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할렐루야~ 한번 이 신앙고백을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형통합니다.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과 도움을 베푸시고 희망을 주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어떠한 분이실까요? 성령께서는 하나님 삼위일체의 제 3위 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성령께 잘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론>

1. 신약성경에 나타나신 성령님

첫째로, 신약성경에 나타나신 성령을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다른 보혜사라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소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마지막 남긴 말씀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나므로 근심이 꽉 들어찼을 때 주님께서 그 위로의 말씀으로 하신 말씀 중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 그 말은 나는 처음 보혜사인데 또 다른 보혜사를 너에게 보내 주겠다. 절대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내가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너에게 다시 오겠다. 그리고 그 보혜사 다른 보혜사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고 너희 속에 계시겠다.

어떤 자매님이 신앙상담을 와서 제게 말씀하기를 “목사님, 기도를 하면 내 깊은 속에서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게 뭡니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면 바깥에서 이야기 하는데 목사님 이야기 하셔도 바깥에서 이야기하고 귀로 듣는데 무슨 음성이 깊은 내 속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골반암을 앓고 있었는데 병원에서는 다리를 잘라야 된다고 말을 하는데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도와달라고 하니까 깊은 영혼의 속에서 너의 골반은 암에서 나았다. 그 깊은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 몸이 점점 낫기 시작해서 암이 완전히 떠나고 깨끗이 나았는데 그 음성이 무슨 음성인지 모른다고 하셔서 그게 바로 성령님의 음성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속에 영혼 속에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보다 더 깊은 곳이 영입니다. 영 속에 거하시는 분이 성령인 것입니다. 이 분은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할 때 헬라어로써는 다르다는 말이 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로스(?λλο?)라는 말이고 하나는 헤테로스(?τερο?)라는 말인데 주님께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실 때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라고 하셨습니다. 알로스란 무엇이냐. 똑같은 둘 중에 하나를 알로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첫째 것이고 이것은 둘째 것인데 둘이 똑같다. 바꿔도 똑같고 돌려도 같고 그때는 알로스를 씁니다. 그런데 영 다른 것은 너와 나와는 영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영 다른 것은 헤테로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 다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헤테로스 파라클레토스를 보내겠다고 했으면 아이 절단입니다. 우리는 다른 보혜사인 영 다른 보혜사를 보내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알로스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셨으니 알로스는 나와 똑같은 분이다. 나와 바꿔 놓아도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분별 못할 정도로 똑같은 보혜사를 보낸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예수님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 라는 말은 영어로는 카운슬러고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의미는 무엇이냐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함께 계시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 이틀 돕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그날부터 천당가는 날까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서 도와주시는 분을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합니다.

보혜사의 역할은 제일 먼저가 돕는 자이고 우리를 도와주셔서 봉사와 전도의 능력을 갖게 하시고 그 다음이 교사, 가르치는 역사를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다음은 위로자, 기쁨, 평안, 용기를 주고 위로해 주시는 역사를 하는 분이고 그 다음에는 대언자,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주는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에는 상담자, 문제 해결을 해주시는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가 오셔서 우리가 보혜사에게 의지하면 도와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상담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 같이 꼭 인격을 가지고 계세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보혜사 성령께서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 사정을 환히 아신다.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 사정을 확 알 수밖에 없지요. 감정은 에베소서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감정이 있으니까 희노애락이 있지 않습니까? 근심을 하는 것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가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님 뜻대로 우리 뜻대로 아니라 성령님 뜻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을 택해서 선교사로 보낼 때라도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해서 택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택해서 세우신 것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면 몸이 있든지 없든지 인격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이라고 말하면 사지백체를 가진 육체를 가져야 인격인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육체가 없어도 인격자인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므로 성령을 기계처럼 대접하면 안됩니다. 물체로 대접하면 안됩니다. 인격이 없는 동물처럼 대접하면 안됩니다. 고상한 인격을 가진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손님이 오면 손님을 귀하게 대접하지 않습니까? 아주 고귀한 손님은 아주 고귀하게 대접을 합니다. 뭐 중간쯤 되는 사람은 중간쯤 친구는 야자하고 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인격자이기 때문에 인정을 해야 되고 환영을 해야 되고 모셔드려야 되고 또 필요하면 도움을 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아무리 우리와 같이 계셔도 우리가 무시해 버리면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시하지 말고 항상 성령님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드립니다. 의지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성령님이 도움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습관적으로 하나님 사업을 하러 나갈 때 성령님 함께 갑시다. 꼭 그 말을 합니다. The holy spirit let's go! 함께 갑시다.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성령님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이 오시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단에 서서 말씀할 때와 자리에 돌아가서 앉을 때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리에 앉을 때는 완전히 인간적인 조용기입니다. 내가 봐도 힘도 없고 약하고 몸도 허약하고 그런데 강단에 서면 성령께서 쫙 오시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가 저를 보아도 다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내 음성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증거하면서 성령님 도우심을 구합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병자 위해 기도하고 난 다음에 병 나은 사람 어떤 사람이 병이 나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게 편지를 내기를 목사님 다음 주일 설교할 때 요병이 나았다고 말을 하십시오. 그것 내가 고치는 것처럼 요병이 나았다. 저 병이 나았다는 것을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 병 나은 것을 말하는 것은 그때그때 성령께서 레마를 주셔서 말씀하게 하고 또 왜 말씀하는 것이 필요하냐 하면은 성도들이 마음에 믿음이 있어도 막연한 믿음인데 말씀을 들으면 그것을 접촉점으로 해서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풀어놓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요. 믿음은 늘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풀어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딱 심장병이 나았다. 나보고 하는 말이다. 믿습니다. 믿음을 풀어 놓거든요. 그러므로 말을 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하기 전에 성령님께 부탁하고 기도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했다가는 큰일나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성령님과 함께 목회를 해야 도움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님을 바람이나 생수나 비둘기나 불이나 기름으로 비유를 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비인격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비유를 쓰는 것은 성령의 성격을 우리에게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사물을 가지고 비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와서 계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잖아요. 바람은 또 다른 말로 말하면 공기인데 여러분 공기가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을 우리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없으면 숨쉬지 못하고 죽잖아요. 한번 숨 한번 쉬어볼까요? 하나, 둘, 셋! 휴~ 숨쉬었지요? 바로 그 바람이 성령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프뉴마토스라고 말합니다. 프뉴마토스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구만리장천 멀리 계신 이도 아니시고 저 태평양 건너 계신 분도 아니시고 바람이 와 있는 것처럼 우리와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막을 수가 없어요. 휴전선도 성령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의 능력이 북한으로 들어가서 북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운행하게 하는 것 군대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 그러므로 성령을 바람으로 표시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요 3:8)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을 생수로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로 39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름철 아주 목마른 날에 찬 냉수 한컵 마시면 속이 시원합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혼돈할 때 화가 날 때 생수 한컵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아요. 기침이 나고 목이 칼칼할 때도 물 한잔 마시면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답답한 마음, 복잡한 마음, 어두운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시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생수로 비유한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압력을 받고 고통을 당해도 성령의 생수를 마시면 성령이 우리 마음을 상쾌하게 해서 우리 속에서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을 또 비둘기 같이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2절에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비둘기라고 말하면 여러분 어떤 이미지가 생깁니까? 부드럽고 온유하다. 매라고 말하면 어떻게 이미지를 가집니까? 사납다. 다른 날짐승을 잡아 죽인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비둘기는 죽이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주 온유하고 부드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마음 속에 부드러움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갖다 주는 것이지 미워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죽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말로써 이웃을 죽이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성령이 역사할 때 그렇게 하지 않고 마귀가 오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비둘기로 표시한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3장 11절에는 불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침례라는 것은 푹 잠기는 것을 말하는데 성령의 불에 잠긴다는 것은 세속을 태운다는 것입니다. 죄와 마귀와 세상을 태워서 깨끗하게 만든다. 소독 중에 제일 좋은 소독이 불로 태우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불로 태워서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또 새로운 물건을 만들 때 모두다 불로써 녹여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지 불이 없이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지 못합니다. 성령의 불이 와서 우리를 새로운 하늘나라 제품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불이 와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우리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안됩니다. 변화는 성령의 능력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기름부으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기름부음이라는 것은 옛날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선택을 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도 기름 부어서 왕으로 만드시고 또 기름 부어서 선지자로 만드시고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는 사람은 기름을 부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격이심으로 거역하지 말고 소멸하지 말며, 슬프게 하지 말며, 훼방치 말아야 된다.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의 음성이 자꾸 들리는 것도 자꾸 반대하고 반대하면은 성령이 소멸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자꾸 슬프게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지 못합니다. 성령을 내가 거역했는지 소멸했는지 슬프게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의 느낌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을 때 마음이 굉장히 슬퍼지고 굉장히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31절로 32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이 삐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쉽게 표현하면 한 가정에서 어머니와 같습니다. 아버지하고 여간 마음이 상해도 어머니가 중간에 서서 잘 설득을 하면 쉽게 아버지하고 다시 화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하고 마음이 상해 놓으면 어머니가 남편에게 속닥속닥 해서 자꾸 거부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남편도 별도리 없이 그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해 놓으면 도저히 화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마음 상한 것은 어머니에게 아양을 떨면 문제가 해결되는데 어머니에게 마음에 상처를 줘놓으면 누구에게 아양을 떨 사람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을 절대로 우리가 훼방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부탁한 것이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 그리고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 이 세상에 사함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사함 못 받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과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이 하시는 일

둘째로, 우리는 성령님이 무엇을 직접적으로 하시는지 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주된 일은 회개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회개하려고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면 회개가 안돼요. 그러나 마음이 성령으로 역사하면 회개가 돼요.

1906년에 평양 교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부흥이 일어난 이유는 부흥회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감동을 안받아가지고서 아주 냉랭해요. 그 장대현교회는 평양에서 제일 큰 교회인데 아무리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불러서 냉랭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장로님 길선주 장로님이 일어나셔서 내가 여러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다 놀래서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내 친구가 죽었을 때 나에게 부탁하기를 내 재산을 잘 정리해서 내 아내에게 전달해주고 내가 없는 내 아내를 네가 내 친구니까 좀 잘 돌보아주라고 부탁을 하고 세상을 떴어요.

그러니까 친구의 재산 문서와 도장을 다 자기가 받았습니다. 친구를 장례지내고 난 다음에 친구의 아내를 위해서 재산을 정리하면서 그 중에 얼마를 떼먹어 버렸어요. 얼마를 포켓트에 넣어 버리고 나머지를 이 전부라고 해서 그 부인에게 전달해 주고 있었는데 그 부흥회때 다른 사람은 아무 감동을 안받았는데 길선주 장로만은 마음 속에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성령께서 야 이 도둑놈아, 네가 장로냐? 너의 친구 부인의 돈을 떼먹고도 떳떳한 얼굴로 앉아있는 네가 장로냐? 야 이 도둑놈아.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서 성도들 앞에 나와서 나는 나쁜 놈입니다. 나는 도둑놈입니다. 친구의 아내의 돈을 훔쳐 먹은 놈입니다. 나는 그 돈을 오늘 당장 다 돌려 드리겠습니다. 회개하자 그것을 동기로 해서 성령이 바람처럼 불어와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슴을 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하기 시작해서 이 부흥운동이 온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우리 한국에 큰 부흥의 역사가 시작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부흥의 역사도 성령께서 역사하는데 성령이 우리를 회개시키고 또 회개를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하지요.

성경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 하니까 바욘아 시몬아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로서 알려주셨다. 아버지가 성령을 보내셔서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주신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주이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 모두다 성령이 여러분 마음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문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로 11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이 오시면 회개를 시키고 깨닫게 하는데 먼저 죄에 대하여 주님이 성령께서 꾸짖을 것이라 한 것입니다. 왜, 죄란 뭐가 가장 무서운 죄냐 예수 안믿는 죄가 최고의 무서운 죄입니다. 지옥가는 죄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신 것을 믿지 않는 죄가 가장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구원받고 난 다음에 죄를 안짓는 사람이 없이 죄를 짓지요. 그것은 하나님께 매를 맞고 꾸중을 들을수는 있어도 지옥은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미 예수를 믿게 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일생 예수님이 믿음으로 청산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죄가 안 믿는 죄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으므로 그를 꾸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 아들이냐.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냐. 의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죄가 한번도 안지은 상태를 말하고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데 정말 예수님은 의인이냐.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므로 의심할 수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가 없는 의인인 것을 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해서 승천하므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무덤에 들어갔으나 죄를 다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부활해서 승천한 것입니다. 죄를 다 못갚았으면 아직도 주님이 지옥에 갇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다 갚았기 때문에 옥에서 나와서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셨으므로 완전한 구주가 되신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 의인이요 우리를 영원히 죄에서 구속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받았다. 마귀가 이미 심판 받았다. 마귀는 예수님이 죽으셨다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마귀의 능력을 빼앗겼습니다. 죄를 짓게 하는 능력, 우리를 더러운 생활을 하는 나쁜 습관을 묶는 능력, 병들게 하는 능력, 저주와 가난에 허덕이게 하는 능력, 사망과 음부로 끌고 내려가는 그 능력을 마귀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도구인 죄를 빼앗아 버렸고 불결을 빼앗아 버렸고 병을 빼앗아 버렸고 저주를 빼앗아 버렸고 사망의 권세를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 권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멸망시켜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청산되었습니다. 불의가 청산되었습니다. 질병이 청산되었습니다. 저주가 청산되었습니다. 사망과 음부가 청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기고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으며 거룩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으며 치료받은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병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내 이 병을 고쳐 주옵소서. 고쳐 주옵소서만 하지 마십시오. 병은 이미 2천 전에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고침 받은 병을 지금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실제로는 2천년전에 이미 마귀에게 병의 권세를 주님 빼앗아 고쳐 버린 것입니다. 그 권리를 지금 내게 행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위가 나쁘면 하나님 나은 이 위병을 지금 고쳐 주시옵소서. 암이 걸렸으면 하나님, 이미 고쳐주신 암을 지금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얼마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미 나은 것을 달라고 하는데.. 이미 우리 주님이 돈 다 지불해 놓은 것을 그 상품을 달라고 하는 것인데 얼마나 당당한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저주는 예수님이 이미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가난도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2천년전에 청산해 버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주님이 2천년전에 멸한 것입니다.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으로 영생복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귀가 큰소리하고 돌아다녀도 이것은 모든 능력을 빼앗긴 거짓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합법적으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협박하고 공갈하고 속여서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이 진리를 알면 마귀가 가져오는 것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면 되는 것입니다. 물러가라! 세례 요한부터 천국은 지금까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말했는데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알고 침노해 들어가면 빼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귀가 속여서 잡고 있는 모든 은혜를 빼앗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로써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생복락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임금노릇 못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종노릇하지 여러분처럼 깨달은 사람은 단호하게 물리치고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와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의로운 하나님이 되신 것을 알게 하시고 마귀가 심판받은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께 대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다른 보혜사이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오셔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성령님은 내가 성령이다. 내말 들으라.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항상 예수님을 여러분 깨닫게 하시고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예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이 당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요사이 이단사설의 두목들이 하는 말이 자기가 특별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기가 보혜사다. 자기를 자꾸 내세웁니다. 여러분 이것은 전부 사기꾼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만 내세우지 다른 것은 일체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하는 것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사설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자기 자랑하는 자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어떻게 자기가 보혜사가 되며 어떻게 자기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며 어떻게 재림주가 되는 것입니까? 다 가짜들이 거짓말합니다. 마귀가 발버둥치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예비해 놓은 것이 용서와 성결과 치료와 축복과 영생복락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플러스해서 주님께서 성경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얼마나 많은 은혜를 예비해 놓으셨습니까? 그러나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를 못하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검은 것은 글이요 흰 것은 종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나는 어느 가정을 아는데 그 남편이 대학교수입니다. 아내도 애들도 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잘 믿는데 남편도 부인의 설득에 의해서 교회 따라와서 설교를 듣고 집에 와서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데 성경을 펼쳐 놓으면 아무것도 안보여요. 다른 책은 좔좔 잘 읽는데 신문도 잘 읽는데 성경은 펼쳐 놓으면 못 읽어요. 그럴 리가 있느냐. 내가 직접 시험해 봤습니다. 그 집에 가서... 내 앞에서 성경 읽으라니까 대학교수인데 성경은 어또~ 에또~ 못 읽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신문을 보고서 이 신문 한번 읽어 보라고 하니까 좔좔좔 잘 읽습니다. 자기도 그래요. 나는 성경만 펼치면 눈이 캄캄해지고 안보입니다.

그것 왜 그러느냐? 마귀가 그 눈을 어둡게 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해서 기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성령이 도와달라고 하고 난 다음 그 다음 성경 읽으려니까 눈을 부비더니만 이제 잘 보이네? 그러면서 줄줄줄 잘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리를 깨달아 알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면 성령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함을 증거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주님의 역사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왔다고 해서 늘 부정적인 말만 하고 탄식하고 좌절하고 우울하고 절망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축복으로 채우기 위해서 오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아야 돼요. 먼저 깨닫고 꿈꾸고 믿고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물론 우리에게 오면은 하나님의 은사를 주시지요. 크고 적은 은사를 주시는데 가장 처음 주시는 것은 아홉가지 성령의 은사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그만한 지혜를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 은사, 방언통역, 예언의 은사, 능력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를 주님께서 주셔서 우리 가운데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말씀이 임하여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지혜의 은사를 받아서 만사형통하고 모든 것을 다 안다. 거짓말입니다. 바보에게 지혜로운 말 한마디를 그때 탁 주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게 지혜의 은사입니다. 그것 해결하고 난 다음에 필요없는데 항상 지혜롭지 않습니다. 그럼 다 천재 되라구요? 아~ 나는 지식의 은사를 받아서 모든 것을 안다. 알기는 뭘 알아요?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그러나 꼭 내가 필요할 때 지식의 은사가 옵니다. 여름에는 병나은 사람, 오늘 폐병이 나았다. 암이 나았다. 절름발이가 나았다. 그때 그 사항을 깨닫게 해주셔서 그것을 써먹고 나면은 그 다음 다른 것은 모릅니다. 말씀은 지혜의 필요한 그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말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하늘나라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우리가 늘 간구해야 될 것입니다. 은사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은사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이 그 은사를 주셔서 그 사람을 통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얼마나 좋은 은사입니까? 이 은사는 우리 사람 힘으로 흉내를 내지 못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 속에 열매를 맺게 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성령께 간구해서 우리가 열매 맺도록 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내 마음대로 됩니까? 기뻐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 화평한 마음이 왜 내마음이 됩니까? 오래 참는 것도 성령이 주셔야 마음에 오래 참지. 오래 못참지 않습니까? 아주 양선한 심령, 온유한 심령 하나님 성령께서 와서 비둘기 같은 마음을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 우리에게 이러한 인격적인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같이 계시면 이러한 인격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그 인격이 형성되고 또 성령이 와 계시면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가 여기저기 나타나고 방언, 방언통역, 예언의 은사도 나타나고 기적의 은사, 신유의 은사, 능력의 은사가 나타나서 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구나.

안믿는 사람이 와서도 야, 여기 특별하다. 하나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구나.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야고보는 1장 17절에 말한 것입니다. 은사도 성령께서 주시고 열매도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서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안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체험

셋째로, 우리가 성령의 체험에 대해서 좀 알아 보십시다.

성령은 어떠한 단계로 체험해야 되느냐. 성령은 중생의 영으로써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체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루 집에 계시는데 밤에 어두운데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 중에 선생이 찾아왔어요. 사람들이 볼까 싶어서 숨어서 봤습니다. 그때 바리새인 중에 선생이 예수님이 찾아왔다면 완전히 개망신 당합니다. 몰래 찾아온 것 보니 굉장히 기특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주여, 주님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하는 일을 아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두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깜짝 놀랬습니다. 노인으로 머리도 하얗게 되고 수염도 길게 늘어뜨린 그 영감이 아니 어떻게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나같이 늙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하는 말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물이란 회개를 말하고 회개하면 성령이 와서 역사해서 새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중에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떻게 거듭나느냐. 내가 십자가에 모세가 뱀을 매단 것처럼 매달려서 너희를 대신해서 죽고 피를 흘리므로 나를 믿으면 성령이 와서 너를 거듭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 믿으시지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주셨으며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이 여러분을 성전삼고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의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체험인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체험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 세례의 체험, 성령충만의 체험 혹은 성령침례의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합심으로 기도할 때 오순절날이 이르매 성령이 임하시므로 각 사람 머리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 같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더라고 말한 것인데 성령 세례 혹은 성령 충만이라고 말하는데 그 증거는 방언입니다. 믿을 때 이미 성령이 와 계시지만 이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해지는 것과 그냥 와 계시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 증거로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언 말 안했으니 성령이 안계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바람같이 와 계시지만 성령이 충만한 것은 그 표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 말할 때 성령이 나와 같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별로 그것이 필요없지만 저같이 외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수만, 수십만 군중이 모였는데 내가 굉장히 피곤하고 고달프고 마음에 기운이 쫙 빠졌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내가 그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합니까? 아주 위급한 상태에 도달합니다. 설교시간은 다가오고 내 마음은 답답하고 그때 엎드려 기도할 때 방언이 나오면 성령이 같이 계시는구나. 그러면 용감하게 나갈 수가 있다. 나는 못해도 성령은 하신다. 나는 무능해도 성령은 능력을 나타내신다. 나는 약해도 성령은 강하다.

그러므로 성령께 의지하므로 용기를 내어서 나가서 말씀을 증거하고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그때 방언을 말하지 아니하면 아이구 나는 버림 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나는 아무 힘도 없다. 나는 무능하다. 그래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강단에 나간다면 그 많은 사람 대중들 앞에서 힘없이 설교하고 맥 빠진 설교하고 낭패에 처할 것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계신 증거가 방언을 말하면 믿기 때문에 참 방언이 도움이 많이 돼요.

어떤 때는 제게 안수기도 받으러 왔는데 병이 심해서 왔습니다. 내 마음에 의심이 탁 들어와요. 이분 기도한다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느냐. 그때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그 자리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아~ 성령이 계시구나. 나는 못해도 성령이 하시지요? 그러므로 성령님 함께 갑시다. 그렇게 기도하면 용감하게 힘을 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자꾸 인심 조속변으로 변해요. 요동치고 높았다가 낮았다가 힘이 있었다가 약해졌다가 변하지만 성령이 계신 것을 믿으면 항상 성령이 좋을 때는 좋고 안좋을 때는 좋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능력있는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 하시는 것은 여러분에게 안식과 상쾌함을 주십니다.

이사야 28장 11절로 12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오늘날 세상은 곤비한 세상입니다. 생존경쟁이 너무나 심하고 삶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마다 곤비합니다. 답답합니다. 슬픕니다. 우울합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을 상쾌하게 생명이 넘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떨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면은 마음 속에 곤비한 마음이 사라지고 휴식이 다가오고 안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종도 갈멜산 이후에 너무 마음이 곤비해지고 피곤해지니까 낙심해서 광야로 나가서 로뎀나무 밑에 드러누워 하나님 이제 충분하니 나의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곤비해지면 힘이 없게 돼요. 기진맥진 돼요. 그럴 때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방언으로 기도하시면 안식이 들어오고 상쾌함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상쾌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 사람은 마음이 상쾌하고 안식을 얻기 위해서 뭐합니까? 한잔 들이키잖아요. 그래서 소주가 그렇게 많이 팔리고 맥주가 그렇게 많이 팔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나라 소주, 하늘나라 맥주가 있습니다. 방언인 것입니다. 방언을 하면 시원하고 안식이 오고 상쾌함이 다가오기 때문에 방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언하는 사람은 방언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이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늘 방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로 27절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저보고 계속 기도해 달라는 편지가 많이 옵니다. 가정에 우환이 있어서 병이 들어서 급한 일로 수술을 해야 되므로 목사님 대속기도해 주십시오. 인간의 대속이 무슨 큰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위대한 대속의 기도는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시는데 어떻게 하느냐. 말할 수 없는 탄식 즉, 방언으로 기도해 주시므로 대속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를 하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하나님이 들어 주실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하는 사람이 방언기도 안하는 사람보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것이 20배, 30배 나아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역사를 방언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말세에 성령이 오시면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꿈과 환상을 우리 마음 속에 심어 주어서 내일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떠나가시면 희망과 꿈이 없습니다. 율법주의요, 종교주의요, 의식주의자가 되면 그것은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이 있는 교회는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넘치기 위해서 꿈과 환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꿈이 있고 환상이 있으면 성령이 와 계신 것입니다. 꿈도 없고 환상도 없으면 성령이 떠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께서 성령을 모셔드리면 성령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반드시는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구약 4,000년은 아버지 하나님 시대요, 신약 33년은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시대요, 그 다음 이후에 오순절 이후에 교회 시대는 성령님의 시대인 것입니다. 구약 4천년 동안은 아버지가 정면에 나서고 예수님과 성령은 뒤에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사자로 역사했는데 신약 33년 동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정면에 나오고 아버지와 성령은 예수님 백그라운드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오순절 이후는 지금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서 역사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모르고는 교회시대에 올바른 신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배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충만한 것은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없으면 이 곤비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가 없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마귀에 대해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이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전면에 나타나시고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님 뒤에서 역사하는 때에 살고 있어서 성령님과의 관계와 교통이 신앙생활에 활발하게 이루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환영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모셔 드리면 아멘 하십시다. 감사하면 아멘 하십시다.

/ 2011. 7. 24.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