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가 풀려 산발이 된 머리 때문에 엄마의 광란은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배에서 상체로 올라온 주먹은 젖무덤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원한의 주문을 외우듯이 이시가와의 이름을 뇌까리며 엄마는 소리 죽여 훌쩍였다. 그렇다. 이시가와 그는 원수이다. 도저히 무엇으로 어떻게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인 것이었다. 아버지가 땅굴에서 발각되어 구금된 그 비 쏟아지는 밤, 비열하고 악랄한 그에게 돈 봉투를 바치고도 유린당한 오욕과 참담한 울분을 양잿물로라도 씻을 수 있겠는가.

엄마는 오래도록 배에 주먹질을 가하였다. 솜씨 있는 아버지가 제재소에서 송판을 사다가 대패질을 하고 못질을 하여 만들고 파란 페인트칠을 한 나무벤치의 등받이에다 계속 배를 쾅쾅 짓찧었다.

불쌍한 엄마….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 처절한 불행에 휘감긴 엄마보다 목숨이 경각에 닿은 더 불쌍한 아버지…. 병든 아버지를 실은 배는 지금 이 지구, 오대양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악몽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털고 마음을 가다듬은 신애는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보고 싶은 아버지! 힘들고 고생스러워서 더 아프신 거 아니세요?

일요일마다 엄마하고 예배당에 가서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어요. 엄마는 잠 없는 밤을 보내며 센닌바리 수를 놓고 계세요. 벌써 두 개나 만들어 아버지 책상 위에 붙여 놓았어요. 세 번째 것도 武運(무운)자까지 수놓았어요.

아버지, 달걀을 먹을 때면 엄마가 글썽한 눈으로 목메어하셔요. 그래서 못 본척하려고 매번 나는 고개를 돌리곤 해요.

오늘 엄마는 복숭아걷이를 하러 과수원에 가셨어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동생들을 다 데리고 가셨어요.

아버지, 보고 싶어요. 언제나 집에 오실는지요? 전쟁은 언제 끝날는지요? 굳센 마음으로 식사를 잘하시고 무엇보다 약을 시간 맞추어 잘 드셔야할 텐데, 엄마는 노상 근심하고 계세요.

그곳에서도 약을 준다고 했지만, 혹시나 약을 받지 못 한다면 큰일이라고 엄마는 잠꼬대하실 정도예요. 저희들은 다 잘 있어요. 막내 예찬이는 요새는 막 걷고 조금씩 뛰기도 해요. 외할머니 댁에 있는 주애 언니도 많이 좋아져서 세끼 밥을 잘 먹는다고 해요. 할머니께서도 큰아버지 큰엄마도 다 잘 계세요. 아버지, 이곳 걱정은 조금도 마세요.

참, 평화가 밖에서 상한 걸 먹고 설사병에 걸렸었지만 지금은 나았어요. 꽃밭에는 봉숭아랑 활연화, 금잔화와 붓꽃들은 시들고 칸나와 달리아 꽃이 빨갛게 피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아버지 상상해 보세요. 아버지가 사철나무 울타리 밑에 좍 심어놓으신 코스모스가 색색가지로 피어서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살래살래 손을 흔드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계셨으면 우리들을 찰칵 찰칵 찍어주셨을 텐데요. 걱정 많은 엄마에게는 사진 찍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요. 보고 싶은 아버지. 오늘 하루도 열심히 힘내셔야 해요. 예수님한테 아주 많이 부탁 기도하면,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신다고 일요일에 목사님이 설교해 주셨어요.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신애는 매일 그렇게 일기처럼 써나갔다. 어디로도 부칠 수 없는 주소 없는 편지를.

마당에서 “가네모도, 가네모도” 하고 신애의 일본 성을 숨 가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즈오였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가즈오는 놀라는 신애의 어깨를 와락와락 흔들어대었다. 뭐라고 급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게 소리로 되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즈오! 왜 그래? 응?”

신애의 눈을 뚫을 것처럼 응시한 채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을 뿐, 여전히 그의 말은 발성되어 나오지 않는다. 씩씩하고 활달한 성격인 가즈오에게선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싱아이! 나, 나, 떠나야 한다. 지금 떠나야 한대. 어, 어떻게 하지……?”

가즈오는 더듬거리며 겨우 그 말을 토하였다.

“우리 일본은 전쟁에 졌어. 지고 말았어. 지금 당장 우리 집은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어…… 어떻게 하지?”

이보다 더 큰 충격이 있을까. 정말 일본이 전쟁에 졌다면, 아버지! 조헤이에 간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일본이 전쟁에 졌다니? 정말? 가즈오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며 점차 신애의 낯빛도 변해간다. 가슴이 마구 후들거리며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

“싱아이,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절대로!” 가즈오는 어금니를 꽉 물고 토해 내었다. “가즈오 나도.” 말하고 신애는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쪼그리고 앉았다.

“싱아이, 약속해. 꼭 나를 기다린다고!”

가즈오는 절망이 담긴 눈으로 신애의 눈을 응시하고 힘주어 말하였다.

“나는, 너에게 꼭 온다. 이 세상 어디 있어도!”

쨍쨍 내려 쪼이는 햇빛 같은 건 아랑곳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부여잡았다. 타는 팔월 햇볕도 이 세상 모든 소리도 귀먹어 정지한 순간이었다.

“가즈오! 뭐 하는 거야? 엄마가 빨리 오래. 지금 떠나야 한대. 빨리! 빨리!”

심술쟁이 게이코의 째지는 소리에 그들은 제정신이 돌았다.

“이 빠이로또(파이로트) 만년필 너한테 편지 쓰곤 하던 거야.”

한쪽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가즈오가 신애에게 내어밀었다. 미처 신애는 빨간 수첩에 대한 감사의 말도 하지 못하였는데, 가즈오는 하늘색의 만년필과 일본집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신애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게이코의 성화에 이끌려 짧고 뜨거운 ‘안녕’을 고하였다. 가즈오와 게이코는 손을 잡고 언덕을 구르듯이 내려갔다. ‘구니모도 선생님도 가즈오도 떠나면서 뭔가를 주고 가는구나, 마음의 선물을’ 신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뭘 주고 어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 없는 8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리인가? 일본이 전쟁에 지고, 가즈오네 집 식구들이 금방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확실히 일본이 전쟁에 졌다면, 그렇다면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는 말이 아닌가?

신애는 가슴의 동계를 누르며 급히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책을 보거나 음악 듣는 걸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유독 바이올린 곡을 좋아하시었다. 한쪽 벽을 채운 책장 옆 문갑 위엔 아버지가 아끼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실 때 사온 유성기가 있다.

아버지는 자주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 놓고 어려운 책을 읽으신다. 신애는 혼자 집에 있을 때 아버지 방에서 아버지가 감상하시는 음악을 듣는 걸 퍽이나 좋아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일본이 전쟁에 패했다는데, 정말일까? 황급히 신애는 유성기 옆에 있는 마쓰시다(松下) 라디오를 틀었다. 갑자기 라디오에선 남자 아나운서의 가슴 벅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오늘 정오를 기해 항복을 했습니다. 마침내 항복을 했습니다.
-우리 조선은 해방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패전하여 마침내 우리 조선은 독립이 되었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