인성만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 등에 속할 수 있고, 신성은 영원하고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진정한 ‘신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닌 인간’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성질을 분리시키는 안디옥학파의 특성에 따라, 네스토리우스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배격했다. 그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로고스가 탄생되는 일은 불가능했고,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신성의 속성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그가 테오토코스를 거부한 이유였다. 곧 인간이 신성을 지닌 하나님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학파의 신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이단 혐의가 전무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던 안디옥학파의 기독론은 자연스레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 즉 두 본성의 속성간 교류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두 본성간 속성의 교류를 지녔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동방교회의 신임과 명성을 한 몸에 담고 있던 네스토리우스를 시기하여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키릴루스는 444년에 죽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디오스쿠루스가 그를 계승했는데, 그 역시 키릴루스를 따라 안디옥학파를 억압하기 위해 각각 두 본성의 독립적 병존을 주창하고, 두 본성간 속성의 교류를 거부한 안디옥 기독론을 정죄했다. 그러나 그는 키릴루스와 달리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각하기 위해 인성을 부인한 견해를 극단적으로 따랐는데, 이러한 견해가 소위 신알렉산드리아 학파였다.

유티케스가 이를 따라 극단적인 이단적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신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을 극단적으로 과도하게 밀고 나가면 생길 수 있는 견해였다. 유티케스를 따르면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는 오직 한 성질만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두 성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성질의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성질로 이루어진 그리스도는 한 분”이라는 키릴루스의 언급을 오해한 처사였다. 그는 이렇게도 언급했다. “하나님의 몸인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티케스는 44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감독 플라비안이 주관한 한 회의에서 파문당했다. 로마 교황 레오 1세는 플라비안의 손을 들어주었다. 449년, 레오 1세가 플라비안에게 보낸 서신은 ‘그리스도의 한 인격과 두 본성에 관한 교리’를 강조했다. 449년,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에베소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 디오스쿠루스가 주관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는 정죄됐고 유티케스는 회복됐다. 물론 두 본성 교리를 고수해 왔던 안디독학파의 기독론 역시 분쇄되었다.

레오 1세는 이를 ‘도적 회의’라 선언했고, 거기서의 결정을 정죄했으며, 결국 451년 그 유명한 칼케돈 회의가 개최되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성을 희생시켰던 디오스쿠루스는 정죄당했다. 칼케돈회의는 키릴루스를 정통이라 선언했고, 레오 1세의 서신 곧 ‘한 인격과 두 본성에 관한 교리’에 근거해 칼케돈 기독론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칼케돈 종교회의 직후 단성론 논쟁이 격화됐다. 곧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인정한 칼케돈 신조를 반대한 자들은 이제 단성론자로 불려졌다. 주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교회 전체가 열띤 흥분 가운데 휩싸이게 되었다. 단성론자들은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각 종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콥틱교회, 야곱당, 에티오피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으로 알려지게 됐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강력히 반대했다.

칼케돈의 결정에 도전한 두 번째 시도가 단의론 논쟁에서 행해졌다(633-680). 헤라클리우스는 단성론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한 의지’의 작용에 의해 그의 구속사업을 성취했다.” 곧 한 분 그리스도는 한 신적이며 인간적인 능력을 통해, 모든 신적이며 인간적인 일들을 행했다는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이러한 단의론을 배격하여 우호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6차 세계공의회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리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는 두 자연적 의지 혹은 의지 작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의 인간적 의지는 전능하신 신적 의지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속되는 것이다.”

(3) 공의회의 이단판별 기준

양자론과 양태론, 곧 역동적 단일군주신론과 양태적 단일군주신론 같은 단일신론과 아리우스주의, 즉 종속론적 단일군주신론 등의 두 신론적 이단이 극복되고 삼위일체 신관이 확립되기에는 2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단일신론자들은 하나님의 한 분됨을 확인했고, 성자와 성령이 실제 위격이며 성부와 구별된다는 점을 부인하여 유대주의로 귀환했으며, 아리우스파는 삼위의 구별성은 인정했지만 성자가 완전한 하나님이 됨을 부정했다. 4세기 정통교회는 아리우스파를 혐오했다. 이는 근대 합리주의적 이단종파의 대명사격이었던 유니테리안(18세기에 기적과 신비를 거부하는 이신론의 영향으로 생성된 반삼위일체파 단일신론주의자들)을 정통 개혁파들이 증오했던 것과 그 맥락을 같이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고 천명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다”고 언급했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이다”고 선포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둘이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정통 칼케돈 기독론은 126년 사이 네 번에 걸친 공의회 끝에 산출된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정통교회는 수차례 공의회를 통해 신론과 기독론에 관한 이단판별 기준을 마련하여 신조를 결성했고, 그것은 향후 기독교의 시금석이 됐다.

325년 ‘니케아 신조’는 교회 역사상 범교회적인 공의회를 열어 작성하고 채택한 신조였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서 그 교리에 관한 교회의 공동고백을 확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었고, 이는 아리우스에 의해 배격됐지만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복원됐다. 정통파의 승리로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때 니케아 신조가 재차 확인될 때까지 이 논쟁은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열띤 투쟁 상태에 들어갔다.

니케아 신조는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이란 용어를 사용해 삼위의 관계를 설명했으나, 이는 더욱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인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주의의 편을 들어주자 정통파는 열세에 몰렸고, 아타나시우스는 다섯 번씩이나 추방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채택, 아리우스주의에 승리를 거뒀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보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물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물음이 종결되자, 이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과 사람이심, 즉 신성과 인성이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는 물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사가 전환됐다. 곧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곧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오랜 기독론 논쟁은 로마 감독 레오 1세의 청원으로 451년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종결됐다. 양성을 분리하는 안디옥학파의 극단적 기독론이나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성론적 기독론을 배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혼합되지 않으며 분리되지도 않고, 속성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도는 단일한 인격을 가진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상술한 부분에 관한 니케아 신조의 진술은 이러하다. “하지만 그가 계시지 않았을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그가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 성령이 존재하지 않은 것에서 왔다고 하거나 하나님 아들이신 그가 상이한 실체나 본질에서 유래했거나 창조되었다고 하는 자, 그래서 변화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거룩한 공회가 빛이 서린 표독한 눈으로 되지 않기를 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성자, 주, 두 본성을 타고 나신 독생자로 인정하며, 이 두 본성이 혼동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각 본성의 특성은 연합으로 무효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성은 보존되고, 양성이 한 품성과 한 자질로 일치를 이룬다. 양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하나님의 한 분이시며 유일하게 독생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초대교회의 이단판별 기준은 각 공의회 신조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신론과 기독론을 둘러싸고 몇 차례에 걸쳐 개최된 공의회는 삼위가 상이한 본질에서 유래했다거나, 변화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정죄했다. 또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서로 혼동하거나 다른 본성으로 변화된다고 보거나, 분리된다고 여기거나, 대립된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정죄했다. 결국 하나님의 삼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서로 연합되어 있으되 구별되지만, 서로 혼동·분리·혼합·변화·대립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단판별의 기준점이었다.

상술한 초대교회의 이단판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유대주의·영지주의·마르시온주의·몬타누스주의 등 초대교회 4대 이단은 성경과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 등의 판단 기준에 비추어 초대교회 변증가들의 저술들을 통해 현격한 이단으로 판별·반박됐고(이레네우스의 <이단 반박>, 테르툴리아누스의 <프락세아스 반박> 등), 결국 저들의 비정통성은 그들 스스로 저절로 도태되는 자양분이었다.

둘째, 3세기 이후의 신론과 기독론 이단 등의 초대교회 교리이단 판별에 있어 그릇된 의미의 정치적 이단판별 사례가 있었다. 소위 키릴루스의 네스토리우스 이단정죄가 그것이었다. 이는 단성론 계열의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양성론 전통의 안디옥학파의 알력과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거의 정통교리에 가까웠던 네스토리우스파는 추방당하여 멀리 중국 당나라(‘경교’로 불림, 신라에까지 파급됨)에까지 기독교 선교와 프로파간다를 시행했던 것이다.

셋째, 정통파에 의해 이단으로 판별된 단성론파는 이집트·시리아·아르메니아 등지에서 각각 종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콥틱교회, 야곱당, 에티오피아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으로 존속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를 비롯, 특히 단성론파들이 정통교회가 미치지 못하는 오지로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와 기독교 프로파간다를 단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사 중 가장 큰 이정표가 될 것이다.

넷째, 7세기에 삼위일체 교리가 완성되기까지 거의 5백년에 걸쳐 이단논쟁이 시행되었다. 정통 교리는 정통 교회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주지하다시피 수백년에 걸친 교리논쟁을 통해 축적된 인고의 결과물이었다. 곧 정통 교리는 전통의 날조가 아니라 창조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똘레랑스(관용정신)가 핵심이 돼 기독교의 솔리다리티(연대)와 프로파간다(선교)를 단행해나가는 디스꾸르적(담론의 형성) 사명을 오늘날 감당하는 일에, 이러한 전통이 조심스럽게 사용되는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곧 초대교회의 관용과 담론 및 연대와 선교 정신을 본받아, 엄격한 기준(3대 이단판별 기준: 성경,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으로 이단을 판별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단판별은 느리고 신중하게, 자세하고 설득력있게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관용과 연대성은 상실되고, 외연 확대와 담론적 대화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3. 중세교회 시대: 독선과 마녀적 종교재판

(1) 중세 초기 정통과 이단

중세 전반기의 반(反)로마가톨릭적 교리는 초반 3대 이단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투스주의, 노바티안주의 등이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은총론·구원론은 비주류로 밀려났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혹은 세미-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유론/구원론이 정통교리가 됐다.

뱅상(Vincent)은 급진적인 자유의지론과 행위론적 공로주의 구원론, 원죄부정 등의 신학적 개념을 지녔던 펠라기우스와, 성경에 근거한 은총론적 구원론―원죄, 속박의지, 은혜, 예정 등―을 주창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모두를 기각하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 핵심인 신인협력설적 구원론을 로마가톨릭 정통 구원론으로 채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적 구원론은 이단설로 정통교리에서 기각됐고,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비로소 정통 교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도나투스주의와 노바티안주의는 배교문제로 인한 교회분파 운동이었다. 로마의 박해에 굴복하여 배교한 교회 지도자들이 행한 성례가 유효한가 하는 점이 논쟁의 관건이었다. 그들은 ‘인효론(ex opera operantis: 인간이 행한 일로부터)’을 강조하여 배교한 지도자들의 모든 행위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떠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효론(ex opera operata : 행해진 일로부터)’을 주장하여, 성례는 집례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그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만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리에 들 수 있었다.

(2) 중세 말기 이단과 신비주의 운동

중세 후반기 4대 이단은 이원론과 영지주의 등에 근거한 바울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발도파 등이었고, 말기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대표한 신비주의 운동이 형제단 운동(베긴 형제회, 베가드 자매회 등), 새로운 신앙운동(via moderna) 등과 함께 기승을 부렸다. 최종적으로는 종교개혁 이전 개혁운동이었던 위클리프파 운동(롤라즈운동), 후스파운동 등이 있었다.

중세 바울파의 원조는 전술한 양자론의 태두였던 사모사타의 바울이었고, 그들 스스로는 사도 바울을 그 자신의 기원으로 삼았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에서 시작돼, 2세기 이원론적 마르시온주의(선신과 악신을 나누며, 육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가현설을 주장함,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을 채택하여 이원론적 사상의 근거로 삼음)를 비롯하여, 아르메니아에 퍼진 단성론도 수용했다.

중세 보고밀파는 지하교회 조직을 지녔으며,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황제 알렉시우스는 보고밀파 감독이었던 바실의 회개를 집요하게 촉구했으나 거부당하여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교회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이러한 이단자의 처형은 비잔틴제국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개 바실과 같이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는 지도자에게 한한 일이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 이단인 보고밀파의 영적 형제인 카타리파에 대해 평신도, 지도자 할 것 없이 모두 화형에 처했다. 보고밀파 역시 이원론적 마니교와 영지주의를 닮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는 서방교회의 이단을 대하는 태도가 동방교회에 비해 훨씬 더 강력했던 증거다.

동방교회 보고밀파와 서방교회 카타리파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조로아스터교처럼 악과 선, 즉 두 영원한 원리를 가르쳤다. 또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장자인 사타나엘, 차자인 예수이며, 모반한 장자는 하늘에서 추방당해 물질계와 사람을 만들었다. 예수는 말씀으로 세상에 와서 사타나엘을 패전시켜 사탄이라는 이름만 가지게 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 신실한 자들, 즉 보고밀파와 함께 거하도록 했다. 삼위일체도 없고 말씀과 성령은 무인격자다. 그들의 순결한 삶은 동서방 정통교회의 난잡하고 비도덕적인 삶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뤘다. 청빈하고 순결한 삶은 현대 후기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닮았다.

중세 서방교회의 카타리파는 보고밀파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이원론적 교리를 지녔다. 12-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생겨났던 카타리파의 일파인 알비파 역시 동일 분파였다. ‘카타르(헬, katharos)’는 ‘순수한’이라는 의미이며, 이원론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었다.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보고밀파를 척결하기 위해 탄압하자, 서방으로 피난 온 그들이 카타리파가 된 것이다. 카타리파의 급성장은 로마교황청이 종교재판 제도를 만드는 근거가 됐다. 새로 등장한 카타리파운동은 엘리트주의와 금욕주의를 표방했으며, 이는 당시 타락한 서방교회에 있어서 큰 자극제가 되었다.

발도파는 ‘가난한 이단’으로, 전술한 이원론자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타락을 믿었으며, 참회와 성체를 행했지만 오직 신실한 목회자들에게서만 받아들이는 ‘인효론’ 전통에 있었다. 그들은 매우 높은 도덕성을 지녔고, 이원론적 이단들이 청결한 지도자만 도덕성을 강조하고 평신도에게는 방종하도록 허락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발도파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함축한 영적 지침을 적용했다. 그들은 독점적 사제직을 거부했고, 청결한 자라면 누구든지 사면을 선포하고 성체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루터의 만인사제설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확신했고 카타리파와는 달리 불가타와 같은 신뢰성 있는 성경을 배포했다. 종교개혁파의 개척자들이었지만(평등한 장로주의 회의체를 채택하고 로마가톨릭의 사제직을 부정함), 이원론이나 다른 이단성을 찾을 수 없는 발도파(리용의 가난한 사람들)는 개혁파와 교제를 나눴고(마틴 부처가 특히 그러했음), 개혁파로 전향하기도 했다. 또 최초로 초대교회 장로직제를 회복, 개혁파에 이어주기도 했다. 마틴 부처가 발도파의 장로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이를 깔뱅과 낙스가 이어받았다.

또 중세 말에는 특히 유명론의 대두와 함께 신비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중세의 종말을 초래했다. 유명론은 중세 스콜라주의의 실재론을 거부하는 철학이었고(로마가톨릭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존재론의 핵심 코드인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라 이름에 불과하다는 주장), 신비주의 운동은 타락한 중세교회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개인과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을 통해 엑스타시적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운동, 즉 잉글랜드 위클리프파 운동(롤라즈운동)과 그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 및 체코의 후스파 운동 등과 함께 중세의 막을 내리게 하는 탈교회적 대형 개인주의 신앙운동이었다.

(3) 독선적 이단판별과 압제적 종교재판 및 형벌

이단자들에 대한 핍박은 매우 극악했기 때문에 신앙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 참혹한 고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비잔틴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보고밀 감독 바실을 처형하여 잔인한 억압을 시작한 후, 정부와 교회의 정책은 정당성을 얻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이단에 대해 동방교회보다 더 극렬했던 태도를 보였던 서방교회는 강력한 정부 중심의 교회가 극심한 핍박을 전개했다.

동방교회의 알렉시우스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근거를 둔 옛 로마제국 법에 따라 이단자를 정죄했다. 그 법은 이단을 중범죄로 다스렸다. 서방교회에서는 로마법이 잘 시행되지 않았지만 이단에 대한 교회의 형벌만큼은 로마법 그대로 시행됐다. 평신도는 출교를, 성직자는 수도원에 감금했다. 카타리파 일원이었던 알비파는 자신들에 대한 극악한 교회의 처벌에 맞서 투쟁했다. 이러한 난폭성은 중세교회의 종교재판이라는 제도를 만들게끔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단형벌로서의 벌금형, 재산몰수형, 추방형 등은 감금, 낙인, 그리고 사형 등으로 재빨리 전이되었다. 이는 당시 교회법의 규정을 넘어선 과도한 것이었다. 민법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마니교도를 처형하도록 규정했지만, 1140년 볼로냐의 그라티안이 출판한 로마가톨릭 교회법은 칙령집(Decretum)은 추방이나 벌금형에 처할 정도로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세교회는 법을 어기고 이단에 대해 스스로 과도한 중벌형에 처했다.

특히 서방교회는 이단에 대한 어떤 조직적인 입법 조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르만의 대이동은 옛 로마법의 무시를 초래했고, 더욱이 이단은 중요시되지 않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이단 혐의자는 성직자나 수도승이었기에 교회법이나 수도원규칙에 따라 처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단 운동이 반국가적 모반행위로 전환되었을 때, 국가는 이단에 대처하는 입법을 단호히 시행하여 감금, 재산몰수, 사형 등 잔인한 형벌제도를 도입했다. 이처럼 종교재판 제도는 국가의 강력한 형벌적 지원에 의해 중세교회의 엄청난 무기가 되었지만, 이는 중세교회의 급속한 몰락 징조가 됐다. 특히 스페인에서의 종교재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잔인한 양상을 띠었다.

4. 종교개혁 시대: 다양한 기준(Canon)과 신앙규칙(fomula fides)

(1) 기독교 종파의 분립과 다양한 신앙규칙

종교개혁 이후 서구의 기독교 판도는 다양하게 정립되었다. 즉 그리스정교회(동방교회), 로마가톨릭교회(서방교회), 종교개혁교회, 재세례파(급진적 종교개혁파), 잉글랜드 국교회(일명 성공회, 앵글리칸 교회라 칭함) 등 크게는 다섯 종파가 서구 세계를 분할했다. 이들 간에는 종교전쟁이 확산되었다. 루터파와 로마가톨릭 간의 슈말갈덴 전쟁(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약), 개혁파와 프랑스 갈리칸 카톨릭의 위그노 전쟁(낭뜨칙령), 전 유럽에 걸친 카톨릭과 개혁파간의 30년 전쟁(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 등으로 인해 유럽은 화약고가 되었고, 전후 “그 지역 군주의 종교가 그 지역 시민들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유럽 시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사했으며, 이는 근대의 여명이 동트는 징조가 되었다.

곧 지긋지긋한 장기간의 종교간 전쟁 시대가 가고, 똘레랑스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중세 종교전쟁과 교리적 분파대립을 빌미로 기독교를 미신화 해버렸고, 이는 종교개혁 이후 똘레랑스와 디스꾸르를 거부한 신종 종교재판이 됐다. 그들은 이신론(보편적 이성신앙)으로 기존 정통기독교 교리를 훼파해버렸고, 동일성의 철학으로 중무장한 채 타자들을 헐뜯는 일을 일삼았다. 이성과 진보의 두 수레바퀴는 앞으로 달리면서, 뒤에 남겨진 전통들을 모조리 삭제하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동방교회는 단일신론, 단성론, 단의론 등의 색채를 지녔고, 재세례파는 무정부주의 및 무교회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나머지는 정통 기독론과 삼위일체 신관을 지녔으나, 종파에 따라 은총론과 자유론으로 나뉘었다. 특히 알미니안주의가 초대교회 펠라기우스 전통을 이어 원죄론과 속박의지, 은총과 예정을 거부하고 인간의 완전교리를 주창했던 웨슬리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도르트 종교회의는 도르트 신조를 결성해 ‘칼빈주의 5대교리’를 확정지어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했다. 결국 종교개혁 이전 서방교회 독점적 지배 상황에서 이제 사분오열되어 진리체계가 분화됐으며, 관용과 연대 및 선교 등에 있어 협력을 추구해야 하는 지상과제가 생겼다. 그 일환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전개됐다.

(2) ‘아디아포라(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 문제)’ 원칙의 제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종교개혁은 종교개혁파들의 형식 원리(fomula principia)가 동일함을 보여줬다. 루터, 깔뱅, 쯔빙글리, 멜랑히톤 등에 있어 이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이신칭의 교리, 은총론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디아포라에서 차이를 보였다. 즉 ‘성경이 명백히 금하지 않는 한’의 문제였다. 특히 루터는 성경이 명백히 금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다(성경이 금하지 않는 로마교회의 전통은 널리 똘레랑스를 발휘하라는 인정하자는 주장). 성경이 명백히 금지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관습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깔뱅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모든 전통과 관습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곧 성경이 명하는 로마교회의 관습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디아포라(diaphora)’, ‘규정적 원리’라고 한다. 이는 성경이 명백히 말하는 ‘간섭받은 영역’이다. 이와 반대로 성경이 명백히 말하지 않고, 따라서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 하는데 이는 불간섭 영역에 해당한다. 이는 ‘성화된 상식’으로, 신앙과 양심 및 상식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예배시 예복문제, 예배시간, 예배순서 등이 이에 속한다.

루터는 성상을 아디아포라로 여겼으나 쯔빙글리와 깔뱅은 이를 우상숭배로 규정한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디아포라로 여겨 철폐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루터는 십계명 중 제2계명의 우상숭배 금지령을 형상 금지로 보고 이를 성상과 차별화한 가톨릭의 견해를 수용했지만, 쯔빙글리와 깔뱅은 성상과 형상을 동일하게 봤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가 성경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하여 이를 디아포라로 보고 금지했다. 그러나 깔뱅은 고린도전서 1장 16절의 “또한 내가 스데바나 집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으로 세례의 범위를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으로 보면서 유아세례를 인정했다. 곧 성경이 명백히 금하지 않기에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이는 아디아포라에 해당한다. 즉 어떤 경우에 있어 깔뱅은 루터의 견해를 따르기도 했던 것이다.

멜랑히톤은 성찬 논쟁에서 로마가톨릭의 화체설, 루터의 임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깔뱅의 영적 임재설 등이 성경에 명백한 근거가 없는(‘이것은 내 몸과 피’라는 주님의 말씀은 해석의 문제이지 어떤 한 주장을 지탱해주지 않는다는 의미) 아디아포라로 보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 교회들이 나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멜랑히톤은 보기 드문 종교개혁기 에큐메니칼 운동가였다.

(3) 꽁지스트와(Consistory)를 통한 이단판별과 똘레랑스

기독교 종파의 분립과 아디아포라 원칙은 각 기독교 종파들이 지녀야 할 이단 판별과 대처에 관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특히 오늘날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매우 유효한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해 이단 판별은 디아포라, 즉 중요한 기준에 근거해서만 시행돼야 하며, 그것은 성경, 전통, 예수의 구원성 등에 국한해만 한다.

이외에 제도와 관습 및 예식의 문제, 아디아포라적 소소한 교리문제 등으로, 정치적 의도에 의해 어떤 분파를 이단으로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귀신의 존재에 관한 해석, 아디아포라적 난해한 성경구절 해석 문제, 성찬설에 관한 견해(라드베르투스의 화체설과 라트람누스의 상징설로 대별돼, 이후 화체설, 임재설, 상징설, 영적 임재설 등이 주창됨), 예정론 논쟁, 성상 논쟁, 필리오케(성령이 성부로부터, 아니면 성자와 성부로부터 발출되느냐) 논쟁 등이 이단판별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6세기 중반 깔뱅이 목회했던 스위스 제네바교회는 목사회와 ‘꽁지스뜨와(장로법원)’을 두었다. 그런데 꽁지스뜨와는 제네바 시의회 소관이었고, 목사회만 제네바교회가 관장했다. 전자는 시의회에 속한 장로들이 소속됐는데, 이는 제네바교인들의 풍속과 신앙성을 감찰하는 하급심적 일심 재판정 성격을 지녔다. 각종 경범죄나 신앙을 게을리 한 죄를 범한 교인들은 꽁지스뜨와에 호출돼 재판을 받아 벌금형이나 여타 권징이나 훈계 등의 형벌에 처해졌다. 물론 여기서 처리한 죄목은 수십가지에 달하며 그 중에 이단죄도 속해 있었다.

즉 제네바에서 이단은 꽁지스뜨와의 재판을 받아 처리됐으며, 이는 중세 종교재판과는 맥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장로들의 합심에 의한 심리로 이뤄졌기에 과하거나 편파적이지 않았고, 꽁지스뜨와의 일차 목적은 교정과 회심을 염두에 둔 권징에 있었기에 충분한 계고와 권면이 이뤄지곤 했다. 이는 과연 똘레랑스의 전형이었다. 또한 제네바 시민들이 연대하여 프로파간다를 넓히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제네바교회는 오늘의 장로교회가 아니었다. 치리는 시의회에 속한 장로법원에서 이뤄지는 점에서 달랐다. 물론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이를 이어받은 여타 장로교회는 당회를 통해 치리하면서 치리권이 시 정부에서 교회로 이관되기에 이르렀다.

깔뱅 당시에도 이전 시대 못지 않게 다른 견해들이 난무했다. 볼섹의 예지예정론, 오지안더와 스탄가로의 단성론 및 단의론적 견해, 리베르땅(자유주의자들의 율법폐기론) 등은 아디아포라에 해당했기에 깔뱅의 논박적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이단으로 정죄되지는 않았다. 이 역시 똘레랑스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문제는 달랐다. 그의 반 삼위일체론은 당시 어떤 교회에 속해 있었어도 화형 당할 중범죄였다. 깔뱅을 폄훼하는 해석자의 주장과는 달리, 깔뱅은 그의 화형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깔뱅은 로마가톨릭의 전횡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극악한 태도를 그대로 취할 리 만무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