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를 힘차게 외치는 격앙된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방송은 계속 일본 천황의 항복소식을 반복하였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신애는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방을 휘둘러보는데, 언덕 아래 가즈오네 집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게 보였다. 웅성웅성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이집 저집에서 동네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만세. 만세!”
“우리 조선이 해방이 되고 독립이 되었다.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만세! 만만세에…….”

동네 사람들은 목청껏 만세를 외치며 도도한 물줄기처럼 언덕 아래로 몰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즈오네 집으로 밀물처럼 쓸려 들어갔다. 동네사람들이 돌풍처럼 몰려가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뒤지는 이시가와는 이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사람 잡아가는 이시가와 놈아, 어디 숨었느냐, 썩 나오너라.”
“샅샅이 뒤져내어 악랄한 그놈을 잡아서 족쳐야 한다.”
“조선 사람 사냥꾼 놈을 어디다 숨겼느냐? 썩 내 놓아라!”
“민심은 천심이다. 이놈들아! 한 백 년 떵떵거릴 줄 알았더냐? 이 악랄한 쪽바리 놈들아!”

어깨를 웅숭그리고 마당에 서 있는 야마무라 교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동네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부어 대었다. 이시가와 놈을 내놓으라고 몰매를 가하려고 덤벼들었다. 어저께까지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그는 신애와 가즈오가 다니는 존경받는 제일국민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갔다. 아들 둘이 징병에 끌려간 노인은 이시가와를 내놓으라고 교장의 멱살을 부여잡고 따귀를 후려갈겼다. 딸을 정신대에 빼앗긴 구멍가게의 사팔눈 아주머니는 분풀이로 게이코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유치원 원장인 귀부인 티 나는 가즈오의 엄마가 눈에 불을 켠 동네 사람들에게 연신 허리 굽혀 절을 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눈 깜작 할 사이 회오리바람처럼, 가즈오네 식구들은 도둑의 일당처럼 쏜살같이 대문 밖으로 도망쳐나갔다.

동네 아낙들은 가즈오네 방과 부엌으로 들어가 마구 살림살이 집기들을 들어내었다. 이미 교장의 까만 제비 자동차는 동네 남정네들이 때려 부숴놓은 후였다. 갑자기 머리가 뻐개질 듯이 아프고 헝클어진 실처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어 신애는 사람들을 헤치며 가즈오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난장판이었다. 책장이 쓰러져 책들은 휴지통을 엎은 것처럼 마구 짓밟혀 있다. 책상 서랍들은 모조리 열려 있고 상장과 교과서며 공책들이 흙발에 짓밟혀 짓이겨져 있다. 처참했다.

가즈오와 둘이 읽던 『소공녀』가 내동댕이쳐진 책들 속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신애는 얼른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소중한 그 무엇인 양 두 손으로 가슴에 보듬고 문득 눈을 감는다.

‘가즈오! …… 아, 너는 일본 아이였지!’

삽시간에 뒤바뀐 세상. 기적처럼 딴 세상이 온 것이었다. 거리마다 감격에 겨운 독립 만세 소리가 메아리치고, 장엄한 대교향곡이 울리고 있는 것 같은 감동의 물결이 온 읍내로 퍼졌다. 신애가 막 골목어귀를 돌아섰을 때였다. 잽싸게 조선 사람의 베잠방이 차림으로 변장한 일본인이 몰매를 맞고 있었다. 처참한 보복과 응징의 광경은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이런 세상이 오리라곤 아무도 생각 못한 엄청난 사태였다. 수십 년 동안, 말과 글을 빼앗기고 조선 농민의 목숨인 토지와 대물림할 장대 같은 아들을 전장에 빼앗기고 옥구슬 같은 어린 딸을 정신대에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피맺힌 설움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었다. 일본에게 나라 잃고 착취당하며 굶주려온 민초들의 원한 맺힌 함성이 강풍을 만난 들불처럼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저 쪽바리 놈을 잡아라.
저기 저, 일본 년을 잡아라.
저것들을 다아 잡아 죽여라. 다아 쳐 죽여라!

신애는 세상이 뒤집힌 무섭고 소름끼치는 급변한 상황에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두렵기까지 하였다. 가던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가즈오와 그의 가족들이 사거리 병원 앞에 결박당해 있는 것을 목도한 것이었다. 사거리 은행 옆에 있는 하얀 이층 건물인 건강병원의 병원장인 작은 아버지 가족과 만나서 함께 도망가던 가즈오네 가족이 분개한 군중에게 잡혀왔던 것이다. 악랄한 짓을 일삼은 인간 사냥꾼 이시가와를 내놓으라고 목이 쉬고 얼굴이 벌겋게 달은 민초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지 않은가.

그들 삼형제 중 가즈오의 아버지와 의사인 작은 아버지에게 그다지 원한이 맺힌 건 아니었다. 징병 담당의 악랄한 이시가와가 원흉이었다. 머리꼭지까지 흥분한 군중은 병원장의 자동차와 살림도구들을 미친 듯 때려 부수었다. 피가 튀는 전장과 다를 바 없는 광포한 광경이었다.

게이코와 그의 엄마를 비롯한 병원장의 부인과 그의 딸들까지 여자들은 실신한 듯 땅에 내던져진 보퉁이처럼 엎어져 있었다. 가즈오는 사촌들과 한 줄에 묶여 따귀를 맞고 앙갚음의 심한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다.

신애가 마음속으로 가즈오의 이름을 부르는데 늙은 조선 남자가 선뜻 나서서 가즈오 아버지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지리를 가르치던 조선인 교사였다. 결박에서 풀려나자 그들은 맹수로부터 도망치듯 목숨 걸고 역전을 향해 달려갔다. 역에는 일본인들을 제물포항까지 실어갈 마지막 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는 걸 신애가 안 건,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