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잘 돌봐주라고 당부하더라. 불규칙한 식사와 네 건강이 염려된다고.

흥. 신애는 콧방귀를 튕겼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픽 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위악적이니?

금희는 낮게 웅얼거렸다.

신애는 괜히 심사가 뒤틀려져서 위선보다는 그편이 낫다고 너도 느낄 텐데, 쏘아주었다.

마음에 없는 말들을 지껄이다 보니까 눈물이 비칠 것 같은 절박한 기분이 되어 신애는 외박에 대해 고백하고 말았다. 평상시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금희의 아련한 눈길을 보며 신애는 말을 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빼앗기는 건 싫었어. 아주 어릴 때였어. 은애가 아버지가 화신백화점에서 똑같이 사다주신 내 소꿉장난 곽을 뒤져서 주전자를 몰래 훔쳐갔을 때, 난 밤새껏 걔의 소꿉장난 곽이랑 책상 서랍을 홀랑 뒤져서 도로 찾아왔다고. 어휴- 잠자리랑 방아깨비 잡은 것도 걘 꽉 쥐어서 죽으면 내걸 달라고 쟁쟁대었다고. 나보다 건강하고 다부진 그 애가 1.4 후퇴 피난길 폭격에 안개처럼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니? 그렇게 사라졌으니 그렇게 다시 짱! 하고 나나탈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아주 희박하겠지만, 그런 기적이 내 앞에 실현되지 말란 법 또한 없지 않을까?

물론, 절대 그렇지 말란 법은 없지! 금희의 응원에 힘입어 신애는 말을 이었다.

내 생은 매일매일 아주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난 두려워. 이렇게 공부조차도 느리게 한 발 한 발 나가는 게 무의미하고 너무너무 공허해.

갑자기 금희가 자기의 왼쪽 귀를, 머리를 헤치고 보여주었다. 항상 양쪽 귀를 덮고 머리를 빗는 금희의 왼쪽 귀는 귓바퀴가 반 넘어 찌그러진 보기 흉한 귀였다.

병신 귀야. 이런 귀를 본 적 있니?
금희는 화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충격을 받은 건 신애였지만, 큰소리로 반박을 하였다.

그 귀가 어쨌는데?

그러자 난폭한 손놀림으로 다시 금희는 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넓적다리에 손바닥만 한 흉터를 보여주었다.

파편이 뚫고 지나갔어. 내 운명처럼.

흉터는 참담하고 금희의 흉터를 응시하는 신애의 눈길엔 경련이 스쳤다. 신애는 아무 말을 못 하였다.

그 때, 나는 아주 죽었어야 했을지 몰라.

그쯤의 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버린다는 건, 너무한 이지고잉 아닐까?

금희의 뒤틀리고 자조적인 푸념에 신애는 초조롭고 채찍을 받은 기분이 되어 빠르게 말하였다.

넌 몰라. 불구의 기분은 불구자만이 아는 걸 테니까.

금희는 악을 썼다.

그녀가 육체의 불구라면 신애는 정신 쪽의 그것은 아닐까.

정신의 흠집이야말로 생의 함정은 아닐른지. 금희의 눈물을 본 신애는 금희를 끌어안고 오그라진 귀를 힘껏 빨기 시작하였다. 살고 있으면 생은 이토록 뜨겁고 아픈 감동의 순간을 선물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싸락눈 내리는 소리처럼 유리창에 싸락싸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어 신애는 눈을 떴다. 유리창에 부딪고 있는 건 겨울을 부르는 빗방울이었다. 유리창을 부딪는 빗방울소리를 들으며 불현듯 신애는 단팥죽이 먹고 싶다. 아버지를 위하여 아기 업고 자주 단팥죽을 만들던 엄마! 문득 신애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는 행복을 선사해줄 것 같지 않은 자기 생을 가늠해보며 귀중품을 잃은 듯 쓸쓸해진다. 동화음악실에는 공군과 그 곳에서 약속을 한 이후 갈 수가 없다. 자기존재가 생존해 있는 이 지상에서 그를 다시 만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므로.

푸슬푸슬 바람에 날린 가느다란 가랑비가 줄곧 입고 다닌 낡은 풀색 버버리를 후줄근히 적신다. 얼굴에 검정 스카프를 두르고 신애는 이학으로 갔다. 한 끼의 식사지만 제대로 된 식탁에서 먹고 싶었다.

신애는 구운 연어와 잔 조개 된장국을 먹는다. 만족한 위가 사뭇 세상의 빛을 달라 보이게 하고 험한 기억도 비를 품은 검은 하늘도 선하게만 느껴졌다. 한 끼 식사의 고마움으로 세상을 세상으로 바로 보게 된 건지, 신애는 되새겨보며 도심의 뒷골목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챙 낮은 지붕들이 속살거리듯 닥지닥지 붙어 있고, 그 얕은 지붕의 처마 끝마다 촉수 낮은 전등불 빛이 새어 나오고, 질척하고 좁다란 골목길이 새끼줄 같이 이어져 있었다.

불량소녀처럼 껌을 씹으며 신애는 얼룩덜룩 분칠한 원색 옷의 여자들이 문기둥마다 서 있는 곳을 느리게 지나갔다. 수작을 거는 술 취한 놈팡이들을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 호객을 하는 소년들을 흘깃거리면서 지나갔다. 문득, 신애는 멈춰 섰다. 전신주 옆으로 감색 바바리를 걸친 사나이가 분홍 원피스의 팔을 끼고 막 돌아서는 참이었다.

이신중 씨, 그였다.

여자가 필요한 그와 다만 내일의 생계비가 필요한 여자였을까.

어리둥절하여 빠른 걸음으로 걸은 신애는 생각지 않은 시공관 앞에 와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조금은 당황하였다. ‘도이치 발레’의 간판을 올려보고 있는 신애는 ‘올페’ 하고, 입 속에 품어 본다. ‘리스트의 올페 라면---?‘ 아무 생각 없이 젤소미나 같은 표정으로 신애는 한동안 도이치 발레의 간판을 올려다보며 서있었다.

들어가시죠! 저음의 목소리가 들리고 신애의 손에 티켓이 쥐어졌다. 어깨가 조금씩 밀리었다. 물길 같이 움직이는 입장객들에게 밀리어 그녀는 저절로 움직여졌다.

화려한 화원과 같은 스테이지에선 막 발레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블랙 스완.

신애가 내내 환상에 잠기었던 시간은 흐르고, 끝으로 ‘올페’의 막이 오르고 푸른 물결처럼 파문 지는 공연은 막을 내렸다. 시공관을 나와 대낮같은 명동을 걸으며 비로소 곁을 걷는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발레란 언어의 장벽 없는 예술이란 걸 비로소 알게 되었소. 양덕분에---.

남자는 그 말을 하고는 택시를 집어타고 사라져버렸다.

스치는 한줄기의 바람이었던가.

말 한마디도 건네본 적 없이 옆모습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어디에서고 만난다한들 그녀로서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환각을 느꼈던 것 같은 의식을 털고, 신애는 그 사람이 사라져간 을지로 입구에 서서 외국어단어를 외워보듯 입속말을 뇌었다.

‘난, 올페의 애절한 사랑을 받는 유리디케의 춤을 보고 싶었었지’

집을 향해 도심의 야경을 걷던 그녀는 잠간 멈춰 서서 잠들고 싶은 눈을 감아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