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현 목사 설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날짜: 2012년 1월 1일
본문: 마태복음 16:18~19
설교: 석기현 목사
제목: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석기현 목사(경향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석기현 목사(경향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가 바로 '내 것'입니다.

그 '내 것'을 인정해 주는 사유재산권, 그 '내 것'을 가지고 저금을 하든지 투자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마음대로 활용하여 더 불려가는 자유경쟁시장원칙 –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국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더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처럼 '내 것'이라고 아주 딱 잘라 말씀하신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실 때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교회이니 그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가는 방법이나 권한도 물론 전적으로 '예수님 마음대로' 정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누구도 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에게 참견하거나 간섭하거나 이의를 달거나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보다 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2012년의 신년주일을 맞이하면서 그 예수님께서 정의하시는 교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스타일의 교회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된 개인 신앙고백'과 직결되어 있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상반절에 "18a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 설립'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데 구약에서 '성회' 또는 '회중'을 뜻하는 '카할'이라는 히브리어와 동의어입니다.
이 단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무엇으로부터'를 뜻하는 '에크'라는 전치사와 '부르다'를 뜻하는 '칼레오'라는 동사의 합성어로서, 전체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부름 받은 공동체'라는 의미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신약 성경에서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교회를 비롯한 여러 초대교회들의 '행전'이 기록될 때나 또는 여러 사도들이 서신서들을 통하여 '교회론'을 가르칠 때에도 이 단어가 무수히 사용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나 바울이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교회'를 뜻하는 말로 쓰기 시작한 창시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즉 당신의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명명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니 교회의 창시자는 예수님의 수제자도 아니고 사도들도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님 자신이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 설립'을 제일 처음으로 공포하실 때 그 교회는 과연 어떻게 성립되는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반석'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오게 되는데, 천주교는 '이 반석'이 '베드로의 인격'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에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셨을 때에 그에게 '게바' 즉 '반석'이라는 뜻의 별명을 주셨으므로 이 문장에서도 '베드로'는 곧 '이 반석'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 주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 즉 소위 제1대 교황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교황설'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천주교의 주장은 너무나 황당무계한 해석입니다.
우선 헬라어의 각 명사에는 성별이 있는데 이 문장에서 '베드로'라는 호칭은 남성으로, 그리고 '반석'이라는 단어는 여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동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만약 천주교의 주장대로 제1대 교황이라면, 그는 소위 '교황 무오설'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제일 첫 번째 교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사건 바로 직후에 예수님께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23절)는 책망을 들었으며, 나중에 사도 바울로부터도 공개적인 책망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갈 2:14).
더구나 독신주의를 고수하는 교황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분명히 결혼을 했고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고전 9:5), '제1대 교황'치고는 정말 최악의 교황이 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설혹 이 '반석'이 '베드로'라손 치더라도 이 예수님의 말씀 그 어디에도 지금 천주교가 주장하는 '교황의 교회 지배권'이라는 개념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반석'이 가리키는 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의 문맥과 연결해 볼 때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15절과 16절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 말씀 직후에 연이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반석'은 '베드로의 인격'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네가 지금 막 고백한 신앙은 반석과 같이 확실한 것이다. 내가 바로 그 반석 같이 확고부동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두고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며 '본성은 하나님의 독생성자'이심을 믿고 고백할 줄 아는 '개인 신자'를 그냥 흩어놓지 않으셨습니다.
즉 '베드로 너처럼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면 구원은 틀림없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그 신앙만 끝까지 각자 혼자서 지키면서 살다가 나중에 천당에서 다 함께 모이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너와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을 내가 반드시 모아서 나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 그리고 그처럼 교회로 모인 두세 사람이 있는 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앙고백'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로 그야말로 직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약화시키고 오염시키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지독한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개인 신앙'은 그야말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큼 교회를 똑같이 강조해야 하고, 개인 신앙을 바로 지키고 전하기 위해서도 필연적으로 교회가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그 교회의 창립예배를 위해 직접 미국까지 와 주셨는데 그때 제가 '예식서'가 필요하다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예식서란 목사가 집례하는 여러 가지 예배나 예식의 순서와 방법 등을 기록해 놓은 지침서입니다.
그러자 원로목사님께서는 마침 당신께서 쓰시던 예식서를 제게 주고 가셨는데, 그것은 1961년도에 인쇄된 것이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 발행'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 교단 자체의 예식서가 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냥 다른 교단에서 발행한 예식서를 그대로 쓰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입교 서약 문답' 즉 '세례 문답 서약'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세례문답 서약은 잘 아시다시피 4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예식서에는 3개의 문답 항목만 있고 네 번째 항목은 빠져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신앙', '성령의 은혜에 의지한 경건 생활' - 이 세 개의 문답만으로 뚝 끝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 번째 항목 바로 밑의 행간에 눈에 익은 원로목사님의 필체로 만년필로 써 넣은 문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빠졌음 (4)그대들이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그 청결하고 화평함을 이루도록 힘쓰기로 허락하느뇨?"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적어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은 일개의 큰 교단에서 발행하여 사용되고 있던 예식서였으니 거기에 '세례문답 제4항'이 빠져 있던 것은 결코 실수는 아니었습니다.
즉 그 교단에서는 세례식을 할 때에 오직 앞의 세 가지 항목의 서약들만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앞에 나오는 세 가지 문답들은 '개인 신앙'에 관한 것인 반면에 마지막 네 번째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교단에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 신앙'만 확실하면 되지 '교회중심의 생활'까지 서약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서, 원래 장로교의 전통적인 세례서약에는 엄연히 들어 있던 네 번째 서약을 의도적으로 삭제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로목사님께서는 그 빈자리에다 '빠졌음'이라고,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기로' 서약하는 것은 적어도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한 장로교 기독신자'라면 절대로 빼서는 안 되는 필수 서약이라고 친필로 다시 기록해 놓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조차 '교회관'이 얼마나 약해지고 오도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중심으로 살겠다고 서약하는 것은 세례서약에 넣을 필요가 없다. 그런 서약은 개인신앙고백만을 강조해야 하는 세례서약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다른 사람 아닌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사회에서 교수깨나 한다는 장로가 '이 시대의 새로운 교회 개혁자'로 자처하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따위의 망언을 함부로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례 서약은 '입교'를 하기 위한, 즉 문자 그대로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하는 서약인데 거기에서 '교회중심 생활'의 서약을 빼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께서 첫 교회 설립을 선포하실 때부터 명백히 천명하신 대로 '베드로의 개인신앙고백'은 곧 '예수님의 교회 공동체'와 직결되는 것임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권위와 질서'가 엄중히 발동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마태복음 16장 18절 하반절과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18b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한 성도들의 집합체가 바로 '내 교회'라고 정의를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이어서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곧 사람을 영원한 저주 가운데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권세, 죄인을 지옥에 빠뜨리는 권세입니다.
그런 사단의 힘을 이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보다도 더 큰 권세, 더 강력한 권위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위가 바로 '내 교회에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말씀 역시 베드로 한 사람만을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앞에서도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신자들을 베드로 한 사람을 대표로 사용하여 말씀하셨듯이, 이 문장에서의 '베드로' 역시 '전체 교회'를 가리키는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본문 19절 하반절에서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나중에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교회의 치리하는 권세 중에 '권징'을 강조하실 때에는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라고 '너희'라는 복수 즉 '신자의 공동체'를 지칭하신 것을 보아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 열쇠'는 결코 베드로 개인을 통해 이어지는 '교황권'의 상징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휘하는 '공적 치리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치리권 즉 '다스리는 권세'는 결코 목사의 개인적인 교권주의를 위한 것도 아니며 관료주의 혹은 제도주의로써 개인 신자를 억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교회의 공권은 어디까지나 '하늘 보좌의 권세'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릴' 것이라고, 즉 지상교회를 통하여 시행되는 교회의 공적 치리는 곧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며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아까 언급했던 세례문답의 네 번째 항목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그 청결함과 화평함을 유지하기로" 서약하는 것은 바로 이 권세 즉 예수님께서 지상교회에 부여하신 치리권에 순복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서약은 참된 개인 신앙고백을 한 신자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동적인 단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이 마치 개인의 양심적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리고 그래서 이런 기분 나쁜 서약은 빼버려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앞의 세 가지 조항의 신앙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의 권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휘가 됩니까?
세상에서 어떤 권위가 제대로 발휘되고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 권위에 따른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을 집행하는 '조직'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교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법은 바로 '성경 말씀'이며, 그 법에 따라 교회를 이끌어 나감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조직이 바로 '당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통하는 법, 교회 안에서 효력 있는 법은 정말이지 성경 말씀밖에 없습니다.
성경만이 교회의 법전이요 교육자료요 규약이요 비판기준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교회는 따지고 보면 세속적인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외에는 아무 인간적인 소리가 조금도 필요가 없는 곳, 성경 말씀에 어긋나는 원리나 주장은 아예 꺼낼 수도 없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장로교 헌법에서 목사의 책임 중에 이런 항목이 있습니다.
"목사가 종교 신문이나 문서 사업에 관한 사무를 보는 경우에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유익하도록 힘쓸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언론의 자유가 생명처럼 여겨지는 언론계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목사는 어디까지나 '교회에 덕을 세우고 복음에 유익한' 언론 활동만을 하도록 제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론의 자유란 것이 성경의 법까지 도전하거나 이의를 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 신문이나 문서 사업'에 종사하는 기관 목사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매주일 강단을 지키며 설교하는 목회 목사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생각에 '모든 교인에게 언론의 자유가 완벽하게 주어진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될 것 같습니까?
그처럼 철저히 '민주적인' 교회에 가면 거기서 아주 은혜로운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만일 그런 교회가 있다면 문자 그대로 '바람 잘 날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내 생각, 나의 아이디어, 나의 교회관'이란 백이면 백 다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인데, 그 모든 의견들을 다 존중하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언권들을 다 존중해 준다면 교회는 오로지 '시끄러운 장터'요 '산으로 올라가는 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언론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 준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처럼 무질서한 난장판으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경향교회가 비성경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당장 목사 사면을 낼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경향교회가 비민주적이다'라는 비판이 있다면, 적어도 그런 소리에 대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비판 자체가 이미 기본적으로 잘못된 교회관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정치가 가장 나은 것이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민주정치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다수의 어리석음이 지배하는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되기 쉽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에서는 특히 더 잘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다 선한 존재라면 민주정치가 바른 신앙, 바른 교회로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 악한 존재들입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 악한 것들을 부수고 잘라내고 뜯어 고쳐서 선하게 만들어져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본성이 악한 사람들의 의견이 최고로 존중되는 민주주의 교회란 것이 가게 될 방향이란 결국 어리석은 인본주의적인 방식이 난무하는 '영적 중우정치'가 될 뿐인 것입니다.
바른 교회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교회'라는 미사여구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성경'만을 '교회의 유일한 법'으로 알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 교회의 법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조직이 바로 '당회'입니다.
즉 그 당회의 권위가 곧 교회의 권위로, 그 교회의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곧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연결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신 분이 "그" 즉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런 조직을 만드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천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 조직을 세워도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세가 없으면 교회의 권위나 질서가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각 교인에게도 '유익이 없는' 결과로 낙착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잘 비판할 줄 아는 '지혜나 용기 혹은 정의감'(?)이라는 것이 있는 교인이 집사나 장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장로가 목사의 목회를 감시하고 비판하기 위해 있는 직분이 아닙니다.
집사가 당회의 독재를 막고 적절한 견제를 하기 위해 있는 직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치리권을 행사하는 최고 기관이 당회가 진정 '성경중심'으로만 교회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당연히 '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따라가야 하고, 직분자들은 바로 그런 '성경 중심의 목회를 하는 목사'의 사역을 더 잘 도와주기 위하여 세워진 사람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4, 5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 뽑고 갈아 치우는 세상 국가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라는 부동의 왕이 계시고, 그 영원히 선하게 통치하시는 주권자께서 부여하신 '당회의 치리권'이 작동하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신본주의적 대의민주정치'로 운영되는 곳인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교인들의 의사를 잘 반영해 주는 대표'들이 선출되어서 이끄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교인들을 성경 말씀만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는 권세'만으로 다스려지는 질서 있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남들과 줄 맞추는 것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며 자기 자유를 제한당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줄이 잘 맞추어진 반에 속한 학생이 되는 것은, 줄이 헝클어진 옆 반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자기주장을 펴고 혼자 줄에서 삐뚤게 서 있는 것은 결국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일일 뿐입니다.
똑같은 '예수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순복하는 성도만이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청결함과 화평함'을 지키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기쁨과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새해의 표어인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축복'은 오직 '교회중심'으로 살 때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 교회는 결코 '민주적 교회'가 아니라 '성경 중심의 교회'이며 '인간적인 교권'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만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만일 교회가 '참된 신앙고백'이 없는 이단이거나 '중우정치가 판을 치는 장터' 같은 조직이 되면 그런 교회가 어떻게 그 속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는 '중심'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인 신앙'과 직결된 교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권위와 질서'가 있는 교회입니다.
새해에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우셨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끌고 계시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진정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자신에게는 은혜로운 축복의 삶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에디터 추천기사

트럼프.

트럼프 암살 시도에 대한 美 교계 지도자들 반응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당했다. 이후 미국 전역의 목회자들과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안도를 표하며, 피해자들과 국가를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텍사스주 그레이프바인에 위치한 펠로우…

지구촌교회 2024 중보기도 컨퍼런스

최성은 목사, 지구촌교회 사임

분당 지구촌교회가 홈페이지를 통해 최성은 목사의 사임을 발표했다. 지구촌교회 홈페이지에서는 “최성은 담임목사님께서는 지구촌교회 창립 30주년 기념사역을 잘 마무리하고, 일신상 이유로 지구촌교회 담임 목사직의 사임을 표명하셨다”고 밝혔다. 교회 …

한동대학교 최도성 총장

“기독교 정체성, 절대 양보 못 해… 한동대생은 선교 프론티어”

‘학생 모집 위기’ 타개 위한 제안 정중히 거절 다수 학생들 동참하는 ‘공동체성경읽기’ 진행 기도회, 자정까지 학생 700명 자리 지키기도 “말씀‧기도 계속되는 한, 한동에 미래 있어… 각자 자리서 선교 지경 넓히는 한동인 되길” “학생 모집이 점점 어…

존 칼빈 장 칼뱅

칼빈이 지금 목회한다면, 예배 때 ‘시편 찬송’만 부를까?

3. 바람직한 개혁교회상 1) 개혁주의 신학원리가 적용된 개혁교회 개혁주의, 이성 한계 극복 신학 5백 년 걸쳐 형성된 거대한 체계 잘못 발견되면 언제나 수정 자세 이론·지식 넘어 삶으로 드러내야 설교만 개혁주의 신학 기초하고, 예배와 성례, 직분은 복음…

생명트럭 전국 누빈다

‘낙태 브이로그’ 참극 반복되지 않도록… ‘생명트럭’ 전국 누빈다

최근 ‘임신 9개월 낙태 브이로그’가 전 국민에게 충격을 준 가운데, 태아의 죽음을 막기 위한 ‘생명트럭’이 전국을 누빈다. 생명운동연합이 주최하고 주사랑공동체,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프로라이프, 에스더기도운동, 성선생명윤리연구소, 아름다운피켓, …

탈북민 북한이탈주민 의 날

윤석열 대통령 “북한 동포, 한 분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

윤석열 정부에서 기념일 제정 자유 향한 용기에 경의, 탈북민 행복이 통일 앞당길 것 강조 정착·역량·화합, 3가지 약속 ‘제1회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의 날 기념식’이 7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영빈관에서 윤석열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