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야, 아버지한테 이르지 마라. 그 사람들 안 무서워. 우리 복숭아가 아주 맛있다고 좋아했단 말이야, 응?
너, 또 거길 가겠다는 거야?

신애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야 아냐 안 가. 언니야, 진짜 아버지한테는 이르지 마라. 마당에서 벌 서는 거, 창피하단 말이야. 응?

넌 흠씬 당해야 해. 도무지 엄마 아버지의 속을 상하게 하는 바보잖아?

이때다 싶어 신애는 영어 단어 10개 꾀부리지 말고 써 놓고 외우라고 엄포를 놓았다. 오이꽁지 문 입이 되어 갓 여중생인 은애는 스르르 뒤란으로 스며들어갔다.

다행히 제트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역전께로부터 계속해서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신애네 집 쪽 하늘로 밀려오고 있었다. 지금, 은애가 던져준 우리 과수원의 복숭아를 실실거리며 아삭아삭 먹던 앳된 소년병들이 폭격을 맞은 것이리라. 신애는 깊은 숨을 내쉬며 화염이 치솟는 역전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서있었다.

엄마는 돌쟁이 아기를 업고 병약한 아버지를 위해 닭을 구하러 외할머니 댁으로 갔다. 나가지 못하게 엄포를 놓았더니, 동생들은 뒤란에서 시끄럽게 말놀이와 사방치기놀이를 하며 시끌벅적 소란스럽다. 신애가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다급하게 신애의 이름을 부르는 건 일서였다. 포수에게 쫓기는 산짐승처럼 일서는 숨을 헉헉대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신애야, 나 평양 간다.

인민군의 복장을 한 일서는 숨이 차서 말했다. 인민군 둘이 일서를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은 방금 물에서 건진 것처럼 땀범벅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신애에게 일서는 다급하게 토하였다.

시간이 급하다. 지금 북으로 퇴진하는 중이다. 신애, 너 보고 가려고 잠간 들린 거다.

눈자위를 이리저리 굴리는 게 흡사 도망자의 모습이었다.

‘북으로라니---?’

신애의 눈은 한껏 확대되었고, 일서는 쫓기듯 물었다.

외숙모는 어디 가셨니?

외할머니 댁에 가셨다고 하자, 그가 아버지의 서재 쪽으로 한 발을 떼어놓았다.

아냐. 아버지는 동회에 가셨는지 안 계셔.

신애는 재게 찬 우물물을 길어 세 대접의 보리미숫가루를 탔다. 모자를 벗고 대청 끝에 나란히 앉은 그들은 불안한 눈길로 집안을 휘둘러보고는 벌컥벌컥 미숫가루 대접을 단숨에 비워내었다.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 일서가 또렷한 눈으로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게 말해 줘. 나, 평양 아버지에게 간다고. 그렇지만 다시 올 거니까, 너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낮 꿈을 꾸는 것 같은 신애는 그냥 응, 하였다.

구일서 동무, 고만 갑세다,

벌떡 일어나 모자를 쓰며 상관인 듯싶은 퉁퉁한 인민군이 명령조로 말했다. 신애야, 잘 있어라. 남조선이 해방되면 곧장 편지도 하고 꼭 다시 올 거니까! 알았지?

유언처럼 그런 말을 한 일서는 두 인민군을 따라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한 토막의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사촌인 일서가 평양으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퇴각해가는 인민군에 합세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의 우수한 두뇌와 처지를 동정하여 전쟁이 끝나면 공부시킬 계획을 하고 계신 아버지까지도.

며칠 전이었다.

문간채 쪽에서 쩌렁쩌렁한 고모의 고함소리가 날아왔다. 책에서 밥 나오거든 너, 먹어라. 오늘 저녁 우리밥솥은 빌 거니까.

기어코 아들을 닦달하여 지게를 지워 시장으로 내몬 고모는 작달막한 키에 건어물 광주리를 이고 장사를 나갔다. 같은 나무에서 열린 사과도 오롱이조롱이지만 고모는 아버지의 친 누님인데 생김새도 성격도 전혀 판이하였다.

전쟁이 났다고 지닌 재산이 어디로 새는 것도 아닌데 양반집 아낙이 건어물 광주리를 이고 나간다고, 할머니와 아버지의 만류에도 고모는 막무가내였다. 체면이 다 뭐 말라비틀어진 거냐고, 격심해지는 전황의 기류를 탄 듯 독 오른 수전노가 되어갔다.

고작 국민학교를 졸업한 열세 살짜리가 보따리장사들 틈에 끼어 목숨 걸고 3.8선을 넘어온 아들에게조차 고모는 돈타령이었다. 온지 삼 년이 넘도록 아들을 학교에 넣을 생각을 안 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모진 모성이었다. 생모와 외가가 있는 남에 와서 공부에 대한 포부를 맘껏 펼치려던 두뇌우수한 일서는 비정한 생모의 학대에 목숨 건 월북을 택한 것이리라.

문창호지에 여린 국화잎을 넣어 서재의 창호지 문을 새로 바르고 계신 아버지에게 점심상을 차려 드리고 신애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깨끗이 씻은 복숭아와 찐 고구마를 동생들에게 나눠주고 절대로 집밖에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요즘은 밤낮 없이 미군 제트기의 폭격이 심해져서 자다가도 길 가다가도 폭격 맞아 쓰러지는 사람, 장터에서 포탄 파편에 팔다리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로 아우성인 세상이었다.

그 날, 신애는 빈 소쿠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방금 전에 남문 아래쪽에서 화염이 치솟았으니까 당장은 이쪽에 폭격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북상하기 시작한 연합군은 퇴진하는 인민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인민군 패잔병이 있음직한 건물에 폭격을 가하였다.

신애는 과수원으로 흠 있는 복숭아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돈으로도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전시이기에 고르고 남은 복숭아는 동생들 간식만이 아닌 식구들의 반 식량이기도 했다. 형무소 너머에 있는 과수원은 멀다.

흡사 화염같이 쏘는 불볕더위에도 거리엔 베잠방이를 걸친 배고픈 노인들이 빈 지게를 지고 걸인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행인들은 작대기를 짚고 다리를 저는 남자들과 한쪽 팔을 긴 헝겊으로 어깨에 묶은 부상자들이거나, 부석부석 부황이 든 아낙네들이 대다수였다. 장터 사람들은 폭격이 있을 때마다 부녀자들은 옥수수 광주리와 고구마 찐 광주리들을 이고 이리저리 처마 밑으로 쫓겨 다녔고, 불구자거나 빈 지게 진 늙수레한 남정네들은 이 건물 저 건물로 폭격을 피해 다녀야 했다. 당장 오늘 저녁 한 끼를 위해 산사람들은 그토록 절박하였고 숨이 가빴다.

작열하는 해가 눈부시어 신애는 일서와 나란히 가로수 그늘 밑으로 걸었다. 항상 신애는 일서에게 뭔가 미안한 느낌이었다. 특히 자기에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생각할수록 신애는 마음이 쓰였다. 신애보다 한 학년 위이어야 할 그가 아직 중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매일 시가지의 건물들이 불타고 눈 깜작할 사이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팔다리가 생선토막처럼 잘려나가는 피의 아수라장인 세상.

얼마 전에만 해도 공산주의도 이념이 무언지도 모르던 하층 남자들이 집집마다 대문을 걷어차며 소리쳐대었었다.

밤마다 비행장과 부서진 다리공사 따위의 부역을 나오라고 뼈 속까지 사무치는 호루라기를 쌕쌕 불며 날쳐대었었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