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적으로 쓴다면, 우리가 이 연재를 시작할 때 계획했던대로 이제 세르베 화형 사건 자체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논의할 장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던 이야기를 끊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더 위그노들에 대한 대대적 학살 사건들 이후, 프랑스 개혁교회의 계속된 흐름에 대해 잠시 돌아본 후에 세르베 화형 사건의 전말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16세기 중반 깔뱅이 쥬네브로 이주할 당시 프랑스 인구 15-20%는 이미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그 수효는 10만을 훨씬 넘어 15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깔뱅이 쥬네브로 떠나 난민의 신분으로 신앙과 신학, 교회와 공동체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다가 소천한 그 이후 30여년의 세월 동안 그의 고국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계속되는 박해와 순교의 피바람을 피할 수 없었는데, 1572년의 바돌로메 축일 대학살 참사에서 그 절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위그노에 대한 기성 가톨릭 교회의 폭압은, 교회와 교권의 직접적 폭력, 구교회 교인들의 자발적 혹은 충동적 헌신(!)으로 쉬임없이 이어져, 향후 100여년 헤아리는 기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위그노 프랑스 대탈출

1530년대 프랑수와 1세 치하에서 종교적 이유로 이민을 떠나는 인구가 생겨나더니 바돌로메 대학살 이후 수만 명씩의 위그노들이 인근 나라들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났다. 초기에 이들 피난민들은 튜더 시대의 영국과 깔뱅이 머문 쥬네브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가톨릭 신자이던 메리 튜더(Marie Tudor) 여왕에 이어 재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1558-1603)가 박해받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피난처 제공을 약속하고 보호를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유럽은 소위 30년 종교 전쟁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무대가 되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위그노’라는 이름의 새로운 교회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더 분명한 아이덴티티(identity)와 바운더리(boundary)를 형성하면서 역사 위에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고, 서로 기대고 지원하면서 파괴적 상승 에너지를 주고받던 가톨릭과 세속의 그 대리 권력들은 이제 자신들이 타격할 가시적인 박해 상대(target)를 더 분명한 이름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 년이 더 흐른 후, 소위 태양왕으로 알려진 루이 14세 때 위그노에 대한 박해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의 화려 찬란한 절대 왕정은 복음의 정신과 하나님의 나라, 개신교회와 절대 공존할 수 없었을 터였다. 1685년 10월 6일, 그는 그나마 명맥만을 유지하여 오던 ‘종교적 관용’의 표지, 낭트 칙령까지도 취하해 버렸다. 이 때 수많은 귀족들의 가계를 포함한 프랑스의 80만명 인구 가운데 무려 18만여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신앙적 이유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가톨릭의 위협과 압력에 굴복하여 다시 가톨릭 재개종을 천명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결국 고국 프랑스에 남겨진 위그노의 수는 겨우 1,000~1,500명에 불과했다. 깔뱅과 위그노를 낳았던 프랑스 개신교회는 이렇게 몰락하고 말았고, 오늘날 프랑스 교회의 처지만 보더라도 이 때 이 나라와 민족이 자초한 절망의 크기가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는지를 가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피난민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의 서부인 브르따뉴(Bretagne), 노르망디 지역(25%)과 삐까흐디, 뿌와뚜 지역(Poitou 37%) 출신들이었다. 17세기 말까지 이들이 난민으로 들어간 곳에서 파악되는 그 대강의 이민 숫자를 살펴보면, 영국 6만명을 비롯 아일랜드 1만여명, 네덜란드 6만5천명, 독일 3만여명, 스위스 2만2천여명, 노르웨이 덴마크등 북유럽 수천명, 북 아메리카 1만여명, 남아프리카 희망봉 4백여명 등으로 나타난다. 비가톨릭 유럽 모든 지역으로 흩어진 이들 가운데는 신앙 자유를 획득할 뿐 아니라 심지어 러시아 짜르 왕실을 고객으로 만든 위그노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남아공 지역 스텔렌보쉬를 또다른 남불의 포도원 지역으로 개발해 내기도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바닷 길을 따라 신대륙으로 나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고, 노예선에 태워져 떠난 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그룹들도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시대 유럽 여건에서의 이민, 이 정도 거리 이주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이 결단을 위해 그들에게 필요했을 용기와 믿음의 크기를 미루어 보면, 이들이 가졌던 복음과 신앙 내용에 대한 확신의 수준, 신조에 삶을 일치하려는 태도, 이것들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과 단호함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은 예외없이 신앙 때문에 그들 개인과 가계가 쌓아온 성공과 성취, 그것들의 모든 근거와 바탕과 보장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일어나, 그들 앞에 몰려오는 죽음들을 향해 표표히 걸어나간 순교자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그 이후, 나라들과 족속들을 다 흔들어 뒤집어 엎는 전쟁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극복할 길 없는 지리하고도 깊은 경제적 파탄과 공황의 나락에 빠져 들었다.

 
▲위그노들의 유럽 여러나라, 그리고 북미, 남아공 지역으로의 이주 상황.

온 유럽을 쿵쿵 울리다

이 시대 프랑스를 떠났던 이 사람들 속에는 곧바로 정착지에서 땅을 기경하기 시작한 농부들이 대다수였지만, 금은 구리 철 장인, 보석 세공 기술자, 시계나 안경 기술자, 비단직조공 등 당시 새롭게 발전하던 주요 산업 기술들을 갖고 있던 기능인들이 많았고, 성직자나 의사, 직업 군인, 교사, 무역업자 등 전문직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프러시아, 북미 등으로 이주하였다. 신대륙의 블루진 바지, 스위스의 롤렉스 오메가 론진 삐아제 시계 등 근대 산업의 발전을 표지하는 상징들의 상당수가 바로 이들에 의하여 프랑스 지경 밖에서 일제히 발명, 개발되고 생산되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이처럼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피하는 프랑스 위그노들의 이민은 정치 사회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 산업적 의미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신앙적 박해라는 처절한 경험을 가진 이들 위그노들이 갖춘 도덕성과 사회성, 그 개인들이 가졌을 겸허함과 양식, 절제력과 근면성, 성실성을 우리의 상식으로만 미루어 보건대, 소위 이민자들로서 이들이 보유한 객관적 자질과 수준의 우수성은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그 어떤 집단 이민자들보다 더 탁월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즈음, 위그노 이민자들을 돕는 큰 노력들이 각국에서 나타나는데, 쥬네브와 보(Vaud) 지역의 도시 국가들은 먼 훗날 19세기까지 존속하게 되는 난민 구조 기구 ‘프랑스 후원회’를 조직했다. 프랑스와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 거리상, 또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탈출자들을 수용하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던 네덜란드와 독일은 가장 적극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들 이민자들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할 자국 사회와 공동체 기저로부터의 재편이라는 대대적인 변화조차 이들은 과감하게 수용했던 것이다. 비단 신앙 사상의 전파와 확산으로서 뿐 아니라, 프랑스 어(語)라는 언어의 확산으로 이 네덜란드는 불어권 깔뱅주의자들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는데, 소위 화란(네덜란드) 깔뱅주의는 바로 이 때 프랑스에서 탈출한 위그노들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프랑스에서 직접 남하하는 이민자들과 합류하여 남아공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소위 보어(Boer 농부)인으로 알려진 화란 계통 유럽인들과 아프리칸스(Afrikaans) 라는 새 언어를 만들어, 기획 이식된 문화를 일으키고자 시도한 유입 이민들의 초기 주력이 바로 이 위그노들이었던 사실은, 근대 인류 역사상 자못 그 의미를 신중하게 짚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위그노라는 이름의 시계.

독일의 경우, 브란덴부르그 (Brandenburg)지역 대선거구에서는 이 때 들어온 프랑스 사람들을 예우하여 참정을 허용할 정도였으며, 30년 전쟁 이후 이 지역 경제 회생에 이민 프랑스인들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 결과로 프랑크푸르트(Frankfurt)도 또다른 이민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베를린(Berlin)의 경우는 난민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적극 활동을 펼쳤고, 18세기 초 베를린 인구의 4분의 1이 프랑스 사람으로 채워졌다. 사회와 각 커뮤니티의 전반에 걸쳐 이들이 등장하고 유력하게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 지역으로 나아간 위그노들.

전통적으로 세속사를 통하여 항상 경쟁과 냉소로 프랑스를 대하였던 영국조차도 위그노들의 피난에 대하여는 일관되게 우호적 수용 입장을 견지하였다. 16세기의 첫 그룹에 대하여 예우했던 방식과는 달랐지만 이 때에도 이들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국에 정착한 불어권 공동체들은 특히, 1561년 캔터베리(위그노 교회는 당연히 가톨릭이 아닌 국교회 아래 존속)와 런던, 노어위치(Norwich) 사우드햄턴(Southampton)등에 많았다. 1590년에서 1630년 사이에 런던에 있는 프랑스인 교회는 5천명에서 1 만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흩어진 곳, 거기서 일어난 일들!

30년 전쟁으로 지친 중앙 유럽 국가들에서 프랑스 위그노들은 이처럼 특히 문화와 경제 분야의 새로운 힘으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위그노들은 비록 자신들의 나라에서 추방 당하고 도피하여 난민의 신분이 되었지만, 신앙 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실력의 측면에서 매우 우수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 정착하게 되든지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오히려 머지않아 유럽 역사의 주류와 중심으로 서게 되었다. 이들 위그노 그룹의 공간적 위치 이동은 유럽 세계 전반적인 영역에서 큰 파장을 일으켜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고국 프랑스에서도 수준 높은 장인들이던 많은 위그노들은 그들의 망명을 수용한 나라에서 곧바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주력이 되었고, 특히 이 시대 이후 섬유 분야의 폭발적 발전에 놀라운 기여를 하게 되었다.

소위 근대 산업혁명이 섬유 분야로 대표되는 산업의 대량 생산과 소비, 이를 유통하는 시장 구조로 설명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상식이라면, 서구의 산업 혁명 자체가 이들 위그노들에게 결정적으로 힘입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초기부터 피난에 나섰던 학자들이 특징적으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문학인들이었으므로 이 신앙인들의 이동은 사상의 혁신과 인간 자유에 관한 반성을 자극하였고, 이로써 계몽주의의 파급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하였다.

옛적처럼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와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를 힘주어 외치는 이들이 많다. 주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형제들’ 사이, 그 평행하면서도 다른 수준에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 방법과 관계 실제(practice)를 대조하여 말씀하신 일이 있다. 보이는 형제들, 인간 역사의 현장에서 인지 가능한 관계의 실제는 오히려 무시하면서 함부로 하나님 신앙을 들먹이는 따위의 넌센스들에 대하여 “…도 않으면서”라는 양보적 어법으로 책망하시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하나님 앞에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 신앙의 직접 선조들의 모습을 짚어보면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국가 사회와 세속 커뮤니티 안에서 갖는 위상과 역할, 교회라는 이름으로 오늘 우리가 세상 앞에서 갖는 평판과 평가, 신문 지면을 채우는 교계와 목회의 현상들을 돌아본다. 우리의 ‘현실과 상황’은 열조들 앞에 어떤 변명도 내놓을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 와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지난 글 보기]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