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정설리의 사슬에서 풀리고 싶다고 이 악문 금희의 말에 신애는 전기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정신이 확 깨었다. 하지만 신애는 뭐라고 한마디도 묻지 못하고 침대에 눕고 말았다. 신애가 눈을 떴을 때 맞은편 벽에 압핀으로 꽂은 외국 국기가 보였다.

저건, 어떤 나라의 국기야?

신애가 물었다.

희랍.

‘희랍의 국기라니---?’

신애는 아득하다.

너, 희랍이 어디 있는 나란지 알아?

눈이 깊어진 금희는 아름다워 보였다.

신애의 아질아질한 의식으로 책상 앞에 붙여져 있는 아버지의 센닌바리가 떠올랐다. 신애는 생각한다. 금희의 희랍 국기와 아버지의 센닌바리는---?

불꽃같은 그리스 신상의 이미지가 신애의 침묵을 사로잡았다.

고대의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된 석조건물의 돌계단을, 드높은 그 돌 층층대를 작열하는 여름 햇빛에 눈 부셔 눈을 반쯤 감고 걷는 꿈을 난 자주 꾸곤 한다.

금희는 꿈꾸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라와 둥근 주춧돌이며 돌기둥이 웅장한 신전을, 여신들을 모신 신전의 석벽이랑 돌조각을 손으로 쓸어보고 석회질의 아크로폴리스성에 올라 유서 깊은 성벽을 둘러보고 싶었어. 아라와 손잡고 아테네 시가를 굽어보며, 예순일곱 개의 돌계단으로 된 디오니소스 대원형극장의 층계를 맨발로 걸으며 희랍의 비극을 관람하고 싶었어. 그리고 아라와 독한 키스를 하고 싶었어.

알코올에 떠서 금희는 연극배우처럼 긴 세리프를 읊었다.

아라…라고 했니?

몽롱한 신애가 물었다.

아라는 내가 첫 키스를 한 남자야. 석고상 같은 희랍 남자야.

금희는 꿈 꾸는 목소리였고, 순간적으로 신애는 술 때문에 금희의 상상력이 끝 모를 비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설핏 스쳤다.

멀고 먼 나라의 ’희랍 청년이 금희에게 첫 키스를---?’

너무 로맨틱하고 너무 비약이 심한 상상이라고 여겨졌다.

꿈는 아니라고 실화라고, 금희는 술기 가신 동그란 눈으로 말했다.

고아원 근처의 넓은 들판에 외국군 부대가 이동해 왔다.

희랍낙하산부대였다. 바다빛깔의 눈을 가진 아라는 아테네대학의 고고학과 학생이었다고 금희는 속삭이듯 말했다.

희랍군인 몇이 고아원에 위문품을 들고 방문을 했었어. 50대의 원장은 영어에 벙어리이므로 금호가 떠듬거리는 영어로 통역을 하고 나는 차를 대접하는 역할을 했던 거야.

전쟁에 회생당한 고아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품은 아라는 나에게도 동정어린 관심을 나타내었던 거야. 데이트는 고아원에서 이루어졌고, 수상스레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치는 찬송가의 풍금소리는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아라로하여금 나에 대한 관심의 농도를 더해가는 매개체가 되어주었었지.

황홀한 러브스토리네---? 지금도 연락하고 있어?

신애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금희는 달콤한 어조로 낮게 속삭였다.

죽었어, 아라는.

신애는 확 술기가 가시었다.

죽다니, 왜, 왜---?

전선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숨차게 달려온 아라는 금희를 끌어당겨 포옹을 하고 짙은 키스를 하였다. 금희는 놀라고 당황하였지만, 아라는 이전의 그답지 않게 취한 사람처럼 약속의 말을 비장하게 하였다.

Hee, 나는 내일 전투에서 죽을 수도 있다. 살아 돌아온다면, 제일 먼저 너에게 달려올 것이다!

Hee, 전쟁 끝나면 그리스에 가서 함께 공부하자는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

놀랍게도 아라는 어디서 용기를 얻었는지,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뜨겁게 토해내었다.

신애는 입술이 타서 마른 침을 삼켰다.

살아가다 보노라면 그렇게 환상적인 일도 오는 가. 극히 드문 일이겠지만.

아라의 낙하산 부대는 철원○○고지 탈환작전에 실패하여 많은 병사가 전사하였다. 

신비한 돌처럼 아름다웠던 희랍 병사들은 그토록 한국 전쟁의 동부전선의 하늘로 불티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미열과 알코올로 신애는 와락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고, 금희는 입을 앙다문 채 죽은 아라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독한 얼굴로 독한 술을 겁 없이 마구 마셨다.

금희에게 이끌려 대학병원에서 찍은 엑스레이는 신애의 폐에 침윤된 자국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왼쪽 폐에 밤톨만한 공동(空洞)이 생겨 있었다. 신애는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몸에 이상한 조짐을 의식해왔었다. 식욕이 없고 매일 오르내리는 신열이 바로 그 점을 뒷받침해 주었었다.

신애는 병원에서 엄격한 생활수칙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지킬 수 없는 지시였으나 병 때문에 금희의 친절과 보살핌을 받게 되어 내심 좋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먹기 싫은 약과 주사를 맞는 고통에 보상을 받는 것처럼.

무더운 오후, 금희를 기다리고 있는 신애는 사로잠이 들었다.

처음 방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버지이고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본 적 없는 낯선 남자였다. 순간 신애는 자기 이마에 입맞춤하는 남자의 실루엣을 힐끗 본 것 같은 느낌이 스치었다. 그러나 곧 남자의 실루엣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신애는 눈물을 느끼며 눈을 떴다.

머리맡에 미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시 보아도 현실이었다.

금희는 약을 받으러 병원엘 갔습니다. 신애 양은 열이 대단합니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신애는 단정한 여름양복과 머리에 기름칠을 한 남자라면, 더욱이 아버지의 눈매를 닮은 남자라면 싫었다. 금희는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신애에게 먹이고 바위처럼 앉아 있는 남자를 신애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이 이신중씨야. 내가 말했었던.

그의 눈빛에 흡인력 있는 빛이 흘렀다. 신애는 몸속을 달리는 통증과 같은 느낌에 돌아누우며 발을 오그라트렸다.

이상한 남자였다. 통렬한 감각은 혼미한 의식을 빠르게 침투하였다. 독성 강한 바이러스처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