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약한 몸으로 신애는 들쑥날쑥 학교엘 나갔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1학기 시험이 끝났다. 건강때문만이 아닌, 전통 없는 대학도 적성에 어긋난 과선택도 도무지 수긍할 수가 없고 싫었다. 신애는 건강을 회복하여 내년에 원하는 대학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다.

운명인 걸까. 아버지의 사망 후, 일 년이 되도록 집에 박혀 독서에만 열중하고 있을 때, B대학 교육과를 낙방한 성아의 권유로 두더지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신생대학의 무시험입학은, 결국은 금희를 만나기 위한 그녀 생의 한 페이지였음을.

셋이 점심을 먹고 ‘쎄시봉’으로 갔다. 이신중 씨는 차를 마시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신중 씨는 이혼한 사람이야. 그를 좋아해, 신뢰하고, 그뿐, 사랑이니 뭐니 그런 거 아냐. 울적할 때, 정설리의 추악한 이면에 구역질을 느낄 때, 그의 탈춤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낀 모든 더께가 말끔히 씻겨서야, 극도의 열중과 추구, 일탈을 그는 온몸으로 표현하는 거야. 서러운 밑바닥 인생의 슬픔을, 항거를, 그는 이조시대의 남사당이 되어 서러운 춤을 추는 거야, 춤으로 생의 애달픔을 표출해 내는 거야.

차분한 금희의 음성엔 울적함이 녹아있는 듯 했다.

으응, 남사당---? ‘참, 고리타분도 하시네---’

신애는 눈을 흘기듯 반문하고 차를 한 모금 찔끔 마셨다.

남사당은 이조시대의 집시야. 예능자들의 집단인데, 징이랑 장구, 날라리를 불고 춤을 추지. 각기 풍물(농악) 버나(사발 돌리기) 삼판(땅재주) 줄타기 덧뵈기(가면극) 꼭두각시놀음(인형극)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거야.

으응, 이조시대의 집시---? ‘어, 퍽이나 자유로운 인생이네---’

울고 웃으며 남사당이라 쓴 황색깃발을 앞세우고 끝없이 민중 속을 누비며 유랑하는 인생들. 집도 가족도 없는 그들의 인생은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로 아침이슬 저녁안개에 젖으며 비바람 눈보라 속을 떠도는 거야.

으응, 퍽 자연친화적인 삶---? ‘술 마시고 싶은 애달픈 생이네---’

양반이란 권력층의 천시를 받으며 상놈 중에도 최하의 상놈과 부단히 영합하면서. 몸짓과 꽹과리, 징, 장구 소리로 교감하며 밟으면 밟을수록 살아 오르는 잡초처럼 몸부림쳐 온 남사당의 춤을 추는 거야.

으응, 애환이 서린 밑바닥 인생의 춤---? ‘서럽고 멋진 춤이네---’

이신중 씨는 남사당의 후예야 하더니. 말허리를 꺾고 금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는 방방곡곡 덧뵈기(가면극)의 탈춤꾼인 아버질 찾아 나섰으나 허탕이었대. 그 후 그는 미친 사람이 되어 가정을 깨고 훌훌 남사당 연구와 탈춤에 몰입하게 된 거라고 실죽 웃었어. 미워할 수 없는 가여운 사람이야!

금희는 말을 끝내었고, 신애는 침묵을 깨물고 있었다. 신애는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었다.

혓바늘이 돋아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우유를 한 컵 마시고 누워 있으려니까 불쑥 의사에게 금지 당한 커피가 먹고 싶었다. 홍의 커리커처를 받지 못한 날, 공허를 안고 동화백화점에 가서 산 전기주전자의 스위치를 눌렀다.

물 끓기를 기다리며 신애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바람 없이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의 마력에 끌리듯 신애는 차츰 마음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선반을 바라보았다. 스푼, 나이프, 포크들, 에스프레소 커피 잔이며 유리위스키 잔, 남색 꽃그림의 작은 접시와 장미 한 송이를 꽂았던 목이 긴 작은 꽃병들, 소꿉장난 같은 유리재떨이와 수도 없는 티스푼과 앙증맞은 접시, 찻집과 바의 귀여운 성냥갑들, 진땀나는 어색함을 숨겼던 사냥물들의 작은 향연을. 치륵치륵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어 놓고 비를 바라보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신애는 반항하며 먹는 커피 향에 취한다.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로 아침이슬 저녁안개에 젖으며 비바람 눈보라 속을 마냥 떠돈다고---?’

‘밑바닥 삶의 설움을 몸짓과 소리로 표출하며 유랑하는 뿌리 없는 인생이라고---?’

신애는 돌풍같이 이신중 씨를 찾아갈 맘이 일었다.

그의 연구실 겸 숙소가 P통신사 꼭대기 층이라고 한 금희의 말을 상기하고 신애는 빗속으로 나섰다. 가슴으로 스며드는 외로운 기분을 우산을 받고 거리로 나왔을 때, 금희가 2시경에 온다고 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2시라면, 지금은 아직 11시인 것을.

둥둥 둥둥둥 둥둥 둥둥둥……

장구소리에 맞춰 광목 홑바지 저고리에 가면을 쓴 세 사람이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장구를 치는 사람도 같은 옷차림으로 가면만이 달랐다. 그들은 또 모두 맨발에 흰 실내화 같은 걸 신고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장구 잡이도 목 뒤로 줄줄이 땀이 흘러내리고 신들린 무당인 양 몰아의 경지들이었다. 묘하게도 가면의 표정이 고갯짓에 따라 생동하고 어깻짓에 따라 변하였다.

춤은 춤이되 발레와는 판이하게 다른 몸짓의 표출과 가면의 표정에 풍부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갑자기 신애의 가슴이 콱 막히었다.

처음 보는 도깨비 같은 춤에 넋을 빼앗기고 불타는 황홀함을 느끼고 마침내 그녀는 두려움마저를 느끼었다.

황급히 그 곳으로부터 나온 신애가 골목을 돌아서는 순간, 어떤 사람과 맞부닥뜨리고 말았다.
아차! 미안합니다.

사과를 한 건 저편이었다. 곤색의 코트에 둥글고 높은 모자를 쓴 공군이었다. 그가 우산 속에서 빙글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애는 우산대를 꽉 잡고 걷기 시작했다.

실은 서울 길이 낯섭니다. 만나려던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뒤따라오며 공군이 그런 호소를 하였다.

어디서 왔는데요?
신애가 물었다.

사천을 아십니까?
공군은 딴 소리를 하였다.

사천은 중국 아녜요?
공군이 웃었다.

실상 신애는 사천이 어디든 별 관심이 들 리 없었다.

친구를 만날 때까지 함께 있어 주겠습니까.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진지한 눈빛이었다. 신애는 시장기가 들어 눈앞이 핑 돈다. 항상 배가 고프고 꿈꾸듯 두통과 현기증을 앓는 그녀가 말했다.

혹시, 배고프지 않으세요? 신애의 의외의 말에 공군은 밝은 얼굴이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