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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루이스 프람스마/이상웅·김상래 | 복있는사람 | 400쪽 | 19,000원

“저의 평생에 열망하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저의 마음과 영혼에 박차 같은 높은 동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온갖 반대가 있어도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가정과 학교와 국가에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B. B. 워필드와 더불어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칼빈’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정치의 해’인 2012년, 교계 지도자들과 기독 정치인들 사이에서 자주 등장할 이름이다. 그는 목회자로서 대학 설립자와 신학교수가 됐고, 국회의원이 됐으며, 정당의 당수가 됐고, 결국 한 나라의 수상에까지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쁜 사역들 가운데서도 220권의 책을 저술했다.

‘1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진 사람’답게 그는 이외에도 언론인, 교회 개혁자, 저술가 등 다채로운 생의 이력을 가졌지만,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자유교회를 세우는 꿈을 꾸었고, 이 꿈의 실현을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했다. 그는 진정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대표적인 저작 <왕을 위하여(pro rege)>로 대표되는 자신의 비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내 존재를 관통하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내 영혼을 관통하는 고귀하고 긴급한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이 거룩한 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아깝지 않다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를 회복하는 것, 예수 앞에 무릎 꿇는 나라에 대한 비전이었다. 카이퍼는 이를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그가 맹렬히 활동했던 19세기 중·후반의 네덜란드는, ‘루터와 칼빈의 세기’처럼 ‘기독교 국가’였다. 복음화율 20%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정체기를 맞은 우리 사정에선 부러운 일이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의무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이 ‘국가교회’들은 필연적으로 부패와 손잡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여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포이에르바흐와 다윈, 물타툴리와 헉슬리 등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진화론과 무신론, 실증주의와 불가지론의 시대정신이 부유하던 때였다.

루터와 칼빈이 ‘면죄부’로 대표되는 성직자들의 물질적·정신적 타락에서 개혁을 외쳤다면, 카이퍼는 ‘자유주의’의 수렁에서 교회와 학교를 ‘자유롭게’ 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당시는 인간중심적 ‘근대 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으로 격하시키며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신학을 공부하던 카이퍼는 이처럼 도덕적인 원리로만 가득한 채 예언자적 열정을 상실한 교회에 열정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던 사상들의 결과로 봤다. 프랑스 혁명은 전적으로 인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유를 추구했고, 인간 이성의 권위가 하나님과 그 말씀의 권위를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폴란드의 종교개혁가 존 아 라스코를 연구하면서 복음주의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이후 ‘심각한 싸움’을 원치 않는 정통주의자들을 뒤로 한 채 복음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사상으로 무장하고 자유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노동 문제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사회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제1차 기독교 사회적 회의’를 개최하며 사회참여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학교’와 ‘언론’에 많은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채플거부 등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미션스쿨’들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만신창이가 돼 존재 가치까지 부정당할 위기에 있고, 기독교라면 뭐든 조롱하기 바쁜 ‘안티기독교’ 세력과, 개혁을 가장한 ‘안티 언론’들의 무차별 공격에 이렇다 할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등 ‘학교’와 ‘언론’은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대표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속화된 국립대학들에 반대하고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토대에 근거한 학문을 수행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고자 장기간 ‘학교 투쟁’에 나섰고, 목사 대신 정치가가 됐다. 결국 그는 1880년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을 세웠다. 그는 신학교 설립 뿐 아니라 개혁신학적 원리에 근거해 모든 학문을 수행하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종합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카이퍼는 또 큰 교회 지도자로서 목회직을 감당하면서도 일간지 ‘드 스탄다르트(De Standaard)’의 편집장이 돼 매일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는 언론에 대해 “반드시 오직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제도만이 삶의 사실들을 보증하고 삶의 필요들을 만족시키며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묵상록은 부드러웠지만 기사 작성에 있어서는 단도직입적이고 핵심을 찔렀으며 실제적이었던 그의 글은 많은 독자층을 형성했고, 네덜란드 전역을 강타했다.

더구나 그가 주도한 교회개혁은 오늘날처럼 분열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았다. 자기 잇속이나 명예를 위해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다. 애통이라는 뜻의 ‘돌레안치(Doleantie)’ 운동은 타락한 교회로부터 떠나거나 분리되지 않았고, 교회 안에 침입해 들어온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제거하면서 원래 교회와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그의 주장은 “국가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자유로운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복있는사람)>의 저자인 ‘카이퍼 전문가’ 루이스 프람스마(Louis Praasmsma)는 “카이퍼는 19세기와 20세기를 짚고 서 있었던 거장이었고,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른 시대를 열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다”며 “그의 영향력으로 보수주의가 승리하고 자유주의는 좌절됐으며 사회주의는 억제됐다. 개혁주의 신학이 부활하고 교회 안에서의 정직함이 선포됐으며 신앙고백이 중시됐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천명됐다”고 평가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그의 시대’를 부제로 한 책에서 그는 또 “카이퍼는 과학주의, 맘모니즘, 진화론, 문화주의와 같은 그 시대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며 “그는 자유로운 교회와 기독교 학교, 자유대학, 자유 기독교 노동운동, 자유 기독교 정당을 위해 투쟁하는 등 자유를 갈구했지만 언제라도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남아있기를 원했다”고 했다.

책을 번역한 이상웅 목사(대구산격제일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높이기 원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는 카이퍼의 사상은 국내에까지 전해져 기독교학문연구회,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한동대학교 등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는 복있는사람 출판사의 ‘하나님의 사람’ 시리즈 11번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