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악령>, 인간에게 진정한 신앙이 가능한가?

도스또옙스끼는 인성에 통달한 작가였다. 특히 선과 악에 대한 인간 본성을 통찰함에 있어 나름대로 분명한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인간은 어떤 경우든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규범을 양심 속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규범이란 인간이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가치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무신론 사상은 결국 그 국민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도덕적 악과 정치적 허무주의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흥분한 주인공의 입을 빌어 “나는 악당이지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소리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의식의 갈등으로 인한 혼돈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보여준다.

이같은 갈등 구조 속에서 도스또옙스끼가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은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신앙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독자들은 작품을 읽어가면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작품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어느 인물도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주지 아니한다. <악령>이 난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악령>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진정한 신앙의 문제’ 에 대하여는 도스또옙스끼 연구가들마다 여러 다른 시각의 해석과 비평을 보여준다. 때론 의견이 엇갈림으로 인해 호평과 악평이 동시에 쏟아지기도 한다. 독자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철학적·문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의 의도는 매우 명료한 것이 아닐까한다. 그가 주장한 진리,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서 얻어지는 최고의 가치, 그 힘, 그 어떤 사상을 인간이 지니고 있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조직의 도구로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리가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떤 목적에 이용당할 때 엄청난 악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민족의 정신을 오래 동안 지배해 온 공자나 석가의 가르침이 정치체제의 이데올로기로서 그 발언권을 주장하게 되었을 때 많은 악이 저질러졌다. 그에 따른 혼란, 타락, 그리고 참상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잘 알고 있다. 그러하니 진리를 진리로 존재하게 하는 신앙은 말 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도스또옙스끼가 무엇보다도 무신론에 입각한 러시아혁명을 두려워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혁명이라는 이름 하에 저질러질 가공할 악에 대해 전율적인 공포를 느낀 것 이다. 그의 작품은 진리가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특히 정치적 도구로 절대로 이용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우리는 그의 작품에 나타난 기독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평화의 복음인 기독교의 진리가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내가 젊은 날 <악령>에서 얻은 영혼의 울림이었다.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시키기를 원한다면 성서의 진리를 진리 자체로 두어 지혜와 광휘를 지니도록 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자주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건 아닌지, 때론 신학이론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교회 조직의 단결을 위한 방편으로, 아니면 정치적 힘을 위해 또는 식자들의 유토피아 사상을 끌고 가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면 그 결과는 역시 악이며 타락일 것이다.

그러하니 “인간에게 진정한 신앙이 가능한가”를 도스또옙스끼의 독자들은 오늘도 자신에게 되묻고 있다. 그리고 또 많은 독자들이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서의 진리를 진리 자체로 두어 지혜와 광휘를 지니도록 도와달라”고 침묵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