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1)

<서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부활이 근본적인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오시고 인간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영원하신 구세주가 되신다는 복음이 우리가 믿는 진리인 것입니다.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첫 번째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요, 두 번째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이고, 세 번째는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날짜를 계산할 때 예수 믿는 나라나 안믿는 나라나 상관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신 것을 기점으로 해서 Befor Christ. After Christ. BC, AD로 나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 교회 위에 세워지고 사람들이 목에 달거나 손목에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오늘은 온세상 인류들이 부활을 찬미하고 부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이요 진리의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부활을 하셨나. 이것이 늘 우리가 묻는 질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는가. 여러분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한 사건을 본 증인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증인들이 없이 그냥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증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면 그것은 사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능력해서 로마의 관원에게 잡혀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오실 때 벌써 죽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 위해서 재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본론>

1. 부활의 증거

마가복음 10장 33절로 34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시고 무덤 문을 돌로 막으시고 그리고 총독의 명령에 의해서 로마의 군인들이 철통같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셋째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을 붓기 위해서 죽은 시체에 중동에서는 향을 붓는 것이 습관인 것입니다. 무덤을 찾아왔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벽력이 일어나더니 빛난 옷을 입은 천사가 무덤에 와서 돌을 옮기는데 지키던 파숫꾼들이 얼굴이 백지장같이 되어서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여자들도 정신이 없어서 보고 있는데 돌 위에 올라앉은 천사가 하는 말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구나. 그는 이곳에 있지 않고 부활하셨다. 그가 누운 곳을 와 보라. 그래서 무덤 안을 보니까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고 그가 벗어놓은 수의만 보였었습니다. 여자들은 놀라서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도해야 되겠다고 뛰어가는데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시여, 너무 반가워서 주님을 끌어안으려고 하니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내 몸에 손대지 마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잡고 경배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던 제자 중에 두 사람이 낙심해서 엠마오로 예루살렘에서 한 25리쯤 되는 곳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면서 둘이가 굉장히 탄식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반드시 로마에서 우리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다윗의 왕국을 세워줄줄 알았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으실 줄 몰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같이 길을 걸어오다가 그들과 조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아니 당신들 무엇을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 합니까? 두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지며 당신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릅니까? 무슨 일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고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나라를 독립시켜 줄 위대한 지도자가 될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생각했는데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갔는데 어떤 여자 중에 부활했다는 소리를 하였는데 헛소리겠지요? 우리는 그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당신들 참 이상하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성경에 예언해 놓았는데 그것을 믿지 못합니까? 그런데 그들이 저녁이 늦어지니까 여관에 들어가서 쉬고가려고 하는데 이분은 그냥 가려고 하거든. 그러지 말고 우리와 같이 여관에 들어가서 쉬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더 이야기 해달라고..

그래서 여관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아서 빵을 가지고서 축사를 하는데 이분이 축사하고 난 다음에 보니까 눈이 탁 열리는데 예수님이시거든. 깜짝 놀래서 예수님인줄 알고 아이구 주님! 하자마자 주님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사실을 보고 놀래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도마가 없는 열제자들이 모인 곳에 가니까 열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부활하셔서 그들 가운데 왔다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이구동성으로 흥분해서 야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로 20절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못자국 난 손, 창자국 난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어디갔다가 늦게 어슬렁 어슬렁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하하하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었는데 부활을 한다 말인가. 나는 진짜로 그가 부활해서 내게 온다면 내 손을 가지고서 그 손 못자국에 넣어보고 옆구리를 손가락을 넣어 보고 그래야 믿지 안그러면 당신네처럼 환상을 보고 난 다음 그렇게 흥분하지 않겠다. 뭘 만져보고 확실한 증거를 해야지 그렇게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사나이 대장부들이 그렇게 믿느냐. 제자들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여드레가 지나고 난 다음에 도마도 같이 모여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 앞에 서서 손을 내밀고 도마야, 네 손을 내서 내 이 못자국난 손바닥을 만져 보라. 옷을 겉으면서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만져보라. 도마가 놀래가지고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서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본고로 믿느냐? 안보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그래서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20장 26절로 27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는 갈릴리에 가서 너희를 기다리겠으니 갈릴리로 오너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갔는데 언제 예수님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원래 고기잡이니까 옛 직업 버릴 수가 있습니까? 심심하고 시간이 있고 할 일이 없으니까 난 고기 잡으러 간다. 다른 제자들도 나도 나도 하고 함께 따라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도록 그물들 던졌습니다. 그 동안에 3년 동안 고기를 안잡아 봤으니 많이 서툴러지고 그물을 던지고 당겨도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아침 뿌연히 날이 새어갈 때 어떤 분이 해변가에서 얘들아, 얘~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으리라. 그래서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니까 굉장히 많이 잡혔다 말입니다. 예수님이 미리 제자들 위해서 고기들에게 명령을 내려가지고서 오른편에 다 모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도와주시려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 만났을 때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 원래 깊은 곳에 그물 던져서 고기 안잡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고기를 전부 깊은 곳에 모아놓고 난 다음 그물 던져라. 그물 던지니까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주님께서 축복을 하시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날 배 우편에 그물을 던져서 당겨보니 가득히 고기가 잡힌지라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냥 웃옷을 걸쳐입고 물로 뛰어들어서 헤엄을 쳐서 나오고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끌고 나왔는데 나가보니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생선을 구워놓고 빵을 구워놓고 기다린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끌어 당겨서 고기를 헤아려 보니 153마리였다. 상세히도 헤아려 보았어요.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고 생선을 구워 주시고 방금 잡아 온 생선 좀 가져 오너라. 그래서 가져오니까 예수님이 구워서 제자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우리에게 영적인 일만 관심을 가지고 세상 일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잘못입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 잡았으니 배가 고플 줄 알고 빵과 생선을 구워서 준비하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디가든지 돌보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될 것은 성경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아서 부르짖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여러분을 택해가지고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택하신 이도 예수님, 나를 부르신 이도 예수님, 나를 보내신 이도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망나니 였을 때 주님이 나를 택해서 불러 주셨는데 이제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 주님 믿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를 주님께서 버릴 턱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종종 저에게 이런말 합니다. 목사님, 주님이 과연 나와 같이 계실까요?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실까요?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아니하실까요? 그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삶을 살 때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당신이 믿은 것이 아니라 에수님이 당신을 택했다. 그럴 때도 주님이 택해서 주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지금이야 그때보다 훨씬 낫지 않느냐. 주님이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그 무거운 죄의 대가를 지불한 당신인데 버릴 턱이 있느냐.

여러분 오늘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굉장히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먼저 사랑했고 여러분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분을 귀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난 다음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이란 말에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말합니다. 희생적인 사랑. 그 다음에 그냥 친구로 사랑하는 필레오입니다. 그는 그냥 친구로 사랑하면서 이기주의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고 필레오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거룩한 사랑, 신적인 사랑을 하느냐. 그러니 베드로가 예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주님, 친구로써 사랑하는 것이지 거룩하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다가 전에 세 번 부인한 쓰디쓴 체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너 나를 거룩하게 사랑하느냐? 아니요. 친구로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또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거룩하게 사랑하느냐? 주님 나는 주님을 필레오 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내 양을 치라. 한참만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을 정면을 돌아보시더니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네가 나를 친구로써 사랑하느냐? 그말에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언제 또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또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노? 주님이 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냐?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서 주님, 내가 주님을 필레오 친구로 사랑하는 것 주님이 알지 않습니까? 왜 뻔히 알면서 물으십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또 주님을 배반할지도 모르니까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필레오로 사랑합니다. 그래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난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제자들이 따라오니까 베드로가 주님 날 보고 오라고 했는데 저 사람들은 왜 따라 옵니까? 주님께서 그 사람들이야 내가 다시 재림할 때까지 안죽도록 이 세상에 남겨 놓은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다른 사람 일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만 따르라.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난 이후에 500명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예수님 아무리 환상으로 본 것을 허탄한 일이라고 하지만 한꺼번에 5백명이 환상보는 것 보았습니까? 꿈을 꾸어도 똑같은 꿈을 5백명이 함께 꾸는 것 보았습니까? 5명도 한꺼번에 환상을 보고 똑같은 일을 꿈꿀 수 없는데 5백명이 동시에 예수님이 승천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처형하려고 하는 사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친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파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서 심판하려고 하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예수님을 만나보고 난 다음 바울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빌라도는 “빌라도 보고서”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 거짓말이다. 실제로 예수님 죽은 일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에 처한 빌라도가 자기의 기록에 상세하게 예수님을 처형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예수님에 대해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도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죽으셨고 그 다음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마스 아놀드라면 역사학자들은 전세계에서 몰라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위대하고 훌륭한 역사학자인데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조사하며 이에 대해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한 사실을 인류사에서 보지 못했습니다.”그가 인류의 역사를 다 연구해 보았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보다 더 명확하고 확실한 것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역사가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이 다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예수님의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열한제자가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는데 거짓 이야기를 보고서 목숨을 버릴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한두사람이 아니라 제자 모두가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을 만나주셨기 때문에 부활한 예수를 확실히 보고 체험했으므로 조금도 의심할 수 없이 부활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확실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매카트니 박사는 기독교의 대적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살았다고 거짓말하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안에 지금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입니까?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인할 때 가장 행복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찬송 부를 때도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느낄 수가 있고 기도할 때도 느낄 수가 있고 말씀 읽을 때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항상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붙잡아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내 속에 함께 계신다는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2.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체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한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믿음을 통해서 우리 생애 속에 큰 변화를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절에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로써는 우리가 죄악 속에 살고 있고 더러움 속에 살고 있고 질병 속에 살고 있고 저주 속에 살고 있고 사망 속에 살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무덤 속에 주님이 같이 들어온 것입니다. 죄악의 무덤, 불결의 무덤, 질병의 무덤, 저주의 무덤, 사망의 무덤에 예수님이 들어와서 그 무덤에서 우리를 끌어안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죄악의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불결의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질병의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저주의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사망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 우리들은 주와 함께 죄악에서 부활하고 불결에서 부활하고 질병에서 부활하고 저주에서 부활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써 나와같은 사람이 되어 온 것은 나와 하나가 되려고 온 것입니다. 나와 함께 죄악의 무덤에 살았고 불결의 무덤에 살았고 질병의 무덤에 살았고 저주의 무덤에 살았고 저주의 무덤에 살았습니다. 나와 함께 33년간 살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님께서 이 무덤문을 박차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이상 죄의 무덤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더러움의 무덤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병의 무덤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저주의 무덤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죽음의 무덤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내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무덤을 이기고 부활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64절로 66절에 보면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의로써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죄를 다 청산하고 죄를 용서하고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함과 성령 임재의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로 33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마귀의 진을 물리치고 자기가 일어나지 못하게 지키는 로마 군인들을 물리치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무덤에 들어갈 때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채찍에 맞을 때마다 우리의 병을 대신 짊어졌다. 40에 하나 감한 매, 39차례 맞았는데 요사이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모든 인류에게 있는 병의 대략을 줄기로 조사해 보면 39가지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모든 병을 예수님께서 채찍을 통해서 다 청산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서 부활할 때는 활짝 병을 벗어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부활했으므로 우리가 어떻게 되었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주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고 진리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와 더불어 병에서 고침 받았다고 확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 부활은 축복의 부활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번 따라 읽어 주십시오.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뜻이 어떻습니까?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너만 잘먹고 잘입고 잘살아라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자람이 없이 풍부하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풍부하게 하나님께 받아서 착한 일을 넘치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누릴 수 있는 은총도 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벌거벗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왜,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무덤에 들어갔다가 그것을 청산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여러분께서 생각하고 그것을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여러분 생각 속에 나는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항상 바라보고 꿈꾸는 것은 나는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나는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고 산다고 입술로 말하십시오. 여러분 입술의 말이 여러분의 삶에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역사하느냐 마귀가 역사하는가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없어서 착한 일을 할 수도 없고 헐벗고 굶주리고 절망에 처해있다. 절망적인 분위기입니다. 가난과 헐벗음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사탄이 와서 좋다고 춤을 추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은총을 받아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한다고 시인을 하면 예수님께서 그 분위기 속에 들어오셔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 운명은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운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립니까? 생각을 긍정적으로 먹고 올바른 꿈을 갖고 긍정적으로 믿고 제일 중요한 것이 긍정적으로 말을 하므로 마음을 밝고 맑고 환하게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어떤 분위기가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 여러분 마음을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어떤 분위기입니까? 절망적인 분위기입니까? 미움과 원한이 꽉 들어찬 분위기입니까? 탄식과 고통이 꽉 들어찬 분위기입니까? 슬픔과 절망의 분위기입니까? 분위기가 그러면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는 그렇게 열매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마음에 없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안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옷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의 분위기가 밝고 맑고 환하고 오늘은 기쁘고 즐거울 뿐 아니라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아지고 모레는 더 나아진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평안하다. 나는 기쁘고 즐겁다. 나는 형통하다. 나는 복받았다.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 분위기대로 기적을 산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항상 마음에 분위기를 올바르게 만드십시오. 친구집에 갔을지라도 친구집이 깨끗이 정돈되고 향수를 뿌려서 향기가 나면 그 친구집에 앉아서 오래 이야기하고 놀고 싶습니다. 분위기가 좋으니까. 그러나 친구집에 갔는데 집안 살림이 다 어지러워지고 파리가 가득 날리고 먹은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꽉 들어차고 썩은 냄새가 나면 친구가 좀 더 있으라고 붙잡아도 있기 싫습니다. 분위기가 엉망이기 때문에 있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집에 쥐가 많다. 파리가 많다. 벌레가 많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냐,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꽉 들어찼기 때문에 그 분위기 속에는 쥐가 안올 수가 없습니다. 내가 쥐가 오도록 벌레가 오도록 파리가 오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밥찌거기와 집안 쓰레기를 다 안치우고 갖다 놓았으니 쥐가 얼마나 좋아합니까? 쥐 천국이지요. 파리 천국이지요. 벌레천국을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이 놈의 쥐야 이 놈의 벌레야 이 놈의 파리야 왜 왔느냐고 욕을 할 수가 있습니까? 쥐나 벌레나 파리를 없애려면 소재를 착 해버리세요. 깨끗하게 하고 난 다음에 그곳에 깨끗한 꽃을 심는다든지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나비가 날라오고 벌이 날라오고 꿀을 치고 하지 분위기가 좋으니까 쥐보고 오라고 해도 안옵니다. 그것 먹을 것 없는데 왜 가노? 벌레보고 오너라 해도 아이구 우리는 너무 깨끗해서 못가겠다. 파리보고 오라. 아이 무슨 먹을 것이 있어야지 가지요. 우리는 안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노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서 하늘에서 풀리리라. 천국의 열쇠는 여러분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는 축복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죄가 사라지고 의의 분위기가 되고 추악함이 사라지고 거룩함의 분위기가 되고 질병이 사라지고 건강의 분위기가 되고 저주가 사라지고 축복의 분위기가 되고 그 다음 영생복락의 부활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속에 계신데 우리가 죽을 턱이 있습니까?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로 22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삶을 얻었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놀라운 축복을 우리가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복을 받을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여러분이 알아서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붙잡아서 이 복을 받도록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택함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같이 계신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다.

3. 구원과 희망의 복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과 희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이 오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희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수르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을 나무를 던져서 달게 한 것처럼 오늘 십자가를 우리 가슴에 품으면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쓴물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안고 매달리고 기도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좌절, 미움, 분노가 다 사라지고 달아지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사망의 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의 독, 부정의 독, 질병의 독, 저주의 독, 죽음의 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위대한 치료의 능력을 그 속에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내 맘에 큰 고통 사라졌다. 마음의 고통이 십자가를 통하여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과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도 멸망받고 심판 받아 망하고 지옥에 들어가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해서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서 나아갈 때 아버지는 얼마나 큰 은총과 사랑을 여러분 주시기를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 말씀하기를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나가서 허랑방탕하여 완전히 죽게 되었을 때 회개하고 자복하고 아버지께 돌아오니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 놈의 자식 아버지 재산 다가지고 탕진가산하고 돌아온 놈 나가라. 들어오지 마라. 들어오지 마라. 내 눈앞에 싹 사라져라.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그 아버지가 뛰어 나와서 끌어안고 목을 어긋매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들을 잘 왔다. 그리고 난 다음 종들에게 종들아, 제일 좋은 옷을 갖다가 입혀라. 신발을 갖다 신겨라. 아들된 증거로 가락지를 끼워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잃었다가 찾았으며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겉으로 미워한다고 하지만 속으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속으로 미워합니까? 겉으로 마음이야 말이 안맞아서 좀 맘 상하는 말을 서로 하더라도 속은 사랑하고 있다.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모의 부모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으니 하나님 닮은 자식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십니까?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여러분을 택하고 환영하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27살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보통 신경쇠약증에 걸린 사람은 마음에 이름 모를 공포 때문에 떨다가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제임스도 병이 악화되면서 자살의 유혹을 받고 있었는데 그 자살을 안하려고 그는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나 희망이 없어지고 좌절되고 절망하니까 자살 안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 자기가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때 누가 곁에 있어서 도와주면 자살 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자살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고통이 다가와서 발버둥을 쳤는데 어느날 성경을 읽는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순간에 말할 수 없는 전율적인 감동이 마음 속에 다가왔습니다. 그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님께서 내 병 못 고치겠느냐.” 보통 사람 보면 보통으로 그렇게 읽고 지나갈 것인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께서 나의 신경쇠약에서 못고치겠느냐. 그런 신념이 들어와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끼고 하루 종일 주님이 부활하셔서 나도 살린다. 나도 살린다. 입으로 시인했는데 그 신경쇠약증이 깨끗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변화되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증거로써 여러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응아~ 하고 울면서 호흡을 합니다. 폐가 바람을 빨아들여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받자마자 성령 바람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바람인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시는 성령님, 마음 속에 가난 의식을 버리고 축복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가난하다 못산다. 안된다. 이것 싹 없애버리고 잘산다. 잘된다. 부자다. 축복받는다. 부요의식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분위기를 바꿔 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분위기에서 축복받은 분위기로 생각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된 소식을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좌절 이런 것에서 포로가 되어서 끌려다니는 마음 속에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다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는 마음의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데 성령이 오셔서 마음 속에 말씀하는 음성을 들으면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을 통해서 치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증거한다.

우리가 옛날에는 에덴 동산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에덴을 바라보고 영생을 바라보고 살았는데 죄를 짖자 영혼이 죽고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버지도 못보고 천국도 못보고 지옥도 못보고 영생도 못보는 우리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눈을 밝혀 주므로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서 지금은 아버지를 믿음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고요. 천당도 보고 지옥도 봅니다. 세상 사람은 전혀 모르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눌려서 심신이 고통스럽고 병든 사람에게는 성령이 오셔서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이 은혜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눌려 있을 필요없다.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라.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스트레스 해방시켜 주고 하나님 은혜의 해를 전하는 소식을 전하는데 은혜의 해라는 것은 옛날 구약에 희년이라고 50년만에 옛날 것으로 돌아갑니다. 종으로 팔려갔으면 50년이 지나면 값없이 원상복구가 되고 땅 팔아먹고 집 팔아먹고 한 것이 있으면 50년 후에는 주인에게 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옛날 그대로 복구시켜 주신다. 옛날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 복구시켜 주신다. 옛날의 에덴동산의 삶으로 복구시켜 주신다. 기쁨과 소망과 사랑과 영생을 복구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만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다. 무슨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삶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었었으니 그러면 새것은 무엇입니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죄에서 용서받고 불의에서 용서받고 치료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은 넘치게 하고 그리고 사망과 음부에서 벗어나서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육신은 죽어도 속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원어로 보면은 과거를 쓰지 않고 나는 지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지금 이삭의 하나님이고 지금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브라함,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 앞에서는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 여러분이 육신은 죽어도 영적으로는 살아서 주님 앞에 계시는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전인구원을 얻어서 여러분 이 세상에 부끄러움없이 슬픔없이 탄식없이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 자신이 된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누가 뭐라고 말해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새로운 생명을 계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리신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이 허락하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국민일보에 노숙자로 지내며 알콜 중독에 빠졌던 50대 남성이 간증한 것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원래 건설업을 하던 그는 두 아들과 식당 일을 하던 아내와 함께 단란하게 잘 살았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나가서 안수집사도 되고 건축위원장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아내가 이단에 빠졌어요. 이단이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이단에 빠지자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이단에 끌려가서 집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낙심한 이분은 술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별거하게 되었고 아들 둘은 낙심해서 가출해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IMF가 닥치면서 건설업을 하던 그가 부도까지 나자 직장도 잃어버리고 집도 쫓겨나고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로써 길거리에서 자고 깨면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아서 술을 마시고 완전히 폐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올데갈데없이 노숙자로써의 삶도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자 할 수 없이 노숙자 쉼터로 도움을 받기 위해서 갔는데 그곳에 가니까 성경책이 있어서 성경을 보자 마음이 탁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옛날에 성경을 읽고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했는데 이 꼬락서니가 무엇이냐. 그래서 노숙자 쉼터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회개하기 시작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러자 성경 속에서 얻은 것이 마음의 감동으로 부활과 희망인 것입니다. 희망이 생기자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잃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생기자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 술에 중독이 되어 노숙자가 된 저를 부활하게 해 주시옵소서. 내게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주소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알콜 중독자로, 노숙자로 살던 삶이 완전히 청산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오자 그 놀라운 해방시키는 힘이 솟아 오른 것입니다. 샘물이 솟아 오르듯이 올라와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그는 새사람이 되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서 오늘날 착실한 성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복음이며 성령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삶의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모든 가난과 고통과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는 한국 전쟁 때 종군 기자로 취재하여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한 여기자입니다. 중공군이 쳐들어와서 포위를 당해서 추운 겨울에 온갖 고생을 다하는 미군 병사들에게 나가서 이 여기자가 물었습니다. 군인을 보고서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병사는 슬픈 낯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나에게 내일의 희망을 주십시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중공군에게 포위 당해서... 이 말이 기사로 실리면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희망이 없이 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병사의 짧은 이 한마디는 ‘인간은 내일에의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가슴 속 절망의 쓴 물을 달게 변화시키며,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내일의 희망을 주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절망을 안고 십자가 무덤에 들어갔다가 절망을 다 멸하시고 난 다음에 영원한 희망을 갖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은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성령받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심신이 치료받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천당 복락을 누릴 희망이 있습니다. 나도 전인구원을 받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갖고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희망이 있고 우리 주변에 희망이 있고 내일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을 기록하고 우리에게 전달해 준 성경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안에 모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는 절망을 벗어버리고 나오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가 이 희망으로 여러분 속에 가득히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내일이 있습니다.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어둠에서 빛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2011. 4. 24. 부활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