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다는 인식 아래 시작된 본지 [교회로 돌아온 신학] 기획에 가장 적합한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김남준 목사(열린교회)다. 이번 달 월간초대석은 철저한 청교도적 삶과 설교, 신학을 교수하는 김남준 목사를 만나 한국 장로교 100주년의 의미와 신학적 평가, 목회와 시대정신 등을 물었다.

▲김남준 목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기능 자체가 심하게 약화됐고, 설교도 탈신학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정신에 교회가 물들어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태진 기자

-한국 장로교회가 100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100년간 한국에서 ‘장로교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요.

“선교 초창기에 많은 교파들이 들어왔는데, 장로교가 보편적으로 가장 환영받은 교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장로교가 주류를 이뤘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혜택을 입었습니다. 첫째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사상이고, 두번째로 교회정치 면에서 대의제가 정착됐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도 적잖이 기여했다고 봅니다. 사실 모든 교파들 가운데 장로교가 전통적으로 가장 철저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상당히 기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장로교 정치체제는 나름대로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자유주의를 막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을 하자면, 장로교 체제 자체가 교회의 영적 수준이나 정신들이 성경에 근접하면 할수록 최고의 정치체제가 되지만, 멀어질수록 불합리한 체제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너무 많은 권한을 장로들이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제대로 사용할 능력이 없는데 권한만 주어지면 교회 모습이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로 제도가 좋은 역할을 했으면서도 권위주의나 비민주적 의사결정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특히 의사소통 면에서는 장로 체제 교회가 대의제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가톨릭처럼 다스리고 치리하는 그룹과 다스림받고 치리받는 그룹으로 나뉘어 소통을 어렵게 한 측면도 생겼습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이야기하자면 그렇습니다.”

-본지는 ‘교회로 돌아온 신학’을 연중 기획 중입니다. 신학과 목회, 설교와 신학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시는 목사님께서 보실 때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또 목회와 신학의 접점과 균형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한다고 보십니까.

“오늘날 심각한 문제는 교단 구분 자체가 사실상 의미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다른 사람들간 모임이 교단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달라지면 이단이 되죠. 기초는 같지만 워낙 달라서인데, 영어로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의견(hairesis)이라는 뜻입니다. 의견 자체가 워낙 기독교의 정통 가르침에서 벗어났을 때 이단이라는 거죠. 그리고 가르침 자체를 성경에 기초하지 않을 때 이교라고 합니다. 가장 멀리는 이교, 이단, 다음에 교단이 되는 겁니다.

신앙에 있어 근본 조항과 비근본 조항이 있습니다. 근본은 흔들면 그 자체가 성립하지 못하는 그것을 일치하지 못할 때 교단이라 보지 않고 이단이라 봅니다. 대신 비근본적 조항들, 예를 들어 세례할 때 물을 뿌릴 것이냐 몸을 담글 것이냐, 장로교회 제도냐 감독 제도냐 하는 것들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견해가 가장 성서적이라고 하겠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차이들 자체가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소위 ‘에클레시아 도켄스(Ecclesia Docens)’, 가르치는 교회 개념 자체가 우리가 믿는 진리를 우리가 믿는 방식으로 적용하고 가르치기를 고집할 때 교단이나 신학의 차이가 부각되는데, 어차피 설교 자체가 이미 탈(脫)신학화됐습니다. 교회도 양육하고 전도하고 교제하는 기능들은 있지만 진리를 가르친다는 기능 자체가 심하게 약화됐습니다.

그런 속에서 반성하자면 우리의 목회 핵심은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유지하는 것이 목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며 이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수립, 올바로 가르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교리들을 따라 믿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인데, 이것들이 중심이 되지 않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장로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파들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탈신학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거부하는 현대 정신에 교회가 물들어가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방안은 있으신지요. 이러한 시대 흐름에 우리에게 필요한 신학은 무엇입니까.

▲김남준 목사는 성화를 너무 강조하다 구원론에까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해 “기본적으로 성도들에게 믿음의 생활과 윤리를 가르칠 때 전체적인 신학과 교리의 틀 안에서 강조해야지, 협박하듯이 하면 몇 번은 먹히겠지만 그런 설교를 남발하면 천국과 지옥 자체를 비웃는 풍토가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신태진 기자 
“대책을 세우자면 먼저 목회자들이 좀더 깊이있는 신학을 연마하고, 두번째로 이 세상을 사로잡은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세번째로 성도들이 이런 현실 속에서 성도들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느냐 등에 초점을 맞춘 설교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신학, 교리와 사회 등 모든 연관 속에서 분명한 사상과 신념을 가진 설교가 이뤄져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신학은 꼭 누구의 신학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습득해 온, 그리고 스스로 교회가 가르쳐 온 진리의 체계들을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보편 교회적인 유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대 교부와 속사도 교부들, 위로 올라가면 사도들과 신약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려오면 중세 보편 교회 교부들, 종교개혁가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현대 개혁신학자들, 장로교주의를 형성했던 사람들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현대 사상을 이해하며, 자신이 성경과 직접 대면하여 확신있게 설교하는 ‘사상적인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장로교의 전통이고, 이를 회복해야 장로교다운 장로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목사님께서 ‘청교도’를 많이 소개하시는 이유는 ‘구원’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간과하기 쉬운 ‘삶(성화)’에 모범이 되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까요. 더불어, 신학에서는 ‘성화와 구원’이 많이 등장하지만 설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선’이라 비난받는 교리 때문에 명확한 답을 회피하며 ‘다원주의적 성향’도 띠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매주 ‘회개’를 말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반론도 있는데요.

“청교도 분야는 영국에서 종교개혁 후예들로부터 일어난 운동이고,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언약도라 부릅니다. 이 사람들이 제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고 높은 도덕성과 철저한 신학, 헌신적인 사랑과 교리의 파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망 등을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 투쟁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좋은 모범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성화와 구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정확한 지적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신학에서도 성화를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1980년대는 교회론·성령론에 관심이 있었고, 2000년 들어서는 신론에 관심이 집중돼 있습니다. 그래서 성화가 신학의 주제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구원에 대한 개념들이 대단히 바뀌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구원이란 예수 믿고 중생하고 회심하는 즉각적 변화와, 그 이후 말씀과 성령으로 점점 거룩해져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지속적 변화를 말합니다.

오늘날은 이보다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이 세상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신론으로 어떻게 풀어 이성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구원보다는 육체적·물질적 차원에서 어떻게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데 기독교가 도움이 될까 하는 관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도 육적으로 바뀌고 있어요. 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구원 개념들이 너무 현세적으로 치우쳐 있는데, 양자 사이에 균형이 무너져 기독교만의 영적 특성들이 현저히 무시되는 상황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실 교회에서 성화나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화는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깎아서 하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이 그 사람에게 항구적인 성향이나 습성이 돼 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은 습관이 되도록 하는 상태이죠. 하지만 오늘날 시대정신은 인간 중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맞춰야 한다기보다 하나님이 우리 필요를 알고 맞춰주는, 기독교도 그런 요구에 부응하려 합니다.

그래서 ‘죄’라는 객관적인 개념이 사라지고 ‘상처’라는 주관적인 개념이 들어왔습니다. ‘회개’라는 하나님 중심적 개념이 사라지고 인간의 태도 ‘변화’라는 주관적 개념이 들어왔습니다. 신학보다는 윤리가,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냐 하는 실용성이 중요하게 대두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현대 사상에 젖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사상으로 돌아오도록, 한편으로는 영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시대의 정신과 계시의 정신이 어떻게 다른지 인식하도록 만드는 노력들이 교육에 반영돼야 합니다.”

-시대정신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쉽지는 않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는 “신앙인들이 속이기를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하는 모습들은 은혜받는 것과 상관없이 성품 속에 배어있는 것으로, 왜 잘못됐는가를 봐야 한다”며 “태도를 조금만 올바르게 해도 기독교인들이 지금처럼 욕 먹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신태진 기자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물을 마시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가니까요. 이 시대 안에서만 보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빛으로 비춰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초월적이고 신령한 빛을 비춰야 하는데, 이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그래야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목사님은 <존 오웬의 신학>,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등 교리 문제를 다루시면서도 <게으름>, <싫증>, <개념없음> 등 성도들의 실제 삶에 관심을 놓지 않고 계신데요. 이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요.

“제 글쓰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이쪽은 신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이쪽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이쪽이 삶을 안 다룬다거나, 저쪽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런 글쓰기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봐야죠.

<게으름>은 40만부 이상 나갔는데,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쓰게 된 것이니까요. 성도들이 영적인 변화도 받고 성경도 믿고 하나님도 사랑하는데, 삶의 태도가 잘못돼 있었습니다. 게으른 거죠. 거기에 발목이 잡혀서 그 습성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에까지 배어있어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해야 하는데 그 습성들이, 말하자면 날아가는 새의 발에 돌멩이를 달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로 날아가라고만 가르치지기보다 너의 발에 매달린 돌멩이를 보아라, 그런 가르침도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개념없음>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욕을 많이 먹는데, 그게 모두 영적인 게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눈물 흘리며 은혜받고 나서, 버스정류장에서 새치기를 해요. 그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삶의 태도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은혜받는 것과 상관없이 성품 속에 배어있는 것들이죠. 왜 잘못됐는지를 봐야 합니다. 새치기를 하는 순간 신앙을 버린 게 아니거든요. 악하고 못된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건 어쩔 수 없죠. 신앙으로 변화받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태도를 올바르게 하면 그렇게까지는 욕을 안 먹을 수 있는데 왜 그럴까, 그래서 <개념없음> 문제를 다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