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시리즈는 올 7월에 개봉한‘죽음의 성물 2부’를 마지막으로 11년간 지속되어 온 시리즈의 종지부를 찍었다. 작품이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조엔 롤링이 출간한 소설은 67개국 언어로 번역돼 2011년 현재 4억 5천만부 이상 팔렸고, 영화를 제작한 워너브러더스사가 벌어들인 흥행수익은 6조원에 달한다. 성공적인 OSMU(원소스 멀티유스) 콘텐츠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된 ‘해리포터’는 책과 영화 이외에도 게임 및 캐릭터 상품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전 세계인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 초대박 흥행작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성경에서 금기시하는 마법을 미화하고, 흑마술의 어두운 세계가 세세히 묘사되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도 시리즈가 전체 관람가여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비교적 어린이 취향의 밝은 분위기인 1편과 2편에도 악당의 얼굴이 돌이 되어 부서진다든가, 바실리스크를 칼로 관통하여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어린이에게는 과한 폭력적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성물 1부’에서는 해리와 헤르미온느의 선정적인 키스신도 등장한다(이 시리즈가 더 이상 아이들이 보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영화의 개봉일이 크리스마스 시즌에서 여름시즌으로 옮겨진 것을 봐도 자명하다).

이와는 반대로 ‘해리포터’가 기독교적으로 유용하다는 주장은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2010년에 출간된 ‘어, 해리포터에도 예수님이?’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의 저자 코니 닐은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눈으로 해리포터 시리즈와 성경에 대해서 재인식하게 되는 ‘복음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전한다. 아기 해리포터가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어머니 릴리의 희생 때문이고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낸다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이렇듯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편에 걸쳐 기독교적인 색채, 그리고 또 비기독교적인 이미지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코니 닐이 책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해리포터 시리즈에 부분적으로 나타난 한 이미지에만 집중하고, 그것이 시리즈 전체를 대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과연 작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죽음의 성물 2부‘는 해리포터와 볼드모트의 최후의 전투를 그리고 있다. 어머니 릴리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은 해리는 선한 이들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한편으로 악한 이들의 위협과 음모 속에서 성인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온 것이다. 크리스천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나,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는 악의 세상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도 마지막 편 ‘마지막 전쟁’에서 아마겟돈 전투를 은유적으로 그린다. 영화의 후반부, 해리포터가 볼드모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도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볼드모트가 죽은 해리를 데리고 호그와트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외치는 모습에서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악이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믿는 이에게 시련이 닥치는 마지막 때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C.S 루이스가 지은 ‘사자와 마법사와 옷장’과도 교묘히 연결된다. 그 작품에서는 사자 아슬란이 마녀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다시 부활하여 나니아 세계를 회복한다.

악과의 전투에서 해리포터만이 혼자 싸우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호그와트 동지들이 있다. 볼드모트의 생명과 연결되는 마지막 호크룩스를 파괴하는 것도 만년 조연에 머물던 천덕꾸러기 네빌이었다. 덤블도어 교장이 숨을 거두는 ‘혼혈왕자’편에서는 호그와트 학생들이 함께 지팡이의 불을 밝혀 볼드모트의 어둠의 구름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모든 악과의 싸움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연합하여 함께하는 싸움임을 증명한다. 어쨌든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영화의 카피처럼, 해리포터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7편의 전편을 전부 한데 묶어서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성물 2부’에서 주인공들의 19년 뒤를 굳이 보여주었어야 했는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세 주인공의 활약으로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왔으나 중년이 된 그들에게서는 현실의 피로함과 우울함이 엿보인다. 그냥 20대의 풋풋한 모습으로 시리즈가 마무리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인은수(칼럼니스트, '멀티플렉스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