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는 얼굴에 팥알 같은 두드러기가 나서 자기 방에 누워 ‘학원’을 읽고 있었다. 어저께 S언니의 생일 초대에 가서 싫다는 말을 못하고 닭고기를 먹은 게 탈이 난 거였다.

점심에 먹은 두드러기 약 때문에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았다. 갑자기 후다닥 뛰어 들어온 사내동생이 부르는 소리에 신애는 눈을 떴다.

큰누나, 학교 뒷산에 명자하구 은애 누나가 쓰러져있어. 미군들이 때리고 도망갔어. 빨리빨리 가봐!

‘뭐야? 은애와 명자가? 미군들---?’

신애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쳤다. 명자와 미군이란 말에 신애는 얼굴에 빨갛게 돋은 두드러기도 잊고 학교 뒷산으로 내달렸다. 운동장에서 놀던 조무래기들이 불구경난 듯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왔다.

낙엽이 쌓인 산 중턱에 여자애 둘이 쓰러져 있었다. 그 애들은 실신해 있었고 하체가 벗겨져 있었다. 은애의 하체에서 피를 본 신애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측백나무 상수리나무의 낙엽더미에서 자행된 비극을 역설하듯 비스킷이며 통조림 깡통과 초콜릿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동생을 와락 끌어안고 은애의 이름을 부르짖는 신애의 눈에 눈물과 분노가 솟았다. 신애의 절규가 푸르스레한 저녁 산등성이 너머로 메아리쳐갔다. 흔들어도 은애는 늘어진 채 눈을 뜨지 못하였다. 무엇을 향한 울분인지도 모를 분노를 깨문 채 신애는 가눌 수 없을 만치 몸이 부들거려 떨고 있었다.

아주 잠깐 실눈을 떴다가 은애의 눈은 다시 스르르 감기었다. 마구 흔들어도 여전히 바이엘 옆에 쓰러져있는 은애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만치 쓰러져 있던 명자가 푸시시 일어났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신애를 알아본 명자는 비칠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목도하자 신애는 울분과 비애가 덮쳐와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저녁 이내가 내려온 숲은 어스름하고 물속처럼 교교하였다. 잠꼬대하는 아이처럼 은애가 몸을 뒤채었다. 은애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고 흔들던 신애는 마침내 악물었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악을악을 쓰며 토하는 신애의 울음소리는 북쪽 하늘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먼 포성 소리에 아득히 묻혀가고 있었다.

*

비정한 시간은 멈춤 없이 흐르고, 해가 바뀐 정월.

폭설이 쏟아지고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밤이면 휘파람을 쌕쌕 불면서 쿵쿵쿵 지축을 울리며 행진해가는 중공군들의 군화발소리에 어른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지난여름보다 쌕쌔기가 더 자주 출동하고 폭격을 더 가하였다. 동네사람들은 한집 두집 보퉁이들을 싸지고 피난을 떠났다. 남부여대하여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남행길은 발 딛을 틈이 없다고 한다.

신애네 집은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해서 근심에 싸여있었다. 환자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끌고 집 떠날 생각은 엄두를 내지 못할 처지였다. 그렇다고 자다가도 퍼붓는 포탄에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처럼 날아가는 판인데, 마냥 죽치고 있을 수만도 없는 전황이었다.

신애는 자기가 집에 남아 아버지의 수발을 들겠다고 의연히 말하였다. 어서 떠나야한다고 엄마에게 피난길을 종용하였다. 아버지도 씩씩한 일서가 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이모가 사는 온양까지라도 어서 난리를 피하라고, 재촉을 하셨다.

신애 엄마, 신애말대로 해요. 오늘 밤에 준비를 해서 내일아침 일찍 떠나도록 해요!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을 거요.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언제까지 갈지, 그리 쉬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아요.

내내 뭐라고도 대꾸가 없던 엄마는 저녁 설거지를 하고는 안방 윗목에서 다림질을 시작했다. 발갛게 핀 숯다리미로 아버지의 여름 양복상의를 다리고 나서 신애의 교복치마의 맞주름을 다리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입을 옷들이 아니었다.

이 난리통에 아버지의 여름옷과 신애의 교복치마주름 같은 걸 다리다니, 당장 필요한 일은 내일 떠날 피난 짐을 싸는 게 시급한 일이거늘.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며 옆에서 막내 동생을 업어주고 있던 신애가 누린내를 맡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 타요. 타. 내 교복이 타요!

숯불다리미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엄마의 손은 치마 단에서 멈춰있고 다림질감에서는 낸 내가 났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랫목에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시고 건넌방에서 일서가 뛰어 들어왔다. 가장 놀란 사람은 깊은 생각에 젖어 고개 숙이고 있던 엄마였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말아요. 하늘에 맞기고 나는 신애와 잘 있을 테니까 너무 염려 말아요. 일서가 있으니까 아이 둘은 큰 짐과 함께 리어카에 태우고, 은애는 자기 짐쯤은 지고 갈 수 질 수 있을 거요. 당신은 그냥 막내를 업고 부지런히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는 알겠다고 고개 짓 대답을 하고는 장롱을 열고 이불보를 꺼내었다. 엄마는 짐 싸는 일에 네가 도울 일은 없으니, 어서 가서 자라고 한사코 신애에게 손사래를 쳤다.

신애는 자기 방으로 왔으나 착잡하여 눕지 못하고 세운 무릎에 고개를 묻고 옹크리고 있었다. 잠버릇이 험한 은애가 잠꼬대를 하며 이불을 차내서 잘 덮어주는데, 엄마가 들어왔다.
느이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엄마는 빨리 자지 않고, 왜요?
이거 너 주려고.

엄마가 말했다.

이담에 대학생이 되면 주려고 했는데, 이걸 보니까 지금 주고 싶은 생각이 나서, 엄마 반닫이 깊숙이 감춰뒀던 거다.

엄마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이게 뭔데요, 엄마?

신애의 눈이 더 커졌다.

잘 뒀다가 써라. 아버지가 귀국하실 때 일본에서 사다주신 걸, 너 주려고 아꼈던 거니까.

------?

엄마는 불 끄고 어서 자라고, 거친 두 손으로 신애의 연한 손을 잡고 있다가 나갔다. 은밀한 물건의 내용이 궁금해서 신애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주었다는 선물을 풀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분홍색 꽃 포장지에서 나온 것은 노란 곽 뚜껑에 분홍색 벚꽃무늬가 예쁜 파우더였다. 뚜껑을 열은 곽에 엷은 세로판지가 덮여 있는데도 향기 짙은 분 냄새가 풍겼다.

둥글고 큰 눈과 키가 큰 서양여자 같은 엄마의 모습과 예술적인 아버지의 섬세한 이미지가 떠올라 신애는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일서와 엄마가 네 동생을 거느리고 두렵고 추운 피난길을 나섰다. 사나운 북풍이 몰아치는 한겨울 추위를 틈타 추위에 강한 중공군들이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건너온 거라고 아버지는 긴 기침을 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