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 설교] 삶을 바꾸는 예배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날짜: 2012년 1월 1일
본문: 히브리서 12:2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삶을 바꾸는 예배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지난해 11월에 한국 선교사 지도자 포럼이라는 대회가 있었습니다. 폐회 설교를 맡아 용인에 있는 한 수양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중요한 집회라는 기사를 접하고 갔지만, 너무나 썰렁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중요한 순서들이 끝나고 마지막 폐회예배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멀리? 이 사람들 때문에?”
설교를 시작하기 전, 상당한 경력을 가진 피아니스트 김애자 선교사님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그분을 바라보며 “프로답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계속해서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누구 때문에 하는가?”
연주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많은 청중보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 그 연주를 듣는가가 아닐까요? 옛날 궁정에서, 청와대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이 사람의 숫자일까요?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주시더군요.
“여기에 내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다!”
거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신분을 모르지만, 갑자기 그분들이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변했고, 하나님 앞에서 설교한다는 떨림에 성실하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 “나는 목사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우리를 실패자로 만들고,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규모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다음은 페이스북에 댓글로 남긴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프로로 살게 해주셔^^ 개척 초기에 아내와 어린 아들 두 녀석과 함께 예배드리던 시절. 아들이 화장실에 가자며 엄마를 조를 때, 엄마는 두 아들을 다 데리고 나갑니다. 그때 홀로 단 위에 남겨진 나. 우두커니 그들이 오기만 기다립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내 설교가 끊여지지 않고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것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만 있어주면 좋겠다는 것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예배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인 예배의 정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명하거나 강해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오늘부터 3주 동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신앙의 기본을 다져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만나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소망을 던져 줄 수 없다면 더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과 생명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이 절대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만나 교회는 2002년에 mission statement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지역과 세상을 섬긴다.

여기에서 핵심 단어를 뽑아낸다면, “예배” “훈련” “섬김”입니다.
여기에서 예배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며, 훈련은 성자 예수님, 섬김은 성령님의 사역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비전이 아주 건강하게 balance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목적도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모임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이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훈련을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기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예배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입니다.
예배자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훈련도 섬김도 의미가 없습니다.
만나 교회가 꿈꾸는 사역의 기본은 예배입니다.
모든 사역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없이 그 어떤 사역도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하며,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없는 사역이란, 하나님의 관점에 올라갈 수도 없으며, 예배가 없는 사역이란 자의적 사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 - 예배!
마가복음 12장 28절 이하에 보면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영어로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which is the most important?"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의미를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서기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계십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요?
‘믿음’이 무엇인가요? 그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예배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배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나아가는 자들이 그분의 생각을 알고, 그분의 관점을 알고, 그분 앞에서 삶을 결단하고,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11월에 제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묵상 글입니다.
"나침반과 시계"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등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길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중간마다 나침반을 바라보며 방향을 확인합니다. 아들이 보기에 그 시간이 아까워 아버지를 재촉합니다. "아버지 빨리 가지 않으면 날이 밝기 전에 정상에 오르지 못해요!"
산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 때문에 방향은 보이지 않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더 이상 아들은 재촉할 수 없었습니다. 늦은 것 같았지만, 결국 나침반을 보며 부자는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상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침반을 주며 말합니다. "얘야! 시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야,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산속에서 헤매다 죽을 수도 있어."
이제 아들이 아버지에게 시계를 풀어주며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스스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시계를 보관해 주세요."

진정한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나침반을 받고, 우리의 시계를 풀어 맡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빨리 가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는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배에 대하여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예배에는 웃음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예배 가운데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웃음과 눈물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열리지 않으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으로 고백하고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기도, 형식적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배는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편리한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제사”는 동물을 죽이므로,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죄의 사함뿐만 아니라 나의 인격과 내 생각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할 일은 이 예배 가운데 회중이 들어오도록 준비하며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오늘 예배에 참여한 회중입니다.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요소 가운데 여러분의 생각을 꺾어야 하는 상황들, 여러분의 유익을 접어야 하는 순간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요즘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할 때 아직도 떨리세요?"
저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물어보십시오. 제가 얼마나 떨며 예배를 준비하는지 말입니다. 몇 주 전 원고를 마무리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중에 다시 원고를 보고, 토요일에 다시 수정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주일 새벽에도 수정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려고 나를 열어놓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저는 예배를 인도하기 몇 시간 전부터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하며 준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하는 일은 예배를 돕는 일입니다. 사실 예배의 주인공은 여러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여러분이 영적인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오페라든 가장 비싼 자리가 어디입니까?
지휘자와 연기자, 연주자의 표정이 보이는 곳, 그들의 숨소리와 땀, 침이 튀는 곳에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만큼 치열하고, 준비된 모습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리가 다 똑같지 않습니다.
치열한 예배자의 준비를 여러분이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래층 뒤에서 열 번째 줄까지는 로비에서 들리는 음향과 겹쳐져서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자리가 가장 음향이 좋은 자리인지 알고 앉아 계십니까? 어느 자리에 앉아야 영상을 통해 가장 깨끗한 모습을 볼 수 있는지 고민하며 앉아 보셨습니까?
예배는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재방송이 없습니다.
예배는 매 주일 생방송으로 진행됩니다. 그 순간이 가장 귀하고, 치열한 순간입니다. 그런 예배를 여러분이 조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예배의 시간과 자리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목회자들에게 세미나를 인도하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당신들 목회의 승부를 예배에 거십시오. 예배시간에 감격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예배에 성공자가 되십시오!

새로운 한 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배당에 늦지 않도록 하십시오.
허겁지겁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준비된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예배의 감격이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에는 멀리 화곡동에서 2시간씩 걸려 예배당에 나오시는 원로 장로님이 계십니다. 80이 다 된 분이 혼자 살면서, 교회에 나오기까지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오십니다. 우리 교회에는 매 주일 원주에서, 천안에서 1부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분도, 춘천에서 살면서 주말마다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원로 장로님은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제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한 채로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너무나 은혜스러웠어요!” 그분의 예배가 어떻게 시간마다 늦게 오는 사람의 예배와 동일하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예배의 은혜가 없다면, 예배자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핸드폰을 끄고 예배당에 들어오십시오.
예배시간에 설교 하다 보면 문자를 확인하는 사람들, 또 문자를 보내는 사람도 봅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울리는 핸드폰 확인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요? 문자를 보고 나면 꼭 지금 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지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전화에 조금 늦게 대답한다고 그렇게 큰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그 일이,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귀하게 여김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존중받기를 원하시지요.

세상의 모든 염려를 차단하고 들어오면 하나님의 생각이 당신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성훈련을 끝날 때마다 듣게 되는 고백이 있습니다. “목사님! 사실은 제가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치고 돌아가 보니까,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막아주시고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있을 때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런 용기와 준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차단할 용기를 가진 자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의 예배입니다.
한 시간도 맡기지 못하고 안달하는 사람의 예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예배가 어떻게 동일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3. 늘 처음 것을 드리도록 준비하십시오.
헌금을 드릴 때, 가장 깨끗한 돈을 구별하고, 새 옷이 생기면, 주일날부터 입도록 하십시오. 교회는 사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4. 주일 전날은, 예배에 방해가 되는 행위들을 삼가십시오.
즉 은혜를 가로막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특히 부부싸움을 하고도 담대하게 나오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토요일에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픈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대부분은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문제들이 많이 해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5. 예배 시간은 나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구별된 시간에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높은 사람과 어려운 사람과 약속을 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상대방의 시간을 먼저 물어보고, 거기에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여러분의 편의가 예배시간을 좌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6. 진정한 예배의 시작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예배자로 사는 것이야말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주일 예배자가 아니라 매일 예배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하여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흠 없는 산 제물로 구별되어 사람들을 대해 보십시오. 예배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시선 고정! - 구별한다는 것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영어 성경에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보는 차원에서 "see"라는 동사가 아니라 우리의 눈을 고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삶의 시선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거룩한 산제사”라고 말씀합니다. 산제사의 개념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보았고, “거룩한”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늘 “구별”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는 구별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지요.
로마서 기자도 분명하게 말하지요, 거룩한 산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릴 때, “흠 없는”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찾고 찾아서 드리는 예물이 흠 없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왜 나에게 응답이 없으며 삶의 변화가 없는지를 한탄하기 전에 구별된 예배를 드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올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별하여 왔습니까? 또 하나의 선택적 예배가 아니라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시간의 구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남는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예물을 드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물질 중의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하게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자신의 남는 시간과 자신의 즐거움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입니까?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장 신뢰할 때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신다는 사실을.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드러날 때, 예배의 삶을 산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불의한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나오셨습니까?
철저한 신뢰는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철저한 순종은 우리의 이해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의 삶을 살 때는 우리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극히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최근 가장 유행했던 드라마 중의 하나가 [뿌리 깊은 나무]입니다. 세종대왕이 아주 멋진 대사를 했는데 한번 보실까요? 페이스북에 누가 올려준 글입니다.
어제 뿌리 깊은 나무를 시청하였지요. 극 중 세종대왕이 논리적 설명이 있어야 신뢰할 수 있다는 집현전 학자들의 말에 "신뢰라 하였느냐??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보며 그냥 믿어 줄 수는 없겠느냐?"라며 울분을 터뜨리던 장면을 보며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봤지요. 그리고 카이로스를 신뢰하기로 했지요^^
누가 그런 말을 했지요?
“믿는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고.”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구별하는 것들이 무엇인가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 주로 비상식적인 순종의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몸과 삶이 드려지는 헌신 말입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고, 자신의 성을 쌓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과 재물을 쌓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분의 하시는 일들을 기뻐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야말로 예배자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합니다. 지금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들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예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아십니까?
터키 이스탄불에서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고 바로 앞에 있는 블루 모스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비잔틴 문명을 꽃피웠던 그곳에 세워진 소피아 성당의 쇠락을 보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줍니다.
세계에서 4번째 규모의 큰 성당이요, 콘스탄틴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걸쳐 A.D 538년에 세 번째 봉헌된 이 교회의 웅장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 때 약탈당하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에 술탄 메멧은 귀중한 성화들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석회를 덮어 회칠을 하였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회를 벗겨 내고 여기저기 아름다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말씀이 선포되던 단도 삐뚤게 세워져 있었는데, 이유는 메카를 향해 방향을 틀어 놓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소피아 성당이 온전히 모스크로 사용되지 못하였습니다. 1609년 술탄 아흐멘은 성 소피아를 능가하는 더 크고 웅장한 회교 사원을 바로 맞은편에 건립하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사원 내부 뒤쪽 벽을 뒤덮고 있는 21.000개의 푸른 무늬들의 타일 장식과 중앙 돔에 나 있는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이 모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블루 모스크"라 불리게 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사명을 잃으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성 소피아 성당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회칠한 모습으로 관광지가 되어버린 모습을 말입니다.
신앙과 영향력을 잃어버린 교회에서는 더는 말씀이 선포되지 않습니다. 소피아 성당이 유명했던 것은 초대교회 소위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존 크리소스톰의 명설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설교가 선포되던 곳이 저렇게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무서움을 말해 줍니다.

블루 모스크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그 추운 날에도 찬물로 손과 발을 씻는 장소를 보았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 정결하게 하는 물두멍 같은 곳이죠. 죽 줄을 서서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치마를 입고 온 사람들 그리고 그 추운 날 반바지를 입고 온 사람들은 긴치마로 가려야 했습니다.
또한, 블루 모스크로 들어가는 입구에 쇠줄이 늘어져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유는 황제가 그곳을 들어갈 때 머리를 숙여가 들어가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와 가장 무섭게 대립하고 있는 이슬람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예식이 사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냐가 아니라 누가 본질을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진리를 잃어버리면 얼마나 무서운 수모를 당할지를 보여 줍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앞세웠던 십자가가 희생과게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상처를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십자가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상처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밟았던 최초의 복음의 땅, 초대교회의 신학을 꽃피웠던 터키가 99% 모슬렘의 땅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아십니까?

창세기를 묵상하던 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7-8절에,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 그가 그곳에서 …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삶이 늘 평탄한 것이 아니었고 새로운 땅에서 기근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비옥한 애굽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람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래를 빼앗길까 두려워 누이동생이라 속이게 된 것이지요.
참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12장 9절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라는 말씀 이외에 애굽에서 아브람이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시작한 삶이 언젠가, 아니 고난을 만나며 예배하는 것보다 그의 삶의 길을 찾는 것이 더 긴박한 문제가 되었고, 그가 가나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이었음에도, 그것이 과거의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배를 잃어버린 아브람을 보세요. 하나님의 관점에 서지 못한 아브람은 애굽에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 두려운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보호할 인간적인 수단을 간구하게 됩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자의 삶에서 벗어나 수치를 당한 아브람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을 구원하시는 손길을 따라 온 가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창세기 13장 4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이 다시 예배자로, 그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자가 되고 난 후의 행동입니다. 애굽에서 그렇게 치사하고, 수치를 당했던 아브람이 예배자가 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조카 롯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멋진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창세기 13장 8-9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역시 예배자가 된 아브람의 선택과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제단을 쌓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제 예배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의 조카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고 난 후, 광야와 같은 땅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을 주목하세요.
창세기 13장 17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조카 롯이 택한 땅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3장 10절입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아무리 그 땅이 아름다워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의 땅은 멸망 받을 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래의 축복이요, 가능성의 축복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아브람은 눈에 보이는 땅을 축복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땅을 축복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한 자의 삶은 계속된 예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창세기 13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요, 그 약속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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