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구름이 수놓인 하늘은 잔잔한 이미지의 수채화처럼 맑고 고요하였다. 세상을 두 쪽 낼 듯이 우박처럼 폭탄을 퍼붓던 제트기가 더는 날지 않았다. 인민군이 밀려간 후 동네 공터엔 여기 저기 UN군부대가 자리 잡고 캠프를 쳤다. 신애네 집과 가까운 학교 운동장과 공장 마당에도 미군부대와 필리핀부대의 캠프가 설치되었다. 폭격으로 부서지고 깨진 거리에는 흔들거리는 양키들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해 떨어지기 전에도 동네 부녀자들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한낮에도 길에 나서는 걸 극구 꺼렸다. 일본에 주둔했다 온 미군들은 마마상, 마마상, 하고 쪽찐 부녀자들에게 끌어안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희번덕거리기 때문이었다. 젊은 처녀들을 보면 쌕시 쌕시(색시 색시)하며 달아나는 여자들을 붙잡으려는 시늉을 하며 희롱들을 일삼았다.

덩치 큰 흑인과 백인들보다 체수가 작고 가무잡잡한 필리핀 군인들은 좀 덜 무서울 뿐이지 여자들을 놀리기로는 매한가지였다. 겁 많은 신애는 어린 사내동생이 ‘누나. 양키야, 양키!‘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간이 콩알만 해져서 다람쥐처럼 잽싸게 뒤란의 지하실로 숨곤 하였다.

어느새 계절은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하늘은 사뭇 높고 푸르렀다. 하지만 아직도 먼 포성소리는 끊이질 않고 학교는 여전히 휴교 중이었다. 저녁때가 되어도 은애가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시기 전에 신애가 찾으러 나갔으나 은애는 골목 어디에도 없었다. 문 밖에 쪼그리고 앉아 허옇게 뜬 눈으로 쳐다보는 사팔뜨기 명자 동생이 말했다.

언니들 미군 부대에 갔어.
‘또 미군부대엘---?‘

아직 미군들이 나올 시간은 아니므로 신애는 마음 놓고 동네 염색공장 마당에 진을 친 미군부대 앞으로 가보았다. 부대 정문엔 징그러운 흑인병사가 왕방울 눈을 껌벅거리며 보초를 서 있고, 정문 오른편으로 가자 높다란 철조망이 쳐져 있고 아무도 없었다.

정문 왼쪽으로는 어른들 속에 섞여 조무래기들이 참새 떼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삐죽삐죽 가시처럼 촘촘하게 삐쳐 나온 높다란 철망은 마름모꼴로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짠 그물망처럼 보였다.

어른들은 토막영어와 손짓으로 미군들과 양주병과 양담배랑 달러를 주고받고, ‘찹찹 기부 미’ ‘초콜릿 기부 미’를 즐거운 동요처럼 부르는 철없는 아이들 소리가 석양빛 속으로 잦아들었다.

자존심이 무언지 모르는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 속에 얼굴이 해맑고 키가 머쓱한 은애와 땅딸막한 명자가 섞여 있는 걸 신애는 발견하였다.

화가 난 신애는 손에 껌과 초콜릿 몇 개를 든 은애의 등짝을 와락 잡아채어 끌어내었다. 몸을 뻗대며 양키가 초콜릿을 더 줄 건데 언니 땜에 망했다고, 위험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은애는 마구 심술을 부려대었다. 고작 두 살 터울인데 어떻게 은애는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엄마가 자주 푸념을 할 정도였다.

며칠 후에 은애는 샐샐거리며 레이션박스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 속은 요술나라처럼 생전 처음 보는 먹을 것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초콜릿과 바둑껌이며 비스킷과 달콤한 딸기잼이며 소고기 통조림은 얼마나 맛있는지, 지금껏 먹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은애는 엄마에게 종아리에 핏줄기가 죽죽 맺히도록 싸리 회초리로 맞았다. 매를 맞고 난 은애는 왕구슬 같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진짜 명자가 준 건데 억울하다고, 대굴대굴 땅바닥을 구르고 몸부림을 쳐대었다.

부슬부슬 초가을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런 저녁 무렵이었다.

외할머니 댁에 갔던 엄마가 모처럼 고추장 양념한 돼지불고기를 석쇠에 구웠다. 집안 가득 입맛 당기는 냄새를 풍기며 엄마는 잰 손으로 저녁상을 준비하였다. 먹성 좋은 은애가 보이질 않았다.

급히 신애는 아버지가 아시기 전에 밖으로 찾아나갔다. 은애가 동내사내애들과 딱지치기나 유리구슬치기를 하곤 하는 골목은 텅 비어있었다. 명자도 옥희도 집에 없었다.

신애는 부슬비 속을 막 뛰어서 부대 쪽으로 가보았다. 비가 오기 때문인지 부대 주위엔 ‘찹찹 기부 미’ ‘초콜릿 기부 미’ 를 주절대는 아이들도, 술병이며 양담배 보루를 건네받거나 달러를 주고받으며 눈짓 손짓을 섞어 반토막영어로 지껄이는 달러장사들도 없었다.

앳된 백인 보초가 신애에게 휘파람을 휙휙 쌕쌕 날리었다. 눈을 내리깔고 신애는 캠프의 정문을 돌아 왼쪽으로 가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가보아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문득 부대 뒤편에서 무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곳엔 싸리나무가 우거져 있고 점차 빗줄기가 굵어졌다. 막 캠프의 모퉁이를 돈 신애는 눈이 커진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두 명의 미군 앞에서 은애와 명자가 윗도리를 걷어 올리고 가슴팍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애들은 철망을 사이에 두고 서서 막 여물기 시작한 복숭아씨만 한 가슴을 보여주고 있고 킬킬거리며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 몇 개를 받아들었다.

숨죽인 채 숨어 서있는 신애는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처럼 마구 와들와들 몸이 떨렸다. 현기증이 나고 왱왱 소리가 울리는 신애의 귓가로 또렷한 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션 기브 미, 레이션 기브 미!

그러자 백인군인이 옷을 아래로 내리라는 시늉을 하였다.

신애가 은애야! 악을 쓰는 순간, 흑인병사가 말처럼 드러내놓은 성기를 마구 흔들어대었다. 레이션 상자를 든 백인병사가 다시 옷을 아래로 내리라는 시늉을 하자, 재미있다는 듯 명자와 은애가 사루마다(팬티)를 아래로 내려 보였다. 천둥벌거숭이 두 계집아이는 부끄러움도 겁도 없이, 천도복숭아 같은 속살을 보여 주고는 두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신애는 뻗대는 동생을 죄인 끌고 오듯 오기는 했어도 도저히 엄마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몸피가 자기보다 실한 은애를 뒤란으로 끌고 가서 신애는 주먹으로 등짝을 패주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엄마처럼 수수비자루를 거꾸로 들고 악에 받혀 정신없이 패주었다.

언니면 다야, 뭔데 때려. 아프단 말야. 왜 때려, 왜 때리냐고?

나중엔 아픔도 잊었는지, 신애를 치지는 못하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엄마 대신 은애를 패주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건 신애였다.

주애언니는 네 살 더 먹었어도 한 번도 때린 적 없단 말야. 그런데 뭐야? 겨우 두 살 더 먹었는데, 왜 때려? 네가 엄마야?

죽은 언니 이름까지 들먹이며 은애는 울부짖었다. 은애의 몸부림치는 항거는 뒷집의 옥희가 뒤란의 사철나무 울타리를 타고 내다볼 정도였다.

옷을 헤치고 몸을 보여주고 먹을 걸 받는 건, 몸을 파는 창녀나 하는 짓이란 걸, 너 몰라서 그래?
뭐가 창녀야? 우린 철조망밖에 있고, 양키는 그 안쪽에 있는데, 그냥 재밌잖아? 맛있는 것도 생기구!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아이. 자존감이 무언지 모르는 딱한 여중 1년생이었다. 전쟁의 비정한 독성은, 굶주린 어른들을 이성과 양심을 잃은 도둑이 되어 마구잡이로 남의 집 담을 넘게 하고, 첫눈 같은 사춘기 소녀들의 부끄러움을 상실케 하였다. 허약한 신애는 둔중한 편두통을 앓았고 잠이 부족한 눈에는 수수알갱이 같은 눈 다래끼가 매달려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라디오를 들으시는 아버지는 머잖아 서울이 수복될 것 같다고, 고진의아저씨 이야기를 꺼내셨다. 부장으로 승진했다고 이사한 이 집에도 한 번 다녀가신 아저씨의 결혼문제를 아버지는 엄마와 논하셨다. 친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밴 아름다운 대화였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