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어촌 알렉산드리아에 활기를 불어넣은 사람은 무하마드 알리 태수다. 알리 태수가 재위 기간 중 1820년 나일강과 알렉산드리아를 연결하는 마흐무디야 수로를 개통시킴으로써,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질 좋은 수출항으로 재부상한다.

무하마드 알리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재건축 작업과 상공업 부양 정책이 활발히 전개되어 도시는 활기를 되찾았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이 큰 훼손을 당한다. 재건축 과정에서 얼마 남지 않은 고대 그리스 로마 유적들을 부수고 그 위에 새 건물을 지었고, 옛 유적 등에 있던 돌들을 재건축에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파괴는 실로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얼마 남지 않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도시라기보다는 유럽의 휴양지같다. 하얀 모래 해변의 해안도로를 따라 안쪽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최초 번역한 곳이다. 번역된 성경을 70역이라고 한다. 성경을 번역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그리스계 프톨레미우스 1세의 의해 설립된 도서관이다. 톨레미 왕조는 설립 초부터 이 도서관을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 전당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투자를 하였다. 톨레미 1세는 아테네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학원과 플라톤 학파의 학원을 능가하는 시설을 갖추려고 한다. 국제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세계의 석학과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 쉬웠고, 이 도서관은 학술과 배움의 전당으로 급속도로 성장한다. 뒤를 이은 통치자들도 그 뜻을 이어받아 도서관 서고에 더 많은 예술, 과학, 문학 작품과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당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도서를 구입하여 배치하였다. 한동안 최고의 도서관으로 알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 도서관의 책을 통째로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집이 전부 정당한 방법으로만 행해진 것은 아니다. 톨레미 3세는 정박해 있던 배에서 온갖 책을 압수한 다음 복사본을 만들어 원본 대신 돌려주었고, 그래서 그가 수집하여 소장된 것들에는 ‘선박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붙었을 정도다. 강제와 속임수, 한없는 정성이 큰 성과를 거두어, 설립된지 60년 만에 이 도서관은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지적 센터가 되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식과 학술을 연구, 육성시키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크리스찬해피투어

세계 최대의 도서관 역활을 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개화에 중요한 기반이 되어 주었으며, 클레오파트라 치세 때에는 무려 70만권 가량의 두루마리 책을 보유한다. 이 장서량은 그로부터 1500년 후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유럽 전체가 보유하고 있던 도서의 무려 10배에 달하는 것이다. 로마의 안토니우스가 소아시아의 부유한 도시 버가모에 있던 20만권의 두루마리 책을 몰수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사하는 바람에, 도서관은 더욱 절대적이고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됐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실제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전해오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를 성지순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곳 일정을 보면 폼페이 기둥을 순례하는 것으로 하고 있는데 폼페이 기둥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을 위해 건립된 것이다. 이 기둥은 알렉산드리아에 기근일 발생했을 때 식량을 보내준 황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기둥의 이름 폼페이우스는 기둥과 상관이 없는데 왜 폼페이 기둥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폼페이우스는 유명한 로마 장군이다. 로마 제국의 삼두정치 시절에 카이사르에게 대항해 싸우다가 그리스 전투에 패한 후 이집트로 도주해 왔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프톨레미우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 때이다.

이집트 정부는 카이사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도피해 온 폼페이우스를 사로잡아 목을 벤 후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폼페이우스의 목을 받은 카이사르는 그것을 항아리에 넣어 알렉산드리아 성 밖에 묻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유골 항아리가 바로 이 기둥 꼭대기에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이 기둥은 ‘폼페이우스 기둥’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14세기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이 기둥을 보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 경이감을 일으키는 놀라운 것들 중 하나”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높이 약 25m, 두께 약 2m의 거대하고 붉은 빛이 도는 이 돌기둥은 900km 남쪽에 위치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시에는 같은 크기의 기둥이 400개나 서 있었다고 하는데, 나머지 399개의 돌기둥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 기둥 옆에 포톨레미 왕조가 황소 신 아피스를 숭배하려고 건설한 신전 세라피움과 신전에 부속된 도서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세라피움 신전과 도서관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세 개의 화강암 스핑크스만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카타콤베라고 하면 로마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카타콤베는 여러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지하 무덤을 말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도 콤 엘 슈카파 지하 무덤이 있다. 콤 엘슈카파 지하 무덤은 수직으로 바위를 뚫고 약 30m 정도 지하로 들어가는 양식이다. 내부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풍의 예술로 장식되어 있으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이 쉴 방도 있다. 고대 신화의 장면이나 벽화를 간직하고 있어서 고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삶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곳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이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고 죽은 후에는 무덤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지하 무덤을 아랍어로는 ‘콤 엘슈카파’라고 한다. 무덤은 3층 아파트식인데 약 300구의 시신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고, 무덤 안에 있는 벽화나 조각등에 십자가 모양이 있으며, 미로가 많은 것은 신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했고, 박해를 가하는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달아나려면 미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내부에 서서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보면 그 빛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곳인데 가는 팀들이 별로 없다.

김용규 목사
령천 교회 중동 선교사
크리스찬 해피투어 성지플레너
성지 가이드 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