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교수님은 이전의 글에서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 내에 성령론의 크게 다른 두 개의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일반 신자들은 어떤 노선을 따라야 합니까? 신자들은 까다로운 성령론 신학을 잘 이해하기는 어렵고, 다만 이를 알기 쉽게 믿고 적용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실제 목회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결론은 없습니까?

A) 이전의 글에서 보아서 이해하셨듯이,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특히 개혁파 계통의 신학 노선에서 성령론의 혼선이 짙었습니다.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오순절 계통이나 웨슬리안 계통에서는 성령론에 있어서 그다지 큰 성령론 논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신학계를 주로 이끌어 온 것은 아무래도 장로교 신학의 영향을 배재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교 신학 내에서 일어난 성령론 논쟁에 한국 교계 전체가 휘말려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런 성령론 논점의 시각 차를 좁히고자 하는 노력들이 장로교 내에서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신학적으로 논쟁을 해도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고 목회선상에 직접적인 유익이 없다면, 논쟁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는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개혁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론의 조정적 흐름은 어떠한지에 대해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논쟁의 시각 차

이인한 목사의 「신자와 성령」이 출간된 것은 박형룡이 <신학지남>에 “성령”이라는 글을 쓴 1968년보다도 이른 1964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두 저작은 마침내 개혁주의 성령세례론의 양대 축을 조성하게 되는데, 이후의 성령세례론의 갈등은 이 양 노선 간의 해석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그룹 내에서 뜨거운 성령세례론 논쟁이 지속된 과정은 박형룡의 노선에 맞서 차영배 교수가 본격적으로 바르트(Karl Barth), 스토트(John Stott), 개핀(Richard Gaffin) 등의 성령론을 비판하는 작업과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지남>에 기고된 차영배의 “칼 바르트의 성령론 비판”(1977, 봄),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관한 John Stott의 견해 비판”(1982, 겨울),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관한 R. B. Gaffin 교수의 견해 비평”(1986, 봄, 여름) 등의 비판적 논문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 후 현재까지 개혁주의 신학계에서는 성령세례론에 있어서 매우 복잡한 갈등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성령세례론을 최소한 간략히 분류해 본다면, 개혁주의 성령세례론에는 이인한을 필두로 하는 중생 이후의 성령세례론과, 박형룡을 필두로 하는 중생과 동시의 성령세례론의 두 가지 커다란 역사적 조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두 조류의 신학적 성격은 19세기로부터 이어온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선과, 이와 대치된 20세기 초 영미 신학계에 풍미하던 신정통주의나 근본주의적 노선 사이의 교리적 갈등관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조정은 가능한가?

한국교회 성령세례론 논쟁의 핵심에는 성령의 은사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은사의 지속성 문제를 허용할지 여부에 따라 성령세례에 대한 정의가 또한 명백히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길성 교수는 1930년대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박윤선의 신학적 고민에 대해서 흥미로운 소개를 하였습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노선은 워필드(B. Warfield)의 주장을 따라 은사중지론의 입장이었는데, 박윤선이 한국에 돌아와 보니 목회적 상황은 방언, 신유 등 성령의 은사적 현상들이 지배적이었기에 그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김길성, “우리 시대를 위한 개혁주의 구원론”, 「성령과 교회」, 104-5). 이런 시각에서 신약학자 권성수는 기본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틀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능력 수여의 관점에서 중생과 성령세례의 관계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필자의 성령론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성찰을 해보고 싶은 것도 솔직한 고백이다. 성령세례가 최초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필자가 아직 고정되어 있으나, 성령세례가 능력을 수반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다..... 성령세례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현현의 체험(나도 알 수 있고 남들도 알 수 있음)을 말하지만, 구원은 중생과 직결된 것이므로, 중생한 자로서 성령세례 못 받은 자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만일 성령세례가 성령의 능력을 수반한다고 하면, 이 경우의 능력은 어떤 능력인가? 이 경우의 능력은 필자가 다음 장에서 주장하려고 하는 인격의 변화, 생활의 변화, 회개, 은사들, 복음전파의 능력, 악령 퇴치의 능력 등이 될 것이다(권성수, 「종말과 영성」, 100-1).

그런가 하면 선교학자 김성태는 <신학지남>의 한 논문에서 ‘성령의 외적 은사가 사도적인 표적과 기사로서 사도시대에 마감을 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서, 개혁주의 신학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최근 적지 않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성령세례와는 관계없이 교회론과 연관해서 성령의 외적 은사들을 교회적인 은사들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성령께서는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임재로서 내재하시며 영적 은사들을 수여하시는 것”(김성태, “오순절주의 성령론이 선교신학에 미친 영향력과 그에 따른 개혁주의적 관점 고찰”, <신학지남>, 168)이라고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적 전환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개혁주의 신학계가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이에 두고 논란을 지속하는 일은 복음적인 성령운동의 확산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동안 개혁주의 신학계 내에서 있었던 성령세례론을 둘러싼 상호 갈등의 조정은 가능할까요? 네, 그렇다고 봅니다. 이 점에 관해 권성수는 성령세례의 시기나 임하는 방식 등에 대한 논의보다는 실제 성령 임재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성령세례가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느냐 후에 일어나느냐, 그 최초의 증거가 방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 즉 성령세례의 시점과 방식의 문제는 성령 임재에 부차적인 것이다(권성수, “성령과 성경 해석”, <신학지남>, 66).

그러므로 적절한 용어 사용과 해석상의 문제에만 너무 억매이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서로간의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서로의 전통에 참여함으로 더 풍성한 성령 임재와 사역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개혁주의 신학계는 그동안의 성령론 논쟁을 마감하고, 상호 전통을 이해하며 존중하는 가운데 좀 더 포괄적인 성령론 이해의 시기로 돌입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괄적 성령론 이해의 열쇠는 성령세례의 시기나 용어 정의 등에 휘말리기 보다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관점에서 성령론을 접근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신학자들의 연구가 풍성한 복음적 가치를 향해 더욱 깊어져갈 뿐만 아니라 실제 목회적 사역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되는 성령의 능력과 주권에 대한 힘 있는 안내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