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불규칙한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음식과 약을 시간 맞춰 먹고 제대로 잠을 자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녀는 그런 규칙동사와 같은 생활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는 잘 먹지 않았고 잘 자지 못하였다. 제때에 먹고 자고 깨어야 한다는 의사의 지시를 동의할 수도 실행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지갑에 화폐가 있는 한 그녀는 시장기를 좀 더 즐겨도 좋으리라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엄마와 동생 넷과 소란스럽게 살던 S의 부촌에 크고 우아한 한옥과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색색가지로 깃털아름다운 철새처럼 향기 짙은 꽃을 피우는 사과와 복숭아 과수원과 은행에 아버지의 예금 잔고가 있는 한, 그녀는 생활에 구애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았다. 살고 있는 동안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무심하게 살아가도 좋으리란 생각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이 싫은 그녀의 경제관념은 마냥 그런 식이었다.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선뜻선뜻한 오한과 미열이 동시에 엄습해 왔다. 날이 너무 더웠다. 편두통이 그 낯익은 둔중한 압력으로 왼쪽 머리를 압박해 왔다. 현기증이 일어 눈앞에 아지랑이의 난무를 헤치며 신애는 고려정으로 갔다. 갑자기 목 뒤가 가렵듯, 갑자기 김치가 먹고 싶었던 것이다.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 들지 못하고 밥 먹고 나올 때 신애는 손수건에 도라지나물 접시를 싸 가지고 있었다. 시큼한 냄새가 나서 대학노트 한 장을 떼어내어 거기에 보잘것없는 싸구려 나물접시를 싸고 손수건으로 또 쌌다. 대신 남이 먹은 수저로 먹기 싫어 가지고 간 자기의 스테인리스 스푼을 빈 밥공기 옆에 놓고 나왔다.

처음 그녀가 서울에 올라와 태극당에서 혼자 샐러드 빵을 먹으며 오그라들 것 같은 어색함을 눙치느라 신경을 소모하고 나올 때였다. 진땀을 흘리며 포크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었다. 그것이, 식당에서의 최초의 절도였다. 그 후로 소공동의 동명그릴 8층에서 내려올 때 그녀의 오버 주머니에는 나이프니 스푼, 앙증맞은 유리 재떨이 같은 게 들어있게 되었다.

담배를 피울 줄 알기는커녕 민감하고 약한 기관지로 담배연기를 못 맡는 그녀는 시청부근의 이학과 명동의 고려정이고 신정 같은 곳에서 혼자 밥 먹고 나올 때면 거의 매번 보잘 것 없는 컵이나 재떨이를 숨겨 갖고 나오곤 했다. 그렇게 불안은폐용으로 절도를 한 수확물을 그녀는 책상 위 벽에 선반을 치고 가지런히 진열해놓고 있었다.

책도 싫고 음악도 싫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때 신애의 유일한 벗은 오밀조밀한 그 선반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돈의 가치와는 전혀 무관한 각양각색의 그 포획물들은 참으로 개성 있는 색채와 냄새와 그것이 존재했었던 장소와 그것에 담겼던 내용물의 뉘앙스로 여러 기억을 상기시키고 여러 말을 속살거려준다. 고독한 그녀에게 은밀한 비밀을 사냥꾼이 박제된 포획물을 바라보고 새록새록 특이한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미소 짓는 것과 흡사한 기분인 걸까.

동화음악실을 향해 신애는 가고 있다.

거리는 생동감이 넘치는데 간간이 옥의 티처럼 목발을 끌며 상점마다 기웃대며 동정을 구걸하는 상이군인들의 서글픈 모습이 끼어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의 후유증에서 이탈한 전후의 젊은 세대들은 경쾌하고 발랄하였다.

충무로의 그늘진 왼편 길을 따라 걸을 때 레코드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날카로운 돌기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현악곡을 특히 좋아하시던 아버지.

그 자리에 신애는 멈춰서 버리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고조되어 태풍에 몸부림치는 나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었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한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아랫길로 뒷자리에 어린 신애를 태운 자전거를 허위허위 끌며 아버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골동품점이며 시계방을 지나고 멈춰 서서 아버지는 보석상의 쇼윈도를 들여다보신다. 손수건으로 맑은 이마와 목 뒤의 땀을 닦은 아버지가 고개를 뒤로 꼬고 어린 딸을 바라보았다.

신애야! 저 돌들이 참 곱지?

아버지는 덧니가 보이는 미소를 짓고 말하였다.

아버지, 저것들은 돌 아니에요. 보석이에요.

똑똑하게 신애는 말하였다.

보석은 돌이란다. 아주 깊은 산속에서 캐낸 돌이란다. 신애야, 저 반지빛깔이 제일 곱지 않냐?
아버지가 미소를 담고 손가락질한 푸른빛의 반지가 까만 비로드 갑 속에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에메랄드라는 보석이다. 너도 크면 안다. 보석이 어째서 아름다운지를. 아버지가 꼭 한 여자에게 저 반지를 사준 적이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일본에서 대학생일 때.

고작 국민학교 1학년인 신애는 큰 비밀을 캐는 흥분에 쌓여 ‘엄마한테가 아니고요?’ 하고 물었더랬다.

그렇단다.

아버지는 그 말뿐으로 손수건으로 천천히 맑은 이마를 닦으셨다.

그 날 이후, 신애는 아버지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품게 되었었다. 대신 엄마에게는 비밀을 지키느라고 서먹한 감정을 품게 되고 맘속으로 짙게 아버지를 사랑하였다.

엄마가 돌이질을 치는 아버지의 뭔가 특이하고 남다른 성격까지를, 물처럼 조용히 독서를 하시는 아버지가 ‘그 애 좀 울지 않게 할 수 없소!’ 하고 큰 소리로 엄마를 힐책하는 고함소리까지도, 실상 신애도 아버지처럼 시끄러운 동생들이 귀찮고 귀 따갑게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몹시 싫었으므로.

피곤한 신애는 동화 음악실의 늘 앉는 소철나무 옆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차탁 위에 놓인 커리커춰를 보고서야 신애는 자기 머리 모양새가 짧아졌다는 생각이 났다. 왼손으로 뒷머리를 쓸어보고 매끈한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방금 차 나르는 소녀가 놓고 간 스케치의 ‘Hong’이란 사인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어저께까지 자신의 프로필은 긴 머리채였던 걸 상기하며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났다.

스케치를 보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홍이란 성 이외 이름은 무엇이고, 미술대생이면 어느 대학인지도 알지 못한다. 수개월 째 거의 매일같이 그는 스케치한 그림을 주고, 그곳을 나올 때 신애는 조심스럽게 대학노트 갈피에 그걸 넣고 나올 따름이었다. 이 작은 의식(儀式)은 웃음기 없는 그녀 일상에 몰래 미소 짓게 하는 한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눈 감고 있는 신애는 등 뒤에서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성아와 금희였다.

성아의 검고 밝은 얼굴과 금희의 우울한 빛의 흰 얼굴을 오늘따라 신애는 신기하여 이윽히 바라보았다.

학교 안 갔니?

은근한 어조로 성아가 물었다. 신애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