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성령론에 대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이 꼭 거듭나고 나서 받아야 하는 체험입니까? 이미 거듭났다고 하면 성령세례 받은 것은 아닌지요? 도대체 거듭남이라는 중생의 은혜와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A) 네, 독자께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받는 시기에 대해서 교계에서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서로 엇갈린 해석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의 신학적 조류의 큰 위치를 담당했던 것이 개혁주의신학인데, 안타깝게도 개혁주의신학을 강조하는 몇몇 대표적인 신학교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혁파 계통의 여러 교단들 산하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도 이런 혼선이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성은 비단 개혁파 계통의 장로교단 뿐 아니라 기타 교단들에게도 크게 퍼져 나갔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저는 개혁주의 계통의 신학자들 가운데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의 인물들이 지닌 성령론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번 글하고는 대조되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성령론의 전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장로교의 대표적 정기간행물 중의 하나인 <신학지남>(神學指南)에 솔타우(T. Stanley Soltau; 蘇逸道), 엥겔(G. Engel; 王吉志) 등의 성령론이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이 당시 <신학지남>에 나타난 성령세례론은 일반적으로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신학지남> 저자들은 이 ‘능력 체험’에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구별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한국의 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 ‘성령세례’라는 용어로서 한국교회 신자들의 체험을 전 세계에 소개한 장로교 선교사들인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나 프레스톤(J. F. Preston)의 노선과는 비교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솔타우 등이 공부한 20세기 초반의 미국 개혁주의 신학계의 신학적 조류의 영향일 것입니다. 이들 선교사들의 성령세례론은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솔타우는 신자가 새롭게 성령세례를 받으려고 할 일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의 뜻을 깨닫는 것이 성령세례의 참 의미를 적용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T. Stanley Soltau, “성신이 하시는 일”, <신학지남> (1926.4), 24).

박형룡 박사의 성령론이 <신학지남>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68년부터인데, 그는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중생과 관계된 성령의 최초적 은사인 성령의 세례와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51-4). 그러자 박형룡의 저술을 필두(筆頭)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저술들이 신성종, 김해연, 박형용 등을 통해 한국 신학계에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박형룡의 성령론은 당시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학교의 신학 노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핫지(Charles Hodge)나 워필드(B. B. Warfield) 등은 성령 은사의 중단성(中斷性)과 중생과 연관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스토트(John R. Stott), 개핀(Richard B. Gaffin), 카이퍼(Abraham Kuiper) 등의 영향도 역시 이 노선에 힘을 주었습니다. 특히 대중적으로 국내에 큰 영향을 끼친 부흥사 그래함(Billy Graham)이나 CCC의 브라이트(Bill Bright)도 역시 명확한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 충만’의 노선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래함은 모든 신자가 평생에 꼭 한번 성령의 세례를 받는데, 그것은 거듭날 때라고 확언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날부터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는 누구나 그것을 경험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중생을 얻을 때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할 일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Billy Graham, 「성령론」, 전민식 역, 80). 그는 성령의 세례가 중생 때 발생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그것을 찾기 위해서 결코 애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브라이트에게 있어서 성령세례는 단지 중생과만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하지만, 결코 이를 성령세례라고 일컫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이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해지면 곧 그리스도로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Bill Bright, 「영적 혁명」, 임성택 역, 81).

당시 총신대 신약학 교수였던 신성종은 차영배 교수의 성령세례관과 많은 차이점을 보였는데, 신성종은 성령세례가 중생과 동일한 사건이며 성령의 인치심과도 동일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구속사적 면에서 일회적 사건으로써 제자들의 경우에는 성령 강림 이전이었기 때문에 중생과 성령세례가 구별된 것뿐이라는 점이었습니다(신성종, “신약에 나타난 성령론 -특별히 방언 문제를 중심으로-”, <신학지남> 48-2(1981), 38).

스토트(John R. Stott)는 성령의 처음 경험으로서의 성령의 세례는 반복될 수 없으나, 성령의 계속적이며 영속적인 역사로서의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이라고 보았습니다(John R. Stott, The Baptism and Fullness of the Holy Spirit, 30-31). 그는 신약성경에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언급이나 명령이 전혀 없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성령의 세례가 성격상 최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도의 설교나 편지에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호소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성령세례에 대한 일곱 구절 모두가 부정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간에 다 직설법으로 되어 있다. 명령법으로 권고한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없다(John Stott,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세례, 충만, 열매, 은사」, 조병수 역, 55).

그의 성령세례론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과 연관하여 보편적으로 교회에 최초로 임하신 성령세례를 강조하며, 이제는 교회가 성령세례 받은 보증으로 물세례를 베푸는 것이며, 따라서 이제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일이 지속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이처럼 스토트의 성령세례론은 신자의 중생의 체험보다는 최초의 교회에 임한 성령의 축복과 연관시켜 해석한다는 점에서 독특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생을 통해 이 축복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중생과 성령세례의 체험을 구분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스토트의 성령세례론은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을 지지하게 됩니다.

김해연 교수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 어떤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뜻보다는, 생명을 얻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며 주님의 생명이 죽고 썩어질 내 생명 속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회심과 중생에 깊은 관계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때 단회적으로 새 생명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김해연, “성령론(2): 성령세례와 충만에 관한 고찰”, <현대종교> (1984.6), 181-2). 또한 성령세례는 구원받을 때 받는 하나님의 은사요, 성령 충만은 주님의 백성으로서 봉사와 헌신으로 이 세상에 살 때 계속적으로 채워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라고 구분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개핀(Richard B. Gaffin)은 오순절 성령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 역사의 한 사건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그것은 반복될 수 없고 또한 개개 신자의 경험의 표본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Richard B. Gaffin, 「성령은사론」, 권성수 역, 25).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단회적 사역의 모든 다른 측면들과 같이, 개개 신자가 교회 즉 그의 성령세례 받은 몸속으로 연합되는 순간에 체험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개핀은 오순절파 성령세례의 근본적인 문제가 신자의 경험 속에서 성령과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오순절파에서 가르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성령의 은사는 두 번째 축복으로서 회개 이후에 경험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오순절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기독교인은, 얼마의 어떤 기독교인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은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그리고 성령의 조종하시는 능력 아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경험 속에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같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닌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닌 것과도 같다고 강조하였습니다(Gaffin, “현대교회의 성령운동에 대한 평가”, 236-9).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령 충만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역시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보았습니다. 성령세례는 회심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 충만은 신자의 생활에서 계속되는 과정 혹은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박형용 교수 역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할 때가 바로 그가 예수 믿고 중생하는 때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성도의 구원 경험에 있어서 단회적인 경험이요, 예수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인격체이신 성령이 성도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박형용, 「교회와 성령」, 92). “따라서 성령세례는 성도의 구원 경험에 있어서 단회적인 경험이요 예수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박형용,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월간 목회> (1990.5), 165). 이처럼 박형용은 중생을 통한 성령세례 이후 성도 안에 내주하는 성령께서는 성도의 인격적인 복종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이루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교수를 지낸 고재수(N. H. Gootjes)는 ‘성령으로의 세례’가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개개인 신자가 그의 신앙과 생활의 제 2단계를 시작하는 표시적 체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세례 주다’란 말은 오순절 날부터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선물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거주시켜 주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고재수(N. H. Gootjes),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35).

김길성 교수는 사람의 응답인 신앙과 회개가 있기 전에 소명과 중생, 즉 하나님 역사가 먼저 있는데, 그 하나님의 역사를 성령세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는 관점입니다(김길성, “우리 시대를 위한 개혁주의 구원론”, 「성령과 교회」, 100). 김길성은 중생이 곧 성령세례라고 보는데, 중생이 같은 사건의 인간적 차원을 강조한다면 성령세례는 같은 사건의 신적 차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구분지은 것으로 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저는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 전통 속에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성령론의 대표적 저술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한 개혁파 전통 내에서 성령세례의 시기에 대한 견해가 서로 어떻게 엇갈려 왔는지를 알게 되셨을 겁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야기된 이런 양분된 해석은 결국 한국교회 신자들이 성령론에 대해 확신 있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음 글에서 저는 이런 성령론의 엇갈린 해석을 조화의 길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