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이 날을 축하하여 ‘하나님께 찬양’이라는 ‘떼 데움’(Te Deum)을 사은(謝恩)의 찬양으로 부르게 하였고, 스스로 특별 감사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또 프랑스 교구에 거액의 상금을 희사하였다.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 날을 기념하여 한 손에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엔 칼을 든 천사가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모습을 새긴 메달을 주조하여 팔았다. 이는 천사장 성 미카엘이 사탄을 무찌르는 성화 하나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로마 시가지에 수 일 동안 조명을 밝히고 축제를 열기도 했다.


▲그레고리 13세 위그노 학살 기념 메달. 교황은 그들이 자행한 바돌로메 대학살을 천사들의 거룩하고 위대한 사역으로 미화했다.

이런 정도라면 이 사건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 향후 이 역사적 참사를 다룰 태도는 이미 자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지난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예상은 그대로 들어 맞았고, 오늘날도 상당수 이 부류의 인사들은 이 의도된 기획에 의거, 왜곡된 역사 해석과 서술, 추종과 주장을 스스럼 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 부분을 공부하던 학생 하나가 공정성을 상실한 이런 주장들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런 외침을 내뱉었다.

“야이, 똘레랑스를 외치는 놈들아! 깔뱅과 파렐은 그 이단자 세르베를 살려 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했고, 굳이 회유라면 회유, 설득이라면 설득으로 그를 풀려나게 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노력이 수포에 그치자 죽은 세르베 때문에 충격과 괴로움을 토로하던 것을 보지 않느냐? 그런데 이 수천 수만의 인명을 살상한 자들에게 상을 베풀고 잔치를 베푸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찌 너희의 그 날카로운 판단과 비판의 손가락을 말없이 접어 버린다는 말이냐! 그러고도 또 그 입에 욕설과 거품을 물고 ‘관용’을 외칠 수 있다는 말이냐!”

이은택 교수의 이어지는 설명처럼 바시 대학살은 1562년 3월, 바돌로메 축일의 대학살 사건은 1572년 12월에 각각 일어났으므로,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은 이 사건들 보다 약 230년 후에 발생한다. 조선에서는 이보다 15년쯤 앞서는 1785년 정조 9년에 가톨릭이 사교(邪敎)로 규정되어 금지되었고, 이 때문에 북경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이 금해질 지경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 어머니의 제사에 신주를 없애버린 유생 윤치충(尹持忠)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1891). 그러나 당시 천주교에 깊이 관련되어 있던 인사들이 주로 재상 채제공 등 남인 계열이었고, 잘 알려진 정약용 형제 등 천주교 신앙에 관련된 이들이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학문적 우수성, 정치적 입장의 순수성 등에 의혹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정조 임금은 가톨릭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썼다.

하지만 정조가 붕어하고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득세하자 그들이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던 남인 시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일어났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권철신 등을 비롯한 300여명의 아까운 인재들이 처형되었고, 정약종의 형제들 약전과 약용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다.

이 때에 가톨릭 교도 황사영(黃嗣永)이라는 이가 북경에 있던 프랑스 가톨릭 교회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군대를 보내어 조선에서의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 달라는 요청을 시도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위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당연히 이 외세 의존적인 행위는 극단적으로 정치적인 해석을 낳아 조선 정부를 더욱 자극하였고, 천주교 박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관용’이라는 컨셉(concept)이 구성될 여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간 것이다.

박해는 더욱 가혹해졌다. 1839년 다시 프랑스의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모방, 샤스탕, 앙베르 신부가 수십 명의 신도들과 함께 처형되기도 했다. 이를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 하는데, 수 년 후에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사건이 이어진다. 이 일련의 처참한 사옥(邪獄)들을 통하여서는 후에 100명이 훨씬 넘는 가톨릭의 복자(福者)들과 성인(聖人)들이 태어났다.

그들이 그들 나름의 기준과 판단으로 이들 순교자들을 종교적 복자와 성인으로 세우는 일에 세세히 간섭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완전히 꼭 같은 이유로 자신들이 죽인 (위그노) 수십만 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사과나 그 어떤 반성도 없고, 동일한 이유로 죽임당한 가톨릭 교도들에 대해서는 단지 그들이 가톨릭 교도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인들(Saints)’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이들의 신앙적 결정과 판단 기준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른바 ‘종교적 관용’이라는 개념이 이런 정황에서 실제로 도입, 적용(apply)되고 시행(practice)되는 여건은 이 가톨릭의 역사가 너무나 신랄하게 설명해 주고 있고, 더욱이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 그들의 위그노 핍박사, 조선 가톨릭 교구의 초기 선교 역사를 함께 보게 되는 우리에게 이 점은 매우 간명하고 투명하게 대조되어 이해된다. 부조리와 불합리, 불균형과 부정확 투성이라는 사실이다.


▲현재는 유명 관광지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나 한 때는 위그노들이 신앙을 위해 갇혀 수모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1545년-1750년 동안 순교 당하지 않은 3,500명의 개신교인들이 갇혀 있다 노예선으로 끌려 갔던 이프(If) 섬의 감옥(위)과 섬 전경(아래).

요컨대 이 ‘관용(La Tolérance)’이라는 아이디어는 결코 프랑스 기독 교회사와 위그노(소위 프랑스어를 말하는 깔뱅주의자들: French speaking Calvinists), 개신교회에 대한 박해사에 나타나듯 일부 가톨릭 학자들이 즐겨 써오는 방법대로 어느 특정인을 때리고 비난하기 위하여 끌어대다가 결국 이렇게, 자기 눈(目)을 푹 찌르게 되는 따위의 개념이 결코 아닌 것이 너무 분명하다는 말이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이 말은 혹자들의 날카로운 칼, 피 묻은 날을 숨기는 요상한 칼집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1만여명을 헤아리던 가톨릭 신자들의 수(數)가 경기와 서울, 중국 산동을 마주보는 서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거의 3만에 육박했지만, 이들의 신앙 경향은 초기 남인 학자들과는 많이 달라졌다. 현실 개혁 의지보다는 내세 신앙으로 현실의 불안과 불만을 달래 보려는 성격으로 흘렀고, 더러는 프랑스로 대표되는 외국 신부들의 특권에 의지하여 정치 사회적 모멘트와 심층적으로 결합한 치외법권적 어드벤티지(advantage)를 누리려는 심리도 작용하여, 사뭇 경도되었던 것으로 드러나 있다. 기독교회의 선교 역사에는 이런 케이스들이 드물지 않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사를 보면서, ‘선교’라는 과정을 통하여 전달되는 신앙적 유전 형질(DNA)이 나중 피선교 교회들의 형질과 기질에서 어떤 유사성을 띠고 나타나게 되는지를 보는 우리는, 자주 깜짝 놀라게 된다. 이런 점은 실제로 가톨릭이 19세기 당시 조선의 평민들의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면서도 정작 농촌 깊이에는 파고 들지도 못하였고, 도리어 농민들의 호응을 입은 동학(東學)의 건너편에서 대립각을 세우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임을, 근세사를 평하는 역사가들의 의견들을 살핀 이은택 교수는 진지하게 지적해 주었다.

어느 시대의 독자들에게든, 상황을 보는 감정이나 해석 입장의 좌우에 무관하게, 이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분명하고 공정한 균형을 갖도록 요청하는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할 것이다.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지난 글 보기]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