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며칠 전 친구와 함께 캠퍼스 나무숲을 걸었다. 나뭇잎들이 초가을의 빛을 받으며 반짝 거렸다. 잎새들 사이로 태양빛이 다정하게 흘러내렸다. 우린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을의 숲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걸어본 것이. 함께 낙엽을 밟아본지도 까마득한 것 같았다. 나무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친구는 발갛게 상기된 볼을 하고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도 시몬은 나뭇잎 떨어지는 숲으로 가고 있을까’ 라고. 왜 친구가 시몬이란 이름을 떠올린 것인지 그 이유를… 나는 마치 옛날 이야기를 하듯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가을이니까.

우리 세대의 가을은 모윤숙 시인의 “시몬아 나뭇잎이 떨어지는 숲으로 가자” 라는 시와 함께 찾아왔었다. 그리고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우리는 폴 베를렌의 노래를 낭송하면서 가을을 보냈다. 가을을 맞는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고 있는 베를렌의 시를 여기에 옮긴다. 가을이니까.

“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울적함에/ 마음 아파라/ 종이 울리면 가슴이 메어/ 파리해진 채/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며/ 눈물 짓는다// 그래서 나는/ 모진 바람에/ 떠날려 가서/ 여기 또 저기 굴러다니는/ 낙엽 같아라”

폴 베를렌은 프랑스어로 된 시 가운데 가장 곱고 음악적인 시를 쓴 시인이다. 나는 친구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우리는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 룩상브르 공원으로 갔다. 룩상브르 공원에는 수없이 많은 프랑스 문학사 거장들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들 기념비들을 지나 우리가 멈추어 선 곳은 폴 베를렌의 기념비 앞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가을의 시> 때문이었다. 당시 외국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프랑스 시 가운데 애송시 하나를 꼽으라한다면 거의 모두가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뽑았다. 그 정도로 애송되었던 가을의 노래였다. 소위 데카당 시인의 표본인 베를렌의 시를 애송했던 것은 전후 암울한 시대상과 우리의 취향이 맞물린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베를렌의 기념비 앞에 서서 내 친구는 <가을의 시>를 프랑스어 그대로 읊었다. 나는 그날의 감동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로니에숲에는 나뭇잎들이 눈처럼 쌓여있었다. 파리의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날 우리는 시인의 산책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였던가.

오늘 친구는 그 추억을 가지고 먼 곳으로부터 내게 왔다. 친구란 누구일까. 어떤 관계의 사람을 친구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옛날처럼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웃었다. 나뭇잎들은 발밑에서 소리를 내었다. 모든 색이 빛났고 모든 소리가 가을의 운율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만나면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어떤 행동을 함께하고 또 어떤 상태에 함께 있는 사람을 친구라 한다. 때로는 공동의 이익이나 목적 사업 따위를 함께하는 사람도 친구가 된다. 오랜 세월 사귀어온 적이 있는 학창시절의 동료들을 친구라 부른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추억을 공유한 사이가 아닐까 한다. 그 추억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늘 서로를 격려하며 삶의 의욕을 북돋우며 창작의 힘을 제공해 주는 관계가 아닐까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오늘 우리 둘처럼 그 추억에 여전히 공감하고 반응하면서 생명의 힘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이를 친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체온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운율을 따라 나누어 불렀다. 우리는 서로 추억에 대하여 말로 형언이 안 되는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 동기들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다시 싱그러워졌다.

그 순간 충격처럼 내 영혼이 요동쳤다. 나를 친구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와 함께했던 가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져졌다. 가을을 노래하는 새와 바람, 가을을 춤추는 구름과 강물 곁에 나는 그날처럼 서서 그 분으로 인해 희망에 넘치며 격려 받았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표현할 수도 없는 전율적인 기쁨이 차올랐다. 만나보지 못한 나무 숲에서 이는 바람소리까지… 내 삶의 가을로부터 왔던 값없는 선물의 신성한 아름다움 때문에 나는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험은 그야말로 필립 얀시의 고백처럼 ‘grace happens’ 였다.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