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사사기 13장 8-23절 강해 계속

5. 21절에서 마노아는 이 광경을 보고서야 그분이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았다. 21절에서는 마노아가 그분을 여호와의 사자라 했고 22절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결국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로 마노아를 접촉하시며 삼손을 일으키신 주님이 어느날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마노아는 자신이 뵈온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고 죽을 줄 알고 두려워하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다(33:20). 그러나 그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볼 수 있다. 아들은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다(이상근 주석).

6. 스펄젼은 이 마노아의 말에서 심오한 영적 의기소침이 어떤 놀라운 축복의 전조가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 축복을 잔뜩 실은 하나님의 커다란 마차들이 여러분의 문간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우리의 귀에는 덜거덕거리며 굴러가는 무시무시한 바퀴 소리들이 오래 전부터 들릴 것이라고 했다. 마노아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삼손을 얻기 전에 “우리는 죽을 것 같다”는 소리를 지르게 된 것이다. 비록 그가 위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듯 한 마디 잘못된 말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용감한 사람도 가장 겁쟁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위대하였던 루터도 낙심에 가까운 우울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도 시편에 이런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런 말씀은 진실한 신자들이 흔히 경험하는 일이며, 이러한 우울한 시기에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게 한다. 이러한 시기에 낙심과 원망 없이 오직 하나님만 찾으면 멀지 않아 큰 축복을 받는다.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로 도망가서 우울해했던 낙담의 때가 있었다(왕상 19:4). 그러나 그들이 오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곧 하나님의 격려와 예기된 축복이 있는 것이다.

루터(Luter)는 매일 세 시간씩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승리의 생활을 가졌지만 개혁 당시 그의 조력자였던 멜랑톤(Melanchthon)은 낙심과 공포 가운데 지냈다. 그때 루터는 멜랑톤에게 편지하기를 “만일 우리의 주장이 옳지 않다면 내어 던지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말하는 것이 옳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다면 이 우주 어디에 계시겠는가! 우리가 교회가 아니라면 교회는 어디에 있겠는가? 바바리아의 귀족들일까? 페르난도일까? 교황일까? 터어키 사람들일까? 누가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리스도도 함께 실패하신다. 곧 우주의 대주재께서 실패하신다는 말이다. 그러하다면 나는 이 세상 권세잡은 가이사와 함께 머물러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실패하기 원한다.” 루터도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일에 대하여 깊은 회의와 고려 속에, 또 기도 속에서 주님의 확증을 받으며 다른 사람을 확신케 하는 은혜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혹 낙심되는 일, 돌발적인 기분의 변화가 올 때, 너무 오래 그렇게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11). 마노아는 좋은 아내를 조언자로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떨면서 “우리가 반드시 죽으리로다”고 할 때 아내는 건전한 판단력을 갖고 남편의 돕는 배필이 되었다. 그녀의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논리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맞게 행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황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명하고 사건의 진상을 꿰뚫어보는 직관이 있다. 그녀는 하나님이 뭔가를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후에 죽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도 어떤 자매나 형제가 낙담하고 약해졌다면 과거에 그에게 베풀어주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그분의 일을 상기시키며 격려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죽이시려면 희생제물을 받으셨겠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 모든 일들을 보여주신 것이며, 셋째는 삼손을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모든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장차 태어날 아이에게 포도주나 부정한 것들을 먹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서 죽일 리가 없다는 것이 아내의 논리였다. 좀 전에 말한 루터의 부인도 루터가 낙담하여 죽을까봐 두려워할 때 “루터의 하나님은 죽었는가?”하고 질문하여 오히려 루터를 일깨운 일이 있다.

이것을 복음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이러하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었다. 지금도 그 분을 믿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멸망치 않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여러분의 대속물로 고난을 당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효과가 없겠으며 어떻게 여러분이 다시 쫓겨나게 될 수 있겠는가?

마노아의 주장은 이것이다. “우리가 염소 새끼를 바위 위에 갖다 놓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제물은 삼킨 바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불은 우리를 다시 태우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분이 어찌 자기의 아들을 또 죽이셨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들로 고통을 당하게 만드셨으며,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게 만드셨는데 이제 신자 또한 고통을 당하게 만드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가납하셨으므로 그분이 우리를 파멸시킨다고 상상할 수 없게 하셨다.

7. 기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말을 했다. “만일 과거의 불신앙 때문에 나를 파멸시키려고 목적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주셨겠으며 여전히 그렇듯 신기하게 축복해주셨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제물을 받으셨으므로 그분은 우리를 죽일 의사를 갖고 계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기도드리고 골방에서 나오자마자 사탄은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저버리셨다고…. 왜냐하면 그 자는 원래가 거짓말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의 거짓말에 응대할 가치조차 없지만 이러한 부분의 말씀은 사탄의 거짓말을 대응하는데 좋은 말씀들이다.

8. 23절에서 마노아의 아내는 두려워하는 남편에게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죽이려 하셨다면 번제를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이 모든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아내가 더 주님을 아는데 진보해 있었다. 그러나 마노아는 매우 착하고 순박한 남편이었고 그 가정은 타락한 사사 시대에 별과 같이 빛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정이었다. 현명한 아내의 현명한 조언은 많은 때 남편의 부족한 어떤 면을 보충한다. 이런 일은 개혁가 루터나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아내에게서도 볼 수 있다. 대부분 훌륭한 주님의 종들에게는 좋은 보필을 하는 아내들이 있게 마련이다.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삼손’은 태양, 강한 자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가 사사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신이 그를 감동하셨기 때문이다.

14: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2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 14장에는 삼손의 결혼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는 블레셋 딤나의 한 여자를 보고 결혼할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를 아내로 취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말했다. 삼손의 부모는 당연히 반대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될 뿐 아니라 더욱이 사사이자 나실인으로 헌신한 사람이 이방 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녀의 결혼이 부모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는 것은 성경적이며 또 부모가 자녀의 결혼에 대해 합당치 않다고 여겨 반대 의사를 표하는 것도 가한 일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동의와 찬성을 얻지 못할 경우 그 결혼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여겨 그 결혼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삼손의 경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방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있는데 그의 부모가 그런 결혼을 찬성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삼손은 간곡한 부모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니 데려다 달라고 고집하였다. 그의 부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일로 자녀와 부모 사이에 다툼까지 벌어지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많은 때 소위 옳은 일을 위하여 육체와 혈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는데 이는 경건한 사람들의 행할 바가 아니다. 부모는 필요할 때 바른 말을 해주고 합당한 가르침을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필요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엄히 책망과 훈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충돌보다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 일을 기도로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가장 온당하다. 4절은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고 말한다.

2. 우리는 여기서 삼손 시대의 배경을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삼손 때는 40년 동안 블레셋의 통치를 받아왔고 이스라엘은 그 분위기에 마취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그 압제에서 벗어날 힘도, 마음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때에 태어난 나실인 삼손에게는 그와 마음을 같이하여 일할 만한 조력자도 도울 용사들도 없었다. 기드온에게는 그래도 끝까지 따르는 300명이 있었고 입다도 길르앗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도왔지만 삼손에게는 아무도 없었고 홀로 블레셋을 대항하여 싸워야 할 판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손을 도와줄 마음은 고사하고 블레셋에게 종 노릇 하며 사는 것을 당연시한 나머지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블레셋과 충돌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삼손의 일을 방해하거나 적대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들은 블레셋에게 삼손을 잡아다 준 적이 있다(15:9-13 참조). 하나님은 그렇게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삼손을 나실인이 되게 하시고 긴 머리털과 더불어 강한 힘을 가진 장사가 되게 하셨다. 일당백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용사로 만드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을 일으켜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때에 따라 다르다. 사사 시대의 마지막에 올때 이제는 사사와 조력하여 함께 대적과 싸울 사람들도 없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런 때의 싸우는 방법은 이전과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3. 우선 그는 블레셋을 칠 근거가 필요했다. 이 일을 위해서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려 한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삼손이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행했는지 아니면 인식과 이해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다만 성령께 이끌려 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하나님의 금하신 바였다. 그런데 이 구절에 의하면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영적인 세계에는 이와 같이 깊이 있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분별의 원칙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이방인의 우상과 풍습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당시 삼손에게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위해 그러한 결혼의 문제를 통해 싸움의 요건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여기서 삼손은 그러한 여인과 결혼해서 일생 편안히 살면서 이방 여자의 우상과 생활습관을 이스라엘 영내에 가져오려는 것이 아니었다. 뒤에 나오지만 그는 다만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블레셋을 칠 구실을 얻고자 결혼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문제는 어떤 자구(字句)를 붙잡는 것보다 그 말씀의 영을 중히 여기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신 것이라면 모압 여인 룻은 그 거룩한 족보에 들어가서는 안 됐고 아무리 그가 시어미를 붙좇았다 하더라도 경건한 사람 보아스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말씀 자구가 아닌 영의 문제가 있다.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하는 상태에서 블레셋을 치려 하니 이러한 방법 외에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을 회개했다. 그때에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삼손의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이 일을 읽어야 한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