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제29장 강박증 치료와 욕구결핍의 문제

강박증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강박증상 유발 원인이 심리적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근본적 문제란 대개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욕구라는 점에 초점을 모아야 한다. 강박증만 아니라 모든 정신장애는 이런 욕구결핍에서 출발하는 점에 착안하려는 것이다. 이는 강박증을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인간이 욕구에 결핍됐을 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정신장애일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한 이유다. 실제로 상담치료는 이런 인간의 깊은 이해에 기초하여 치료한다는 점이 중요시된다.

1. 강박증을 유발하는 욕구의 문제

인간은 욕구의 존재이다.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고 그 충족을 위해 무엇이든지 다 하려 하는 점에서다. 이런 시각에서 강박증은 욕구의 결핍을 채우려다 증상이 유발된 현상이다. 그들이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낙담하여 증상이 유발됐다면, 그런 욕구가 무엇인가에 의문점이 남는다. 욕구결핍이 심하여 이제는 자신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강박증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이런 점은 인간이 욕구의 존재라는 점에서 이해된다. 인간이 아침에 일어나 무엇인가를 찾고 움직이는 행동들은 욕구를 위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병리적 증상이 되는 욕구 결핍

욕구의 문제는 본능적인 것으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게 만드는 무의식이란 대개 역동성이라는 점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지나치게 되면, 다시 말하면 욕구에 심각한 결핍이 생기면, 그것은 병리적인 차원으로 이행되어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당사자는 거기에 압도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이 바로 병리적인 현상이요, 그것이 지나치면 강박증상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옳다면 강박증의 증상은 그런 역동성 안에서 병리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의 병리적인 차원이란 충족을 원하는 욕구에 실패하여 병리적인 증상으로까지 이행되었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강박증은 심리학적으로 욕구를 채우려는 현상의 하나에서 출발했다. 그들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현상은 그들의 욕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현상은 무엇엔가 그들의 욕구가 빈 곳을 채우려는 동경에서 실패하여 이제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모습으로 달래려는 행동으로 발전해버린 양상이다. 여기에 욕구의 빈 곳이란 일종의 심리적 결핍, 애정의 결핍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욕구의 결핍을 해소하고,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리라 기대되는 충족을 하려는 것이다.

2) 욕구와 인정의 문제

강박증 환자들의 욕구 문제는 인정받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그들이 존재의 인정을 받으면 내면이 긍정화되어 여유롭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런 경우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현상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요, 그 부족함을 채우려는 수단이 된다. 여기에는 강박증이 심각한 애정결핍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상담치료에서 강박증은 유달리 아내의 인정과 사랑을 기대한다. 이들에게 결여된 인정과 사랑이 그들이 생각한 만큼 충족되지 않으면 더욱 인정받으려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내가 인정하고 사랑하는 경우 인정받으려는 현상은 행동이 줄어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내의 인정과 사랑이 그들의 술의 양을 줄이게 만드는 힘이 된다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인정과 사랑의 결핍이 더욱 강박증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인정과 사랑의 욕구는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단순한 하나의 독립적인 힘, 그 자체가 목표지향적인 행동이 되어 그들을 채워주는 물질적인 재화를 향한 힘만은 아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충족을 원하는 욕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측면이 다시 그들에게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하여 생활을 흐트러뜨리고 삶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들이 알아야 하고 알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내면 세력은 그들이 다른 것들과 함께 쾌락의 기억들과 과거 속에서 망각되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기억들, 그리고 과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좌절 때문에 욕구가 저절로 생기고, 변환되고, 변질된다는 것으로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욕구의 파악과 분석

욕구의 원리는 간단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잔인한 법칙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은 욕구에 더욱 이끌리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무의식에서 약동하는 욕구를 잘 분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상담치료에서 분석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 욕구에 압도되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치료자는 내면에서 약동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세력의 욕구를 잘 분석하여 이해시키고 거기에 순응하는 법칙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면서도 남의 탓만 일삼는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가 바로 그런 무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점을 인식시키면 그들의 행동이 점차 누그러지거나 순화되는 등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2. 강박증에서 욕구와 결핍의 상관성

강박증은 욕구의 결핍이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했다. 이런 이해는 그들을 가장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바탕이 된다. 그러면 그들이 결핍을 느끼는 욕구란 무엇일까? 이런 점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거나 해석될 수 있지만 일단은 원초적인 욕구를 생각해야 한다.

1) 어린 시절의 욕구의 결핍

강박증 환자의 욕구와 관련된 결핍 문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욕구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성장하던 어린 시절 마땅히 충족되어야할 특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충족을 원하는 특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욕구는 그에 상응하는 충족의 문제와 관련된다. 욕구란 특성상 충족을 원하는 것이지만 이런 현상은 결핍을 전제로 하는 점에서다. 그러니까 강박증이란 일정한 조건에서 결핍을 원하기에 일어난 증상이다. 다만 그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자신도 원하지 않는 증상에 빠지고 만 것이 강박증으로 이행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욕구와 결핍이 상관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결핍을 부르고, 그 결핍은 다시 욕구를 부추긴다. 이런 시각에서 욕구는 일차적으로 몸에 대한 감각이 우선적으로 경험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경험하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욕구 결핍은 배고픔과 갈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마음보다 몸에서 먼저 느끼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강박증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간과할 수 없는데, 어머니의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강박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2) 원초적 경험의 결여

강박증이 어린 시절 욕구 결핍과 관련이 있다면 양육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아동의 어린 시절은 부모와의 관계에 의존되어 있는 점은 부모의 양육, 특히 어머니의 양육 방법과 더 많이 관련되고 있는 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와 어떤 관계였을까의 문제가 궁금해진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가슴과 그 대체물이 그들을 안심시키고 쾌락을 가져다주는 최초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그들은 적어도 최초 사랑의 대상이라는 어머니와의 접촉을 통해 충족을 원하는 심리적 특성이 충족으로 지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런 충족의 원초적 경험과 결핍 경험은 정신 안에 욕구와 힘의 원천을 새겨넣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경험과 결핍의 경험이 그들에게 지금은 성공에 대한 꿈, 우월적인 환상, 그리고 이를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욕구적인 갈망이 증가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때로 그들에게 현격한 성공을 표상하는 경우 상징적인 언어의 모태가 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욕구의 그 원초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에 구순성(口脣性)이라 이름붙이고 있다. 그러면 그들에게 감각적인 빨기를 특징으로 하는 구순성이 얼마나 충족되었는가의 문제는 다시 구순성을 특징으로 나타나는 시기를 어린 시기라 했을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다분히 정신분석학적 관점이지만,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무의식적으로 충족과 결핍을 발견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어린 시기가 인간의 욕구가 나타나는 최초의 형태로서 이런 현상이 성인에게 나타난다면 유아기로 퇴행했다는 것으로 판단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어린 시기의 이론은 명쾌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어린 시기란 거의 의식하기 어려운 무의식적인 특성에 자리잡은 욕구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정신분석학은 어린 시기 결핍이 성인이 되어 지나치게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거나 높은 도덕적 수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점이 가능하다면 원초적인 어린 시기의 욕구 결핍은 신체 기관과의 관계와 결핍에 의한 것이거나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특성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것이 아닌데, 신체적인 것이 정신으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 외에도 일반 심리학에서도 성장하는 아동기의 신체적인 접촉의 결핍은 정신적인 결핍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인정되고 있다. 성장기에 어머니와 스킨쉽이 결여된 경우 정서적인 안정이 문제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심리적 욕구의 연속성

어린 시절 욕구 결핍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는 특성이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어린 시절 노는 기억과 관계의 경험, 그리고 심리적인 인상 등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점에서다. 실제로 정신의 문제를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 결핍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그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유달리 조직에서 우위를 점유하려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경우의 사람은 때로는 다른 작업의 과정보다도 더 목표적인 특성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이론은 특정한 학파의 견해로 한정할 수도 있지만 매우 정신적인 특성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어린 시절 욕구를 중심으로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거나 일에 착수하는 태도는 정신 안에 하나의 실존적인 도식을 새겨 넣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론은 일상의 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일은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원리를 사람들은 실제 생활에서 실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원리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고, 그 자신을 드러내며, 스스로의 존재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어린 시절의 결핍 욕구는 유치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데, 눈은 어둠과 색깔을 통해서 어떤 것을 보거나 조망하면서 이 세상이나 실존을 구성하고,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조직 안에서 형성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다. 욕구는 색깔을 말하게 하고 빛을 노래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에, 치료에서 강박증의 어린 시절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강박증과 심리적 욕구의 결핍

강박증의 심리적 결핍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그들의 어린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어린 시기 욕구가 결핍된 것에는 오늘의 강박증이 모름지기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대로 어린 시기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어린 시기의 결핍은 성인이 되어 정신의 결핍을 유발하는 특성이 있는 점에서다. 이런 점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어린 시기의 욕구에는 가능성과 위험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1)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어린 시기

성인이 되어 발생하는 정신적인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정 부분 어린 시기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어린 시기 결핍은 그것을 채우려는 충동을 적극적으로 충족하려는 행동을 유발하지만, 그들의 내면에 수동적으로 머무르면서 다른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어린 시기 욕구가 충족되었다면, 자제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거나 조직화하려는 본능을 가짐으로써 소유하려는 충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경우 그들은 가장 좋은 실현의 무대로 놀며 즐기는 능력을 배가 시켰을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그에 관한 고태적인 기억과 언어의 부름이 사랑을 유토피아적인 행복으로 바라게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사랑도 불가능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상담치료에서 욕구 결핍을 경험한 신앙인들을 면담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남편이 외도하는 경우 성도는 유달리 심리적 갈등과 고통에 시달린다.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남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달라지는 점에 중점을 두어 상담을 하지만 때로는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보다 남편이 더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의 그런 행동에 오래 시달려 왔고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런 말을 듣고 있노라면 치료자로서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2) 부모와의 부정적인 관계

강박증 환자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대개는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대개 부모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한 경우라면, 그들에게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부족하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긍정적이지 않는 점이 오늘에 와서 남편에 대한 대응이나 적응을 원만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치료에서 그들의 무의식이 부정적 측면이라는 특성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를 신앙인들과 관련하여 볼 수 있다. 이미 주님을 의지하는 막강한 신앙을 가졌는데, 왜 신앙인들에게 그런 어려움이 따르는가 말이다. 이를 두고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그들의 기도가 약한 것만을 탓하지는 못한다. 이미 신앙을 문제로 삼기 전에 그들의 존재 형성에 문제가 있고, 더욱이 그들이 대개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놀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신앙인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어린 시절 인격 형성에서 문제를 보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어린 시기 욕구의 결핍은 신앙에서도 적용된다. 이들의 어린 시기에 결핍된 문제가 신앙으로 결합된다 해도 그것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욕구가 너무나 빈약하면 합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병리적인 측면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병리적인 욕구 결핍

욕구 결핍이 심하면 병리적이 되고 만다. 이런 점을 중요시하여 생각하면 사람은 누구를 가리거나 구분할 것도 없이 어린 시기 욕구에는 위험성이 있고 특별한 병리를 유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욕구나 갈망이라는 단어는 욕구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평가절하하게 만들고, 내면으로부터는 모든 기쁨을 앗아가 버리는 불안정성을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태의 원인은 한 가지로만 돌릴 수 없기에 더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데 어려움이 있다. 이미 병리적 현상을 정신치료기법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을 논하려면 일단 환상이나 꿈을 알아야 한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의 표상은 그 환상적인 기억들로 개인의 정신을 사로잡으면서 떠나지 않는 만족감을 강박적이고 반복적으로 찾게 만드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그 어떤 만남도 이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기에 신앙적으로 집중하여 열심을 낸다면 하나님은 이런 구순 욕구의 문제에서 일어나는 갈증을 해갈해 줄 수 있고, 특히 절망적으로 찾는 강박증 환자들에게는 자신이 그렇게도 추구하는 대체 가능한 대상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4. 강박증과 애착 결핍

치료자는 강박증에서 어린 시기의 욕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들에게 어린 시기의 욕구는 어머니로 나타나는 최초의 대상에 고착되어 있다. 이 최초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모든 관계 속에서 바라는 관계의 전형적인 특성을 그들의 내면에서 체험하고, 그런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어머니가 이를 그에게 주기에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면서, 내면에 애착 능력을 발달시키고, 애착 속에서 예전에 받았던 생명과 기쁨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확실히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는 애착의 확신은 정신에 안정감을 부여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제공하는 애착이란 대개 안전함, 따뜻한 사랑의 열기, 다른 사람이 그를 맞아줄 때 느끼는 자기애에서 나오는 확증,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맹세로부터 비롯된 살려는 욕구, 다른 사람을 붙잡을 줄 앎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안정감 등 때문이다. 실레로 이런 특성들은 일종의 욕구로 가는 향도(嚮導)로서 애착은 사람들에게 관계를 맺는 능력과 그 관계가 앞으로 만족과 바라던 기쁨을 가져다주리라는 긍정적인 기대를 발달시킨다.

그러나 그런 애착이 그들이 바라던 모성적인 가치와 정반대되는 현실을 경험했을 때, 어린 시절의 그들은 더 참지 못하게 되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애착으로서 욕구는 항상 안전한 것과 피난처를 찾으면서 갈등적인 관계를 무시하고 도피하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애착이 결핍된 강박증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미래를 정복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쓰라린 대가를 치러가면서 사랑의 상실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이런 현상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집착이라는 단어는, 모성적 가치를 다시 취하고 연장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 방어적인 후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강박증 치료에서 신앙적 차원의 권면이 필요한 이유이다. 임상경험에 의하면 신앙적 관점의 증가는 그들에게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신앙이란 본래 ‘관계를 맺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른 많은 의미도 있지만 죄의식을 가진 신경증 환자가 생각하듯 박해자처럼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않는다면, 애착을 가지고 바라는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 실제로 신앙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 애착 연장이라는 방식으로 발달했고, 하나님은 어머니를 연상시키며, 어머니가 약속한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서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애착의 심리학자들이 신앙적 소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의 연령대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애착의 요소를 더 많이 나타내고, 하나님에게 모성적 특성을 더 많이 부여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다.

이런 관점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앙적인 사람들과 대시킬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존에 기반을 둔 인간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통해 그들의 욕구를 달래려고 애쓰는 측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아버지의 기능에 본질적으로 주어진 특성과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에게 부여한 속성이 애착의 관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심판자, 규범, 율법 아니면 여성이라는 요청 등이 해당한다. 이런 경우 하나님에게 있는 아버지의 기능이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기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갈등을 야기하는 원천이 된다. 그래서 신앙적인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유난히 하나님에게 있는 그 차원을 지워 버리고 안심을 주고 위안을 주는 의미를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은 또 다른 관점을 가능하게 만든다. 죄의식에 반발하는 태도는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기표를 없애버리려는 이유로 설명되는 것이다. 실로 어린 시기의 욕구 결핍이 신앙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강박증의 애착 결핍은 오늘의 문제를 유발시켰고 그것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특성임에 분명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고는 그들에게 진정한 치료자로 다가간다거나 치료하여 변화시킨다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강박증을 깊이 이해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강박증과 모성 결핍

강박증은 모성 결핍을 점검해야 한다. 그들에게 모성적인 결핍이 없다면 오늘의 강박증 환자로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C. G. Jung)은 심리적 장애는 모성애의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이라 했다. 모성애의 그리움이란 이미 모성적인 결핍을 보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성 결핍은 강박증에 아마도 첫번째 요인일 수 있다. 상담치료에서 강박증은 모두가 배우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거나 알아주지 않는 점이 문제가 되지만, 특별히 가까운 배우자나 자녀들이 그러는 태도에 답답하여 스스로 고민하고 문제의 증상을 만들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들이 모성 결핍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성장기에 충분한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결혼하여 그런 욕구를 충족하려 하지만 실패하여 강박증으로 빠지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어린 시절에서 어머니와 애착의 실패를 일단 들 수 있다. 어린 시기 애착 과정이란 대개 애착의 양태에 따라 욕구 안에 위험의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정신병리적 맥락에서 보면 어떻게 내포되어 있는지 깨닫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애착 실패는 이제 성인이 되어 사람들 간의 관계를 소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사람이 신앙에 정진하는 경우에는 사람들 사이를 화합시키고 적대적인 것들을 화해시키려는 욕구에 더욱 사로잡힐 수 있다. 특별한 것에 남다르게 심취하는 경우 사람들은 이런 애착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강박증의 모성 결핍은 애착 욕구와 결부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애착 욕구는 삶의 필요성과 그에 이어지는 좌절을 만나면서 쉽사리 불신으로 가득 찬 요구와 우울의 태도로 바뀔 수 있다. 만약 이런 심리상태를 가진 사람이 신앙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신앙을 너무 인간의 욕구를 달래주려는 것으로만 기대하기 때문에, 기독교 메시지의 또다른 본질적인 부분, 이를테면 하나님의 부성 측면의 예언자적 영감을 소홀히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진리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건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감이나 우위성을 점유하려는 인간적인 특성이 맹위를 떨치는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보다는 자신의 자아실현이 중심이 되는 신앙인들이 있음을 상정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애착 실패로 인한 모성적인 결핍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점은 신앙에서도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러니까 애착에서 비롯된 욕구가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의 현실과 신앙 메시지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견디지도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애착 관점에서 신앙적 요구를 연계하여 이해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애착의 실패, 모성애의 결핍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신앙이 더 피부에 와 닿기를 바란다. 이런 현상은 분명 감각적인 것을 더욱 요구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아직도, 아니 심지어 신앙까지도 감각적 특성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은 한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신앙을 통해 왜소하게 되는 사람은 아직 지나친 병리현상이 아니지만 그 속에 우울한 상태로 미끄러지거나 편집증적인 상태로 나아가려는 싹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기는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데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 즉 신앙에 실패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모성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개인적인 애착과 정신적 애착을 더 많이 가지게 하는 요인이다. 그런 애착은 사랑의 에너지인 긍정성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애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바라게 만드는 욕구인 정신적 욕구가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적 욕구는 어린 시기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모성과의 분리로 인한 고통이나 갑작스러운 결핍으로 인한 고난 때문에 다시 활성화되곤 한다. 이는 강박증으로 고통당하는 강박증 환자들에게도 그대로 통하는 원리가 되는 점에서 치료자들에게 그들을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6. 강박증의 특성과 애정 결핍

강박증의 특성은 결핍이라고 했다. 이런 결핍은 물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심리적 측면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강박증은 현상적으로는 어떤 집착에 빠진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애정의 결핍, 즉 사랑의 결핍에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정 결핍이라는 점에서는 사랑의 에너지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사랑의 에너지란 알고 보면 다른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심리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고, 요구하고 응답하는 관계 속에서 발달하는 즐거움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에는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주체의 상호적인 관계의 전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랑의 최초이며 원초적인 형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욕구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욕구이다. 사람들이 신(神)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또 그것은 신적인 사랑을 주체적으로 하고, 또는 대상으로 받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신적인 사랑을 하는 것을 듣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욕구와 사랑이 승화라는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 욕구를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최초의 능력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욕구적 사랑의 에너지가 승화되면, 사랑의 본질적인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신체적 기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가 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승화라는 형태를 따라 ‘희생적 사랑’이라는 거저 주는 선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흔히 욕구와 사랑 사이의 대립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긴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에 사랑의 대립되는 죄의식은 욕구를 알아보지 못할 때 생긴다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이 세상에 사랑받으려는 욕구가 아니고, 서로의 선물을 교환하면서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확장시키고 강화시키려는 욕구가 아니면서 동시에 사랑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에로스와 아가페를 나누고, 욕구로서의 사랑과 희생적인 적인 사랑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대립이 무의미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특성의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정신적인 사랑은 인간적인 존재로서의 본래적인 특성을 발휘하는 이른바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에 말을 걸면서, 사람들을 파괴시키지 않고 변화시키기 위하여 정신적인 에너지가 흘러드는 표상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것의 원천이고, 주체가 동일시하는 모든 형상은 언제나 신체적 욕구를 나타내는 상징의 후원자로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정신적 욕구의 양태에 대해서 알려 주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게 하며, 욕구의 표상을 결정한다는 점에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형상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심적인 사실이라면, 그 욕구가 육체적인 것을 형성하고 변화시킨 인간적 형성에 더 물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신적 욕구와 사랑, 그리고 인간의 욕구와 사랑 사이에는 아주 단순한 유비관계밖에 없고, 인간의 욕구가 서로의 관계 안에 전이(轉移)되고 확충된 것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했듯이, 이 세상에는 하나의 사랑밖에 없기에 정신적 욕구를 에로틱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욕구 자체에 본래 내장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발달시켜야 하는 것이 단 하나의 사랑이라면, 욕구의 신체화라는 말은 병리의 시점을 판정하려고 할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모하는 모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애정의 결핍이 강박증을 불러왔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잘못하면 상당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지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강박증의 특성이 진정으로 애정의 결핍이라는 점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실로 충족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가 강박증을 부르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강박증을 욕구의 결핍, 애정의 결핍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7. 결론: 인간에게는 마땅히 채워야 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잔(盞)’이 있다

지금까지 강박증 환자의 욕구의 문제를 다루었다. 상담치료에서 강박증의 치료를 위해서 욕구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그런 욕구는 대개 어린 시절의 모성적인 애착의 실패로 인하여 채워지지 않은 것이 불만감으로 작용한다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비단 어린 시절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는 사랑의 에너지인 심리적인 특성과도 상당 부분 관련되는 것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런 욕구는 다시 모성결핍, 그리고 현재에는 애정결핍이라는 점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기술하는데 때로는 정신과 신체의 관점에 비교되기도 했는데, 이는 욕구의 결핍이 있을 때에는 정신도 잘못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이렇게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욕구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욕구란 그 범위가 너무나 넓고 다양하여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치료자가 인간 본능이나 욕구에 대해서 탁월한 식견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만 인간은 욕구의 존재이고, 그 욕구는 오늘의 강박증을 초래하고야 말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상담에서 치료자가 그들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면 치료는 요원할지 모른다.

인간의 욕구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특성이 있다. 어린 시기의 욕구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 인간이 욕구의 존재인 이상, 그 욕구는 인간의 존재의 가치감을 충족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강박증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욕구는 그 특성상 충족을 원하고 그것이 정상적이지 못할 때는 일정한 형태의 강박증을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커서 그것을 충족하려는 욕구가 작용한다. 이런 특성은 결혼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지 못한 남자는 결혼한 아내에게서 그 충족을 기대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불만이 생겨나서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것의 충족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스킨쉽이 결여된 남자는 특히 아내와의 스킨쉽을 더 추구하고, 어머니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의 경우에는 아내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더 많이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남자의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마땅히 채워야만 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잔(盞)이 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잔을 “욕구의 잔”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욕구의 잔을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임상의 경험을 거듭할수록 그것을 확신해 가고 있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욕구라는 본능에 결핍이 일어나면, 그것은 심각한 병리적인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신체적인 것이든지 심리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신체적인 것이 심리적인 것으로 이행된 것이든지, 심리적인 것이 신체적인 것으로 전이된 것인지만 다를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랑의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은 그 잃어버린 젖가슴을 다시 찾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젖가슴은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남자들이 유달리 여성의 젖가슴에 집착을 보이는 것도 이런 시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남자들은 유방을 여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유방이 작은 여자보다도 큰 여자를 선호하게 된다. 이는 쾌락에서 여성적인 특성을 제외시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여성적인 특성이 제외되면 그것은 쾌락의 중요한 부분이 빠져버린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다시 사랑과 여자가 항상 분리되지 않고 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이해된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 사랑과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강박증은 사랑의 결핍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칼 융(C. G. Jung)이 말한 대로 강박증이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특성은 모성애의 결핍을 의미한다거나 프로이트가 이들은 자기 어머니 가슴에 안긴 갓난아기로 돌아가려는 유아적인 행위로 보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상징인 어머니를 동경한다는 점에서는 일치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전자는 정신적인 측면의 강조를, 후자는 신체적인 측면의 강조를 말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현상과는 달리, 정신적인 것이 신체적이고 또한 신체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이라는 구분이 모호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상징적인 모습은 개인의 기억의 창고에 새겨져 있기에 결핍을 느끼는 존재는 마치 그 속이 텅 비어있거나 움푹 파인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상담치료는 강박증에서 이런 결핍의 문제를 눈여겨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결핍이 내면에서 작용하여 그들을 어떤 강박증상에 끌리도록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강박증을 다루는 경우라면 이런 욕구의 문제를 착안하여 치료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면 많은 점에서 풀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들이 시원하게 뚫리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상담치료에서 그들을 잘 치료할 수 있었던 경우에는 바로 이런 욕구의 문제에 착안하고서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상담치료에서도 강박증은 오로지 정신의 증상만을 중심으로 대하기보다는 인간의 욕구가 결핍된 존재로 이해할 때, 생각지도 않는 좋은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강박증의 치료에서 오로지 증상의 문제로만 보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인간의 심리적인 이해를 가지고 보려는 태도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