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성경에 약속된 성령의 권능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성령 받은 크리스천들이 급속하게 복음을 온 땅에 전할 것을 약속한 것 아닌가요? 그 약속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오늘날의 교회는 이렇게 힘을 잃고 있는 것인가요? 성령의 권능에 대한 성경의 약속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A) 깊은 고민을 담은 질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먼저 답변부터 드린다면, 성령의 권능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수많은 전도 세미나들과 프로그램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전도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의해서 열매 맺게 된다는 점입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 여러 방법론과 기술적 고안들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것은 성령의 능력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저는 한국교회 앞에 이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인 근거자료들을 제시하여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의한 전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민족복음화의 오랜 숙원은 물론 세계선교 완수의 목표를 향한 힘찬 전진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먼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가 너무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대해 둔감하고 무지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 전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나 성령의 주권과 능력에 민감했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령의 주권과 능력을 충실히 의지하는 삶과 사역 - 이것만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확실하게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고 또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계선교 완수의 방법입니다. 이제는 온 세계 모든 크리스천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여 성령의 주권적 역사하심 앞에 삶과 사역을 내어드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표적 기독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셨습니다(마 28:19-20; 눅 24:46-49; 행 1:8 참조). 그 후 성령 받은 제자들과 성도들을 통해 급속하게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로마제국 전역을 향해 전파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강력한 표적을 동반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전파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를 우선 ‘표적 기독교’라 해 두죠.

보통 학자들에 따라 정경성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사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막 16:9-20)은 이러한 표적 기독교의 실상을 제대로 요약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지면을 통해 새삼스럽게 본문의 정경성을 논하자고 하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마가가 지녔던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역사의 흐름을 경험한 마가는 마가복음에서, 물론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담았지만, 사도행전의 복음전파의 역사를 경험해 온 그의 확신을 분명하게 실어 놓았습니다.

16장 17절과 18절에 열거된 표적들에 대한 언급은 이미 초대교회 때 즉 사도행전을 보면 다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마가는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표적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표적과 함께 초대교회는 무섭게 빠른 속도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표적은 복음 전할 때 악령(귀신)의 세력을 제압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때는 복음을 전할 때 악령을 축출하는 사례가 대단히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행 5,8,16장).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곧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직결된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둘째 표적은 복음 전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은(AD. 65-70) 사도행전보다 후의 일이었으며(AD. 62-65), 저자 마가는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도행전 2장 이후의 여러 방언 사건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행 10,16장 참조). 그러므로 “새 방언을 말하며”라는 표현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또 방언을 말하게 된 사실들에 대한 평가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표적은 복음 전할 때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해방된 경험을 하였습니다(행 16장). 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게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행 28장). 뿐만 아니라 이 모든 표적들로 인해 복음이 권세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넷째 표적은 복음 전할 때 병든 자들을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사건들과 사도행전의 기록들 속에는 병든 자들의 치유에 대한 내용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시면서 병 고침에 대한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7,8).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표적을 주시는 이유는, 이런 일을 행하면서 자기 자랑에 빠지거나 또는 이런 초자연적 일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한다거나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 진정한 이유는 오직 세계 복음화의 완수를 위해서 이러한 표적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power from on high)이며 성령의 권능을 받는 일입니다(눅 24:49; 행 1:8).

복음의 핵심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기독교회는 세속화의 물결과 교권제도(hierarchy)가 발전됨을 통해 자유로운 성령의 나타남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표적을 동반하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자유로운 은사는 산속과 사막의 수도원으로 도주하여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약속된 성령의 주권과 능력 대신 금욕적이며 이원론적인 신비주의적 영성이 중세교회 전체를 휘감게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어둠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 의한 구원의 권위를 회복한 위대한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신학은 기록된 성경의 권위와 구원론의 가치를 존중한 반면, 복음전도에 있어서의 기사와 이적의 초자연성이라든가 성령의 은사와 인도하심에 대한 초대교회적 신앙을 용납할 만한 여유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7세기를 맞아 유럽 여러 나라의 개신교들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지독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후 개신교 신학의 성격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계몽주의의 시녀 노릇을 해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리(John Wesley)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까지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대한 시각이 거의 닫혀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왜 예수께서는 날 위해 죽으셨을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와 계실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실까요? 이 모든 질문의 궁극적인 답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얻은 구원의 은총 가운데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는 일에 각각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인도하시며 다스리시며 또 권능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 모두가 거듭난 이후 깨닫게 되어야 할 인생 최대의 자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계 복음화의 완수를 위한 지상명령을 내리신지 이천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현대교회는 세상 앞에서 비웃음을 당하고 있고, 세속적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 봇물을 이루고 있고, 이슬람교는 전투적으로 힘 있게 기독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모든 지역을 접수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혼합주의가 기독교 문화권을 엄습하여 복음의 정체성조차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현대 기독교는 거듭난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을 전파함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권능과 표적을 통해 능력 있게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크리스천은 언제나 성령 충만하여 주님과 함께 살고 또 주님과 함께 역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