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 이기창 총회장이 설교를 전하고 있다.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 50주년을 맞이하여 사단법인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이사장 안금남 목사)이 5월 8일 오후 2시 현장에서 감격적인 5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는 예장합동 총회장 이기창 목사, 예장고신 부총회장 박정원 목사, CCC 대표 박성민 목사, 새에덴교회 담임 소강석 목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 소장 인요한 박사, 하버드대학 장성철 교수, 광주광역시교단협의회 임원, 구례군기독교총연합회 임원 등 기독교계 대표들과 성도들 150여명이 참석했다.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는 구한말 개화기인 1895년부터 시작된, 미 남장로교의 선교 역사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던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곤란한 것이 풍토병(말라리아, 학질, 이질 등 수인성 전염병)이었다. 당시 선교사 가운데 67명이 사망한 것에서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에 선교사들이 질병 치료와 휴식, 그리고 재충전을 위하여 1922년에 지리산 노고단에 수양관을 설립했다. 이곳은 한때 50여명이 머물 수 있는 60여동의 건물로, 선교사들에게 적합한 수양 장소가 됐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한글 문법책을 만드는 등의 활동도 병행했다.

그러다가 1935년 신사참배문제로 조선총독부와 선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그 해 ‘풀턴 선언’(Fulton Declaration)을 통해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일제에 의하여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광주 수피아, 숭일, 목포 정명, 영흥, 전주 신흥, 기전학교)가 폐쇄되고, 1940년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당하고, 1941년 미·일 전쟁(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가 이곳을 ‘적산 처리’하여 국가 소유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해방과 6·25 한국 전쟁 이후, 노고단 지역의 선교사 유적지는 대부분 훼파됐다. 이에 순천에서 결핵요양원을 하던 린튼(인 휴) 선교사와 전주에서 성경학교를 하던 하퍼 선교사가 지리산 왕시루봉 일대에 1961년 부터 목조와 토담집 등을 조성하게 된다. 이곳에는 현재 12동의 건물이 선교사들의 숨결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이를 기념하고 후대에 기리기 위하여 현지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날 기념예배는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공동이사장 소강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구례군기독연합회 이양재 목사의 기도, 박준형 목사의 성경봉독, 예장합동 총회장 이기창 목사의 설교와 유진벨 선교사의 후손이며 공동이사장 인요한 박사의 유적지 소개, 예장고신 부총회장 박정원 목사의 축사, CCC 대표 박성민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또 참석자들이 선교유산을 지키고 계승하자는 결의문 낭독도 있었다.

그리고 오정희 상임이사의 인사 및 광고후에 하버스대 장성철 교수(목사)의 축도 순서로 진행됐다. 특히 CCC 전남·광주 지역 학생들이 봉사팀을 구성해 금번 50주년 기념예배의 찬양과 행사진행을 도와, 故 김준곤 목사의 생전 지리산 선교 유적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받들어 신앙의 유산으로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기념예배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큰 공헌을 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헌신과 삶의 교훈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고, 아울러 선교유적지 보존을 위하여 근대 기독교 등록문화재 등재를 위해 노력하는 뜻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지리산 왕시루봉에 기거했던 선교사들의 활동

인돈(CHAR LOTTE BELL LINTON) 선교사는 1912년 한국에 건너온 공학박사로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했고, 한국 독립을 꿈꾼 외국인 선교사였다. 일제 강점기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는데 배후 지도를 하는 등 우리나라 국권회복에 앞장선 공로로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가 되기도 했다.

도성래 선교사(DR. STAN TOPPLE)는 한센병(나병환자) 환자를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선교사로 여수 애양원 원장을 지냈으며,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브라운(BROWN JOHN) 호주 선교사는 1960년 한국에 도착하여 우리나라의 가축개량 가능성과 농촌을 돕기 위해 1966년 호주로부터 많은 수의 대형 흰 돼지와 염소들을 들여와 번식과 분배를 지도했다.

배도선(PETER R M PATTISSON) 선교사는 영국 선교사로 마산에서 중점적으로 결핵 병원을 설립해서 활동하였고 개업의로 병원장으로 선교사로 목회자로 힘껏 사역하였으며, 누가회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며, 영국여왕 봉사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 로마 선교사는 마산에서 경제적으로 불우한 여자들과 소녀들의 자립을 위해 애쓴 인물로, 1969년 서울로 이사하여 다른 선교사들과 합력하여, 팔려오거나 속아서 매춘을 하던 여자들을 재활시키는 「은혜의 집」과 여성 구제 프로그램을 개발 지원한 공로자이다. 한국의 두 어린아이를 자녀로 입양하기도 했다.

인휴(REV. HUGH M LINTON) 선교사는 린튼가의 3대 손으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를 받은 공학박사 인돈 (윌리엄 린튼 ) 선교사의 3남이며 한국 전쟁 당시 해군 장교로 인천 상륙 작전 참전 용사이기도 하다 여름철 발병기에는 왕시루봉 오두막집에서 어린 6남매를 키웠고, 그가 살던 일본의 갓쇼즈쿠리 건축 양식의 오두막집이 건축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다.

로빈슨(R.K ROBISON) 선교사는 의학 박사로 1963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수많은 고아와 청소년들에게 모국의 지원을 받아,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훌륭한 일꾼으로 키워냈고, 특히 한국어를 가르치던 사람이 간질 증세를 보이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 순회 무료진료 실시와 그 당시 귀신들린 병이라 불렀던 간질환자 살리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200여명의 의사들이 네팔, 중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9만 여명의 간질 환자를 돕고 있기도 하다.

하도례(THEODORE HARD) 선교사는 1954년 1월 입국하여 50년이 넘도록 신학 교육과 사회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한 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수급하기 어려운 각종 양서를 공급하여 양서보급에 앞장선 공로자이며, 고신대학교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모요한(JOHN VENABLE MOORE) 선교사는 1955년 내한하여 전주, 제주, 대전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한남대학 설립과 함께 교수로 활동하였고, 그의 부인 MOORE KATHERING BOYER 선교사는 전주예수병원 간호부장으로 활동했다.

1. 지리산 기독교 선교 유적지 위치와 규모

1) 노고단 예배당
- 소재지 :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110-2번지
- 건축물 : 예배당 1동(석축)
- 건축연대 : 1922년, 미국 남장로교

2) 왕시루봉 유적지
-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 산106번지
- 건축물 : 건물 12동
- 건축연도 : 1962년, 인 휴 선교사

2. 문화재적 보존 가치-전문가 진단

남호현 교수(순천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위원)의 평가
-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은 그 마을 구성하고 조성함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이 교섭하여 이룬 생태적 통섭 환경을 이룬, 문화경관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다.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재조명과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관리하여 후세에 전승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적 전통을 지켜 나가는 일이며,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3. 건축과 문화재적 가치

천득염 교수(전남대 건축학부 교수, 전남지역 문화위원)의 평가
- 서양 선교사들의 주거 건축일지라도 한국 전통적 공간 배치와 건축구조를 채용했다.
- 영국의 농촌주택의 건축양식을 도입했다.
- 일본의 농촌 주택의 기술을 도입한 가옥이 있다.
- 노르웨이식 건축 양식을 도입한 가옥이 있다.
- 미국의 북미식 오두막 건축양식인 A-Frame을 도입한 가옥이 있다.
따라서 지리산 선교사 유적은 대단한 건축적,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를 갖는다.

4. 교회사적, 교회연합운동의 가치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 지리산 기독교 유적은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운동의 현장이었다. 지리산 선교 수양관은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설립을 주도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데는 개방이 되어 심지어 해외의 선교사들도 이용했다. 이곳에서는 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고, 휴식을 취하며, 서로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천장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성경번역위원」들이 지리산에 모여 성경개역 작업을 서두른 곳이기도 하다.

5. 앞으로의 과제

이곳은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서 보는 바처럼 역사적, 문화적, 건축학적, 종교적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건축이 완성된 지도 각각(노고단, 왕시루봉) 90여년과 50년이 넘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로써의 가치와 함께 ‘문화재 등록’이란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노고단은 국방부의 소속 땅이고, 왕시루봉은 서울대와 교과부의 소유로 되어 있는데, 문화재 등록을 위해서는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곳을 단순히 기독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국가적, 국민적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여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전경

* 지리산 왕시루봉에 도착하면 동쪽 아래턱에 울창한 숲 속에 집들이 보인다.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백운산과 마주보고 있어 수려한 경관은 비길 데 없이 좋다. 봄엔 철쭉이, 가을엔 그 넓은 초원이 온통 억새밭으로 변한다.

* 원래는 1922년 미국 남장로교가 중심이 되어 노고단에 선교사들의 질병치료와 휴식, 교제를 위해 수양관을 설립했는데, 1940년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총독부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2차 세계대전 말기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 1940년 11월 대부분의 선교사가 강제출국 당하자 일본 경찰당국은 선교사를 비롯한 외부인들의 노고단 출입을 금지시켜 폐쇄했다. 해방 후 1948년 여순사건의 좌익 빨치산 저항 근거지가 됐다가 6·25 이후 국군의 패잔병 토벌작전 시 노고단에 폭격을 가해 크게 훼손됐다. 그래서 1962년 왕시루봉에 교회와 거주용 목조건물 12동을 새롭게 설립하게 됐다.

 
* 유적지에는 현재 12동의 목조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 사단법인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에서 관리하고 있다.


* 전쟁후 지리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노고단 쪽으로 등산로가 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노고단에서 멀지 않고 등산객의 시야로부터 가려진 왕시루봉 일대에 1961년 여름부터 목조와 토담집 다섯 채와 테니스장, 수영장, 천막부지를 조성했다. 1962년 7월 11일 서울대와 남장로회 선교부(대표:린턴과 하퍼)가 임대계약을 맺어 사용해 왔는데, 계약기간이 만료돼 철거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2007년 사단법인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이 초교파적으로 설립되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리산 선교유적지는 한국에 파송되었던 선교사들에 의하여, 구한말 국권을 침탈당하고 아픔을 당한 한국인에게 민족정신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심어 주었으며, 예수님 사랑으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선교사들의 숨결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피하고 영적 재충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노고단) 한글성경 번역과 한글성경공부 교재의 번역이 이루어졌고, 선교전략계획을 수립하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된 역사적인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