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네 시간 이상 골프장의 잔디를 밟고 걸었다. 운동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카를 타지 않고 전 홀을 거쳤으니까 거리상으로는 8킬로, 20리쯤 되었던것 같다. 지난 늦가을부터 빛이 바래기 시작하여 겨우내 누렇게 말라갔던 잔디가 사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푸르게 변하고 제법 촉감이 부드럽게 느껴질 만큼 키가 자랐던 때문이다.

눈부신 햇살에 페어웨이 근처의 호수 표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꽃나무 숲에는 위잉위잉 소리를 내며 벌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샷에 집중하는 것 보다는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월의 바람에 더 맘을 빼앗겼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내가 친 볼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페어웨이 한가운데 안착 되었다. 그린 에지에서는 영락없이 핀 근처에 올라앉아 기다려주었다.

이 기분 좋은 하루 때문이었을까. 그 밤을 무려 여덟 시간동안 단 한 번도 깨어나지않고 그야말로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커튼 사이로 햇살이 침실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모든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고 시간은 어느 먼곳 여행길에서 맞는 아침 같았다. 남국에 대한 가장 강렬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쿠사무이 군도 한 작은 섬에서의 그 아침을 생각나게 하였다.

이 다정한 시간에 침실 벽에 걸려 있는 친구 화가의 그림 ‘연인들’이 빛을 받아 움직였다. 이 그림은 수년 전 내 영한시집 The Womb of Life(자궁의 그림자, 문학관)를 출간할 당시 친구가 표지그림으로 선물해 준 것이다. 그림 ‘연인들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오브제로 우주 안에서 그들이 교접하고 교합하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남자의 힘 넘치는 근육과 여인의 선의 유연함이 너무나 아름답다. 혈관으로는 피가 흐르는 것 같고 살은 춤을 추는 듯한 생명감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눈에 띄도록 벽면 한가운데 걸어 놓았다. 맑고 깨끗하고 또 빛나고 황홀한 이미지이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내가 아침의 햇살 속에서 열대의 풍정에 일렁이던 가슴을 다시 지닐 수 있는 것이 행복했다. 새롭게 눈뜨는 그리움이 있어서 참으로 기뻤다. 그것은 살아있음, 사랑함에 대한 감사의 맘이었다. 갑자기 내가 지난밤 깊이 잠들었다가 새 아침 눈을 뜰 수 있었다는 사실이 꼭 기적처럼 느껴졌다. 아 그래서 옛날에 다윗은 이렇게 시어를 토해 냈었나보다. “Lie down and sleep. I awake again, because my Lord sustains me(내가 누워자고 깼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라고.

그렇다. 생명, 이 살아있음. 세상에 생명만큼 귀한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명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본질 직관에 의해 느끼고 이해될 뿐이다. 스스로 생성하고 번성하는 그 어떤 힘, 살아있다 함은 바로 생명의 이 확장을 체험하는 일이 아닐까싶다. 삶의 순간을 의미있고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느끼는 이 체험으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스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5-1957)는 죽음이 가까워 인생의 겨울 석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보이는 것, 냄새, 감촉, 맛, 듣는것, 그리고 지성, 나는 이 모든 연장을 거두어들인다. 벌써 밤이 되었고 날이 저물었으니’ 라고. 그는 오감으로 만지고 맛보고 사람과 사물에 맛대어 가슴으로 느끼는 이 작은 일상사가 바로 삶을 삶답게 하는 연장들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베르그송이 그랬던 것처럼 길 한모퉁이에 서서 손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적선하시오. 형제들이여! 한 사람이 나에게 15분씩만 나누어주시오. 아 약간의 시간만을. 아주 약간의 시간만을. 내가 일을 다 마칠 수 있도록.”

참으로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의 그 찰나의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보여준다. 평범한 일생을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매일 아침 존재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열망을 지니고 반복되는 시간들을 원시의 바람 앞에 세울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으로 살아있는 가슴과 위대한 이성을 지니고 통쾌한 인생을 살아냈던 작가였다.

강의가 없었던 나는 거실로 나와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Hilary Hahn의 연주로 들었다. 특히 차분하고 표현적인 아름다움이 충만한 2악장 아다지오를 반복해서 들으며 형언할 수 없는 동경에 사로잡혔다. 나의 내면은 새로운 음정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흘러 넘치는 영감의 원천이 나의 감성을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게 하였다. 삶에 취하여 절로 튀어나오는 탄성이었다.

살아있음 자체에 나의 이성과 감성은 터질듯 황홀한 반응을 보였으니 시간은 아름다운 시가 되었고 맵시나는 춤사위였다.

/송영옥 박사(영문학, 영남신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