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지일 목사가 강연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역사와의 대화’를 주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박물관이 주최한 ‘방지일 증경총회장과의 만남’이 최근 네번째 만남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백수를 지나 올해 101세를 맞은 ‘한국교회의 산 증인’ 방지일 목사는 90여분간 꼿꼿이 서서 30여명의 후학들에게 ‘그때 그시절’ 이야기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평안도 사투리로 들려줬다. 교수진 다수가 포함된 참석자들은 방 목사가 입장할 때 전원 기립해 그를 맞았다.

방 목사는 지난달 11일 ‘평양신학교 교수들의 자질과 일화들’, 18일 ‘학생들의 형체(면모)’, 11월 1일 ‘행정상의 과정’에 이어 마지막 시간인 15일에는 ‘교회 발전상의 한 현상’에 대해 말했다.

방 목사는 최근 사진집 <중국 선교를 회고하며(홍성사)>를 펴내기도 했는데, 일제 식민지였던 당시 선교사를 파송한 것에 대해 그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주님 말씀에 따라 총회가 결의한 것”이라며 “하지만 구체적인 경위나 내용들이 총회 보고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방 목사는 “중국 선교를 21년간 하고 돌아오니 우리와 기장, 고려파가 각각 분리돼 있더라”며 “1957년 귀국 후에는 곧 합동과도 갈라지게 됐다”고 분열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장과의 분립 당시 송창근 목사가 있었으면 한경직-김재준 목사가 그렇게 갈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방지일 목사는 “내가 사역하던 때가 신비주의가 가장 흥할 때였다”며 이용도 목사 등과의 일화를 꺼냈다. ⓒ이대웅 기자
방지일 목사는 또 “합동과 분립 당시 우리 노회에게 ‘갈릴 이유가 없으니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말자’고 3년간 중립을 지키면서 다시 합치도록 노력했었다”며 “3천만원 때문이었다는 말도 나오지만, 박형룡 목사 비서가 내 동창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방 목사는 “바울과 바나바도 나중에 갈라져서 더 발전했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며 “그런 아픔이 있어도 전도는 되니 감사하지 않아?”하고 반문했다.

그는 “그때는 물론 합동·통합이라는 말도 없었다”며 “합동과 통합은 별 차이가 없는 말인데, 당시 승동측은 고려파와 합치겠다고 해서 ‘합동’이 됐고, 연동측은 당시 호남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합동측으로 갔다가 돌아와 ‘통합’했다고 해서 이름이 그리 지어졌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알렌이 의사로 왔는지 선교사로 왔는지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선교사’라고 답변했다. 방 목사는 “총회장을 할 때 미국 오하이오주의 알렌 선교사 관련 지역을 방문했는데, 알렌을 선교사로 파송했다고 말하더라”며 “기독교 선교 100주년 대회 때 감리교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1984-1985년 2년간 대회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방 목사는 “신앙생활에서 신비주의적인 면이 없을 순 없지만, 자기 제어가 필요하다”며 “특히 성경을 풀 때 내 생각이나 경험이 들어가서는 안 되고, 자신을 완전히 버리신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설교는 불교의 ‘설법’에서 나온 말이고 각성도 불교용어인데, 다 머리로 깨닫는다는 뜻”이라며 “종교라는 것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간증에 대해서도 “요즘 탤런트들 불러다 간증 시켜서 사람들 모으는데,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간증은 자기 자랑일 뿐, 전도라 할 수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