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 ‘나의 친구’라는 말을 ‘어깨에 나의 슬픔을 대신 짊어져 주는 사람’이라는 긴 단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말은 길지만 그 뜻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슬픔을 내 대신 그 어깨에 짊어져 줄 수 있겠습니까?

런던타임즈사에서 ‘친구에 대한 정의’를 공모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선작 가운데 1위는 ‘온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서 떠날 때 나에게로 오는 사람’이었고, 2위는 ‘나의 침묵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이었고, 3위는 ‘기쁨을 공급해주고 슬픔을 쪼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친구에 대한 정의는 동서양의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내게서 떠나갈 때 내게로 와주는 사람이 친구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그런 친구가 몇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3절과 14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고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디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내 슬픔을 짊어져 줄 사람이 있습니까? 영국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두가 다 나를 떠나가는데 나를 찾아와줄 친구가 있습니까? 나의 아픔과 슬픔을 진실로 이해해 줄 친구가 있습니까?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내 곁에 늘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며 위로일까요?

세상에서의 친구는 일시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이 될 수가 없겠죠! 대체로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설명할 때 세 가지 내용으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스톨게(가족)의 관계, 둘째는 필레오(우정)의 관계, 셋째는 에로스(이성)의 관계로서 언제든지 상대적인 것입니다. 무조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친구입니다. 지금 당신 곁에 당신의 슬픔을 대신 짊어져 줄 친구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떠나갈 때 나에게 찾아올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그런데 당신과 나의 영원한 친구이며, 소망이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거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인생의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예수님께 나오시면 모든 문제의 해결을 받습니다. 아픔의 문제, 슬픔의 문제, 고통의 문제 등등…….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그 짐을 지고 예수님께 나오시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당신을 기다리며 함께 그 짐을 지기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날 때 당신 곁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길 원합니다.

고아원이나 병원 등지에는 이름 모를 병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병의 증세는 대체로 우울증 증세를 나타내며 죽음까지 부른다고 합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도, 위생시설이 좋은 곳에서 살아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병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병의 이름을 ‘사랑 결핍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사랑이 결핍되면 죽기까지 한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치료합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죄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이 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습니다. 죄의 질병은 오직 사랑으로만 치료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치료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당신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풍성한교회는 그 사랑을 나눠드리기 위해 온 성도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언제든 어디든 찾아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사랑을 나눠드립니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도 사랑이 필요하세요? 언제든지 요청하세요! 행복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눠드리겠습니다.

조성래 목사(풍성한교회 담임, 한국재난구호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