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은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끝내 신애는 이름 같은 걸 알 필요가 뭐냐고 고개를 저었다.

내일 동화백화점 음악실에서 약속했었죠?
취소. 지금 왔잖아요.

이름을 알자고, 공군은 단념을 못 한다.

아까 식당에서 말했는데요. 림. 수풀 림(林)이라고.

그가 피식 웃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서오빠---?‘ 아주 먼 시간이 지났다.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시간의 두께라고, 신애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서는 그날 엄마와 은애를 찾으러 가기는 했었을까, 바로 하루 전에 갔다 온 평택으로 그는 왜 다시 가보겠다고 한 것일까---? 모르겠다. 그후, 한마디의 연락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절망이, 그의 희망이, 그를 아주 망가뜨린 걸까---? 어디에고 생존해 있기만 하다면, 대학생이 되었을 그를 신애는 만나고 싶다. 순간, 깊고 간절한 마음이었다.

신애는 사념한다.

나는 저 남자의 무얼 아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보는 남자에게로 자석처럼 홀려서 이끌려온 것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 시간, 온 몸을 친친 감고 놓아주지 않는 허무감은 우울을 넘어 상상외로 큰 상처로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 정녕 알 수 없다.

이신중 씨의 마침내 자기의 존재마저를 내버린 것 같은 탈춤과 공군의 고문자국은 절대적인 그 무엇, 칼로 도려낸 것 같은 정강이뼈에, 목숨을 태우며 불로 지져진 손바닥과 발바닥의 참혹한 자국에, 그녀는 치달리는 몰아의 엑스터시에 사로잡혔던 걸까---?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낯선 유리창에 어려 있다. 어둠이 스러져 가는 젖빛 공기에 섞여 아릿한 공기가 후각에 끼쳐 왔다. 적을 의식한 곤충인양 신애는 신경의 촉각을 세우고 민첩하게 그 곳을 빠져나왔다.

비가 멎은 새벽하늘은 우윳빛 안개에 싸여 숙면을 한 그녀의 머리를 말끔히 씻겨주었다. 우유배달부가 자전거의 종소리를 울리며 힘차게 달리고 있고, 신문배달 소년의 기운찬 달음박질이 있는 새벽 거리를 신애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새벽녘에 잠들어 정오경에 일어나곤 하는 그녀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걸어보는 박하향 같은 새벽길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이던 시절의 여름방학 때. 신애는 다람쥐나 토끼와 같은 작은 산짐승처럼 새벽에 일어나 하얀 여름체조복을 입고, 머리에 푸른 띠를 두르고 새벽체조를 하러 학교로 가곤 했었다.

말갛게 텅 빈 새벽하늘은 항상 그녀를 안듯이 감싸주었고 오솔길 옆에 무성한 수풀의 이슬이 그녀의 어린 종아리에 두드러기를 돋아내곤 하였었다. 두드러기를 막기 위해 장화를 신고 흰 운동화를 한 손에 든 신애가 아카시 나무로 담을 두른 일본인 교장 집에 이르면, 그 집엔 가즈오가 살고 있었다.

둘은 청결하고 어린 우정의 손을 잡고 학교를 향해 새벽길을 급히 걸어가곤 하였었다. 꽃을 지우고 더욱 그 잎새가 짙고 무성해진 아카시나무엔 아침 이슬에 날개를 적신 고추잠자리들이 점점이 달려 있었다. 붉은 꽃 이파리를 좍 뿌린 것처럼. 그 빨간 잠자리의 시절은 그녀의 유년의 일기 중에 영영 지울 수 없는 한 컷이리라.

신애의 발걸음은 이신중 씨의 탈춤 연구소로 향하고 있었다. 고개 숙이고 창틀에 놓인 화분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신중 씨의 모습은 오랫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애를 발견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떴다.

자주 놀라게 하는군요.

담담한 음성이었다.

사보텐이 꽃을 피웠군요.

신애는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았다.

피기 시작하자마자 활짝 피어오르는 꽃. 피고 24시간이면 서서히 지고 마는 열정적인 꽃이죠,
애달픔을 간직한 사랑처럼 말입니다.

신애는 아무 말 않고 듣고 있었다.

이 꽃은 지켜주지 않으면 어느새 져버리고 마는 시샘 많은 꽃입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꽃처럼. 하지만 이 꽃은 이미 시들기 시작했죠.

신애는 돌아섰다. 시들기 시작한 이중인격자!

그녀는 비구름이 걷힌 아기의 얼굴처럼 해맑은 도심의 아침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신애가 밤을 비운 방에 금희는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책상 앞의 센닌바리를 마주한 채.

잠을 잔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애를 똑바로 쳐다보는 금희의 눈빛은 분노를 띄고 있었다.

저, 너의 아버지의 붉은 센닌바리의 수처럼 나도 혈서라도 쓰고 싶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혈서를.

금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토록 절실하면 써야지, 말로만 말고. 더는 못 배기겠어. 사람을 미워한다는 게 너무 싫어. 끔직해.

그건 악이야. 정설리보다 내가 더 역겨워.

신애는 모르지 않는다.

금희가 우울한 회색 눈빛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혈서라도 쓰고 싶다는 몸부림은 생을 향한 절규라는 것을.

신애는 센닌바리를 응시하였다. 엄마의 센닌바리를 목에 두르고 지옥 같은 전장에서 귀환하신 아버지는---,

홀로 고단한 밤잠을 드려 일곱 개의 무운장구를 수놓은 순박한 엄마는---, 천둥벌거숭이 죄 모르는 어린 동생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가---?

오직 신애는 외롭고 허망하여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때때로 왜 시간 맞춰 한 움큼의 약을 먹고 식욕 없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이미 의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있는 신애는 혼돈감에 빠지곤 한다. 이토록 병약하여 괴롭고 의욕 없이도 생은 지탱해야 하는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인지,

이 우주에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우주과학자의 학구열을 토해내던 일서는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은애야, 남자애같이 씩씩한 너는---?

침잠한 분위기를 깨고 금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이신중 씨는 연구생들과 강원도 지방으로 답사여행을 떠난대.

그 사람, 탈춤 추는 영감쟁이나 찾아다니면 무슨 수가 있다니? 미안하지만 돈도 명예도 못 얻는 그 도깨비춤꾼이 난 싫어. 솔직성 결핍인 이중인격자가 난 딱 싫거든.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필요 이상 어조에 감정을 노출한 신애에게 금희는 눈을 곱게 흘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