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분법적 시각에서 남북관계를 다룬 기존 영화들과는 달리, 구조적 악으로 인해 희생되는 젊은이들의 아픔을 조명하는 휴머니즘적 관점을 취했기 때문이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고지전’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프리퀄에 해당된다. 영화는 한국전쟁의 시작에 초점을 두지 않고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났느냐에 관심을 둔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등장했던 남북 젊은이들의 이념을 초월한 교감과 우정도 그려진다.


1953년 2월, 휴전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교착전이 한창인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에서 전사한 중대장의 시신에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된다. 상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적과의 내통과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하고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에게 동부전선으로 가 조사하라는 임무를 내린다.

애록고지로 향한 은표는 그 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친구 김수혁(고수)을 만나게 된다. 전장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려 달라”고 기도만 하던 유약한 학생이었던 수혁은, 2년 사이 이등병에서 중위로 특진해 악어중대의 실질적 리더가 됐다. 그가 함께 하는 악어중대는 명성과 달리 춥다고 북한 군복을 덧입는 모습을 보이고 갓 스무 살 된 어린 청년이 대위로 부대를 이끄는 등 뭔가 미심쩍다.

살아 돌아온 친구, 의심스러운 악어중대,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은표와 수혁은 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된다. 그러나 신임 중대장의 무리한 작전으로 중대는 엄청난 위기에 처하게 되고 악어중대의 어리지만 베테랑인 대위 신일영(이제훈)과 중위 수혁의 단독 작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고지를 탈환한다.

하지만 작전 중 은표는 친구 수혁의 180도 달라진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경상학을 배우며 걱정 없는 나날을 보내던 겁많고 정도 많은 성격의 대학생 수혁이 전쟁 기계가 되어 있던 것. 그는 북한군으로 어설프게 위장했다 잡히는 교란작전을 펼쳐 대공포 진지를 탈환하고, 사로잡은 북한군을 모조리 즉결처분할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십자가를 들고 겁에 질려 기도하는 수혁.
두려움에 떨며 신(神)을 향해 “살려 달라” 기도하던 대학생 수혁은 “누구든 모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잔인한 전쟁괴물로 변했다(전쟁으로 인한 수혁의 변화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독교인’으로 캐릭터를 설정한 듯 한데, 왜 하필 기독교신앙을 가진 그가 잔인한 전쟁괴물로 표현됐는지 의문이 남는다. 수혁이 무종교인이었더라도 충분히 전쟁의 비극을 설명할 수 있었을텐데).

고지를 점령한 뒤 토굴 안에서 은표는 더 충격적인 장면을 접한다. 수혁이 부대원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은표는 그들 주변에 놓여있던 북한군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편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북한군과 내통을 의심한 은표는 이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위협을 느낀 양효삼 상사(고창석)는 은표를 향해 총대를 겨냥한다.

“너무 오래돼서 싸우는 이유도 잊어버렸다”는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류승룡)의 말은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휴전협상이라는 2년간의 기간동안 전략적 요충지인 애록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남과 북은 끊임없는 교착전을 벌여야했다.

400만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에서 300만명이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중 고지쟁탈전으로 인해 희생됐다는 기록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이유를 잃어버린 채 전쟁 그 자체와 싸웠던 당시의 상황을 잘 증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그 희생의 터 위에 대한민국의 자유(종교의 자유도 포함)가 수호됐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이념을 초월한 북한군 병사와의 교감이라는 영화의 설정은 자칫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남북정세에 대한 현실감각을 무시한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전쟁에서 희생한 이들의 핏값이 헛되지 않으려면 “한 눈은 동포를 보고 한 눈은 체제를 봐야 한다”는 강원용 목사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