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호 선교사(선교한국 파트너스 상임위원장)
교회가 세계복음화를 이뤄가는 데 있어서 기독 청년대학생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가 때때로 새롭게 힘을 공급받고 세계 복음화의 추진력을 새롭게 얻은 것은 바로 학생들의 꿈과 헌신 때문이었다. 즉 학생선교운동은 세계복음화가 이뤄지는 데 주요 동력원이 된 것이다.

최초의 학생선교운동은 대학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16세기 중세교회 내에는 갱신운동이 일어나 세계선교를 위한 선교단이 만들어졌다. 1534년 파리대학에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시작한 예수회가 그것이다. 그의 동역자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는 다른 학생들에게 ‘당신의 작은 야망을 버리고 나와 함께 아시아로 가자’라고 도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인도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일본에 가서 교회를 세웠으며 중국으로 갈 길을 모색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상 최대의 선교운동인 예수회와 그 지도자가 파리대학의 기독학생운동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세계선교에 있어서 이러한 청년대학생들의 주도적 역할은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 만들어진 개신교의 세계선교운동에도 그대로 이어져갔다.

독일에서의 개신교 선교의 출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회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선교

종교개혁 후 개신교 선교운동이 실제적으로 시작된 것은 1706년 독일의 할례대학에서였다. 할레대학은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할레대학의 교수이며 교목이었던 어거스트 프랑케는 대학 내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고 그 결과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덴마크의 왕이었던 프레드릭 4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케는 자신의 제자 두 사람인 청년 바르도로뮤 지겐발크와 하인리히 플루트샤를 아시아를 향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인도에 보냈다. 지겐발크는 1714년 잠시 독일로 돌아와 당시 할레대학 안에서 진젠돌프라는 학생이 주도한 ‘겨자씨 모임’(Order of Mustard seed)이라고 불리운 최초의 개신교 학생 선교협의회가 형성될 수 있도록 대학생에게 선교적 도전을 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진젠돌프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공동체에 지도자가 된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예수님 앞에서 개인적 회신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선교의 비전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선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원의 회심을 경험한 자들이 이 영생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열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헌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모라비안운동은 이후에 많은 개신교선교운동에 촉매 역할을 했다. 즉 개신교 최초의 선교운동인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나 모라비안 운동이 바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회심과 구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된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영국의 학생선교운동: 말씀으로부터 출발하는 선교운동

모라비안들은 이후에 많은 개신교 선교운동에 촉매 역할을 했다. 그들은 당시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의 학생이었던 웨슬레 형제로 하여금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 즉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영국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1789년에 캠브리지 대학에 찰스 시므온이라는 청년이 입학한다. 그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 안에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자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 남기로 결심하고 대학교회의 교구목사가 되었다. 그는 대학 안에서 성경 말씀에 근거한 순수한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을 자신의 숙소로 초청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세계를 향한 비전으로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도전했다. 그에게 성경을 배운 학생들은 먼저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주일학교를 열었다. 또 학생 중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 열정을 보인 몇몇 이들을 훈련시켰고 그 중 한 제자는 언어학자가 되어 여러 아시아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시므온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1848년에는 개인기도를 위한 캠브리지 연합이 만들어졌고 9년 후인 1857년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던 데이빗 리빙스턴이 대학을 방문하여 선교에 도전함으로써 캠브리지 선교연합이 만들어졌다.

특히 188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구두수선공 D.L.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한 주일 동안의 집회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던 대학생들이 그의 설교 말씀에 반응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학생들이 개종하였다. 그 중 상당수가 선교에 헌신하게 됐다. 특히 당시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 일곱 명이 선교에 헌신한 것이었다. 그들이 바로 ‘캠브리지 7인’이다. 운동과 사회활동에 있어 리더였던 높은 가문의 일곱 우등생들이 그들 자신을 세계복음화에 드린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을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을 선교에 헌신하도록 동원했고, 그 후 1885년에는 중국선교를 위해 출항했다.

젊은이들이 하나님 성경말씀을 깊이 공부한 결과 그들은 선교에 대한 비전을 보게 된 것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단순한 교리서가 아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축복하시길 원하시는가를 보여준 하나님의 계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 가운데 어떻게 그의 영광을 계시했으며 열방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는가의 기록이다. 그 성경을 공부한 청년대학생들이 선교에 자신을 헌신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미국의 학생선교운동: 기도로부터 출발하는 선교운동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의 출발은 18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들어오기 전에 영적부흥과 회심을 경험한 청년 사무엘 존 밀즈는 매사추세츠 주 월리암스 마을에 있는 윌리암스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즉시 대학의 다른 젊은이들과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대학 옆 들판에서 기도하던 1806년 8월 어느 날, 갑자기 폭풍이 불어와 그들은 건초더미 아래로 피했다. 그들은 그 속에서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리며 기도를 시작했다. 그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비전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아시아와 모슬렘을 향해 나아가라는 비전이었다. 그들 다섯 명은 기도 가운데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다른 대학생들에게 세계복음화에 헌신하게 도전하기 위해 형제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지로 나가기로 결심했을 때, 미국 교회에는 그 어떤 선교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찾아가 교회들 간에 미국 연합선교부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미국 교회 최초의 선교부가 만들어지게 된다. 1812년 드디어 그들 중 세 사람이 인도로 떠나게 됐다. 한편 사무엘 밀즈 자신은 선교사로 나가기보다는 더 많은 선교사를 동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또 그는 미국성서공회를 설립하고 뉴욕 빈민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미국 노예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노예 해방을 돕기 위한 협회를 주도하게 했다. 그는 아프리카를 방문하고 오던 배 안에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었지만, 그가 미국학생선교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기도 가운데 본 하나님의 비전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뤄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선교 비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서다. 학생선교역사는 선교동원이 기도운동과 부흥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로 확장된 자발운동으로서의 선교동원

건초더미 기도회로부터 시작되어 학생들에 의해 설립된 ‘형제단’은 계속적으로 선교자원을 동원해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인도에 선교사로 간 로열 윌더라는 선교사였다. 그는 선교 도중 병을 얻어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턴 대학에 머물게 됐고 그의 아들 로버트 윌더와 딸 그레이스 윌더도 대학을 다니게 됐다. 그들은 프린스턴 대학생들과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모임을 하는 것을 통해 학생들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두 남매는 한 가지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100명의 선교헌신자를 동원하겠다는 비전이었다. 로버트 윌더는 동료학생들에게 다음의 프린스턴 선언문에 서명하도록 도전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세계의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곳으로 갈 의지와 소망이 있음을 선언한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다른 학생을 선교에 동원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들은 D.L. 무디가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1886년 무디를 초청해서 매사추세츠 주 헐몬산에서 한 달간 성경을 공부하는 집회를 가지게 된다. 전국에서 200여 명의 기독학생 리더들이 모였다. 로버트 윌더와 그의 누이 그레이스도 참석했다. 이 둘은 이 모임에서 100여 명의 선교자원자가 나올 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첫 2주 동안은 선교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로버트 윌더와 그레이스는 기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3주쯤 지났을 때 학생들은 선교에 대해 설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강사 중 한 분이었던 피어슨 박사는 ‘모두가 모두에게 가야한다’라고 설교했다. 대회가 계속되면서 학생들은 매일 밤 지속적으로 기도회를 가졌다. 마지막 날에는 99명이 서명하게 됐다. 서명한 99명이 마지막 기도회를 가질 때 또 한 명의 학생이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마침내 100명이 선교에 자발적으로 헌신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바로 하나의 놀라운 운동의 시작이었다. 학생자원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즉 학생들이 스스로 자원에서 선교에 헌신하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 우리 손으로’라는 비전을 가지고 자원해서 선교사로 나갈 것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학생자원자운동은 계속해서 성장했고 매 4년마다 대규모 학생선교집회를 개최하여 더 많은 청년대학생들이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운동은 1930년대까지 지속됐는데, 50년 동안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에 동원됐고 그 중 20,500명의 선교사가 이 운동을 통해 북미에서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즉 학생 스스로 자발적으로 시작된 선교동원 운동은 20세기 초 북미의 선교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생선교동원운동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북미에서 매 3년마다 2만 명씩 모이는 얼바나 학생선교대회는 가장 중요한 선교동원의 통로다. 그러나 이러한 청년선교 운동은 더 이상 서구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2/3(3분의 2 세계)에서 더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이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들 가운데 선교동원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의 기독청년 선교동원

그렇다면 한국에서 기독학생들의 선교동원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선교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이미 역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학생선교운동은 젊은이들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경험할 때,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학생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선교에 대한 관심과 비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패턴은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급속히 성장했고, 교회와 대학 안에서 기독학생들의 모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경공부모임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됐고, 한국교회의 열정적인 기도가 젊은이들 사이에 기도를 통한 부흥을 경험하게 하는 한편, 캠퍼스 전도를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젊음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드리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대학가에서는 민족의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당하고 있었고, 헌신된 기독 젊은이들도 어떻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인가로 고민하게 됐다. 기독학생들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자신을 드리는 일과 더불어 더 큰 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품고 기도하며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겠다는 비전이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눈을 캠퍼스와 자기 자신에서 민족과 세계를 향해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1988년 제1회 선교한국대회가 개최됐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한국의 젊은이들을 선교로 부르시는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1988년 이후 매년 2년마다 계속되고 있는 선교한국대회와 선교동원운동을 통해 하나님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일으키시고 계신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바로 한국교회와 캠퍼스 전도의 부흥, 말씀에 대한 헌신,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세계학생선교운동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미 한국은 세계 제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로 부상했다. 온 세상과 열방을 품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열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가는 선교사로 어떤 사람은 보내는 선교사로 국내외에서 모두들 선교사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하신다. 민족과 열방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민족 가운데 선포되어 마침내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무리들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비전이 성취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길 원하신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부르시고 계신다.

/한철호 선교사(선교한국 파트너스 상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