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귀 기울이며 그녀는 방금 보고 있었던 숏 컷한 커리커츄어를 노트 갈피에 끼웠다. 오늘을 산 것 같은 기분이 슬며시 마음을 채웠다.

금희가 신애 머리 달라졌네 하자, 어머 쟤 좀 봐, 오늘 컷 했니? 상큼하고 예쁘다, 하고 성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찐 얼굴이라 난 안 어울리겠지? 착한 성아는 살짝 눈을 흘긴다. 성아의 굽실굽실 숱 많은 파머머리를 보며 신애는 쿡 웃음이 날 뻔했다. 한 푼어치의 빈말 안 보태어 신애가 머리를 자른 건 모양을 낸다거나 멋 부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오드리 헵번의 머리모양을 영화에서 보았을 때, ‘아 저 배우의 머리는 간단해서 참 편하겠다’ 는 생각이 퍼뜩 들었었다. 잡초처럼 내버려두어 목 뒤에 묶고 다니던 머리보다는 저렇게 짧은 머리라면 시원하고 편리할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머리 모양새나 옷 입음새에 신경 쓸 맘이 아직 신애에겐 없다. 사치한 차림에 도통 흥미가 일지 않았다. 매시간 기쁘고 슬플 것 없는 삶에 그건 번거롭고 전혀 무의미한 일이므로. 금희는 항상 머리를 가운데 가루마를 타고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귀를 덮어 빗고, 목 뒤 한가운데에 핀을 꽂는다. 그녀가 한 번도 귀가 보이는 머리모양을 한 것을 신애는 본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까 금희의 우울한 빛이 담긴 눈빛과 양귀를 덮은 머리모양새의 이미지가 어딘지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

기적이었다.

고향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의 금희를 대학에서 만난 건, 정녕 기적이 아닐 수 없으리라. 물론 잠들었다가 다시 의식이 깨어나 눈을 뜨는 매일 아침이 기적일 테제만, 이건 정말로 소소한 일상에서는 맞게 되기 어려운 대단한 기적일 밖에 없으리라.

계부 밑에서 밥을 굶고 앓아 누었던 불쌍한 금희를, 송충이를 잡으러 간 날 소나무를 피해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엄마가 금희 것까지 싸준 주먹밥을 먹을 때, 느닷없이 경성에 가서 남의집살이를 해서라도 무용학교에 다니겠다고 부르르 울먹이던 금희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은.

여자중학교에 가기 위해 S로 이사한 후에도 신애는 금희의 소식을 궁금해 했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사촌인 진자에게 물어도 6. 25 전쟁 이후 금희 남매를 본 사람이 없다는 대답뿐이었었다. 금희의 존재를 잊은 즈음, 금희를 만나게 된 것은 정녕 미지의 운명을 품은 기적이랄 밖에. 해후에 취한 날. 금희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실타래를 풀듯 차근차근 입을 열었다. 주정뱅이 계부가 매질하다 성폭행까지 하려던 바람에 성큼 자란 금호가 그동안 빚을 갚듯 계부를 흠씬 패주고 남매는 가출을 했다.

무작정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고 걸었다. 마침내 거지꼴이 돼 주린 배를 부등키고 서울역사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불행중 다행이었을까. 장맛비가 쏟아지는 어스름 저녁 무렵 순찰을 돌던 나이 든 순경 도움으로 용산 부근 한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그들 남매는 고아원의 쓸모 있는 일군이 되었고 참으로 다행인 것은 숙식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살 위인 금호는 금희와 같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중고교를 다니며 금희는 피아노를 익혔다. 소질이 있어 중2 때부터 찬송가반주를 하던 금희는 전국고교 피아노 콩쿨에서 2등의 영예를 안고 그 행운으로 신생 C예술대학의 장학생 입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인생의 아이러니인가. 무용가의 꿈을 꾼 금희는 피아노과를 택하고 신문기자의 포부를 품은 신애는 일시적이라 해도 무용과를 택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생 C예술대학엔 성악 피아노 무용과의 세 학과뿐이었다. 사재로 2년제의 예술대학을 설립한 학장이 메조소프라노의 성악가 정설리였다.

금희의 아직 어린 피아노엔 뜨거운 아픔과 고뇌가 번뜩였다. 온몸으로 표출하고저 하는 춤의 열망과 에너지가 금희의 피아노에 내열하고 있음을 신애는 감지하였다.

신애는 들뜨듯이 열이 올랐다.

내 방에 가서 쉬자. 신애야, 너 집에 늦게 가도 괜찮지?

금희는 상기도 신애를 학교에서 만나게 된 감격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권유하였다. 어쩌면 평생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금희를 만나지 않았는가.

하얀 토끼풀꽃의 팔찌와 붉은 할미꽃의 화관 위로 가즈오와의 유년 시절이 신애의 영상 속으로 클로즈업되어 왔다. 신애는 금희와 멀고 긴 이야기를 하고 싶고 혼자 맞는 해질녘의 시간이 오스스 싫기도 했다. 어두운 표정이던 금희는 불현듯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원피스를 벗었다.

이 집이 누구 집인지 너 알아?

금희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원피스를 벗은 금희는 브래지어를 떼어내었다. 그렇게 반라의 몸으로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금희는 침대 위에서 가지색 타월지의 가운을 맨 몸 위에 입으며 말을 이었다.

넌 나를 몰라. 국민학교 때의 내가 아니야. 아주 변했어. 아주 달라졌어.

한참 동안이나 금희는 완강히 수긍의 대답을 강요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애를 응시하였다.

너만은 신뢰할 수 있어.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
------?
고향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노상 죽고 싶었던 내가 네 우정과 도움을 입어서가 아냐, 알겠니?
------?

너, 지독한 괴짜라지? 넌 폐병 앓는 아버지와 한 방에 살았지. 엄마와 동생들이 한꺼번에 폭사하고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끌려간 사촌오빠하구 넌 연앨 한 거지?

‘그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신애는 오한이 나고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은 현기증에 휩싸였다. 금희는 목화솜 같은 흰 구름이 백조의 깃털처럼 가닥가닥 흩어질 때까지 눈 부릅뜨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금희는 쇼팽을 전축에 걸었다.

엄마 없는 무식하고 난폭한 의붓아버지 밑에서 배를 곯으며 폭력에 시달리며 자란 어린 시절, 나는 활짝 웃은 적이 없어. 지금은 또 이 집에서의 호의호식이 견딜 수가 없어 웃을 수가 없는 거야. 넌 몰라. 모를 거야. 뭘 알겠니, 너처럼 순수한 괴짜가?

신애는 한 모금쯤 남았던 사이다컵을 들었다.

나도 잘 웃을 수 없어. 그런데 너 틀렸어. 내가 사촌오빠를 단념하지 못하는 건, 그의 꿈이 너무 커서 가여운 거야. 영민하고 우수한 그는 우주과학자가 되고 싶은 꿈을 품고 있었어. 난 그의 꿈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어. 그가 죽었다고 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너무 아까워. 그의 도전정신과 우수한 두뇌와 불굴의 용기가.

알아알아 하고 금희가 속삭이듯이 말한다.

술이 있어. 위스키가.

어지러운 신애는 독한 술을 사양하지 않았다. 금희의 아픈 술에 비해 신애의 그것은 보다 음울하고 고독한 맛이었다. 미열 때문에 신애는 울음이 나왔다. 열이 오른 신애는 앓고 있는 어린 짐승과 같이 몸을 떨며 굵은 눈물을 마구 떨어트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