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베 주위에서 학살당한 무수한 위그노

당시 교회 내의 개혁 운동을 잠재워 보기 위하여 가톨릭이 동원한 힘은 크게 두 가지, 세속 정치 권력 그리고 군대를 동원한 폭력으로 요약된다. 이는 그 시대에 존재하던 물리적 힘의 총화였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은 절대 능력을 보유하여 현실의 모든 위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맹주였음에도, 그들 자신에게 내재한 모순과 허위와 부정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한 그 어떤 가림, 숨김, 덮음, 뒤집어 흩음 등의 방법으로 이 도도한 역사의 도전, 바로잡음에 대한 요구를 피해나갈 수는 없었던 것을 이 시대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가톨릭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워했던 치명적인 허점이 개혁자들을 상대한 그들의 학문적·신학적 태도와 자세에서 드러나고 있다. 절대 다수의 학자들, 학문적 신학적 텍스트와 해석 방법, 전통과 언어들과 모든 정보를 일방적으로 장악했던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수 개혁자들의 학문적 접근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고 고전했다. 성경 텍스트에서 제시하는 자명하고도 단순한 신앙과 종교의 근간, 인문주의적 개혁주의가 차분히 접근하는 이른바 학문적 토론이나 신학적 토의에서 당시 가톨릭이라 이름하던 그 교회는, 그들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어떤 방법이나, 종교로 포장한 자신들의 세속적 의도들을 지속할 어떤 설득력도 가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는 데에 긴 시간이나 복잡한 논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가톨릭이라는 교권으로서든, 그 안에 편입되어 있던 개인에게든 다 마찬가지였다. 이런 절망은 곧바로 통섭(通涉)이나 교통, 의견 교환 따위의 소통을 스스로 폐쇄하게 하였고, 즉시 ‘최대한 극단적인 폭력을 들이대는 방법’ 외에 달리 어떤 대안을 찾아낼 수 없도록 자신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특히 앙리 2세의 급작스러운 사고사로, 통제력을 잃은 권력이 가톨릭의 중심에 있던 한두 가문으로 쏠리자, 이는 곧바로 공민(公民)에 대한 대량 학살이라는 형태의 엄청난 재난으로 이어졌다.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는 것은 개혁을 요구하고 외치는 이들이 더 이상 개인적 소수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앙리 2세 사후에 발생하는 학살 상황에서는 더 이상 토론이나 논고, 재판이나 심리 과정 따위는 완전히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가톨릭에 의한, 당시 학살 모습. 처처에서 목격된 광경이었다.

회피나 방어가 전혀 불가능한 상대에 대한 일방적 폭력의 무자비한 행사, 군대를 동원한 무력 진압이라는 방법까지 행동의 방식을 획일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더 이상 신앙이나 종교성의 보수, 진리와 윤리의 사수라는 따위의 명제는 관심조차 끌 수 없게 되었고, 그저 권력과 세속적 이권의 수호를 위한 폭력의 극단적 행사라는 노골적 행진만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수와 2세(1559 -1560)와 샤를 9세(1560-1574) 치하

1560년 3월, 엉부와즈(Amboise)에서 다시 대학살이 일어 났다. 표독한 기즈(Guise) 가문으로부터 국왕을 강제적으로 떼어 놓아 보려는 계획을 가졌던 일부 위그노들은, 이 즈음 쥬네브의 깔뱅으로부터 비폭력 취지의 간절한 충고를 듣기도 했는데, 이 거사에 가담한 이들은 조직적으로 국가와 정부의 전복을 꾀한 것으로 몰리기도 했다. 당시로는 신흥 귀족층이라 할 만한 지성 있고 기예의 능력을 갖춘 프로테스탄트 1,500여명이 일시에 체포되었고, 그들은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고문과 사지를 찢는 잔학 행위를 당한 후, 엉부와즈 도시의 각 거리에서 학살됐다.

그 가운데 1,200여 명의 시체는 르와흐(Loire) 강에 내던져졌다. 피는 마을의 거리와 강으로 흘렀다. 더 비참한 사실 묘사는 더 이상 여기에다 베끼지 말기로 하자. 다만, 추기경과 주교의 교회 권력을 발판으로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이 모든 학살이 어떤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을 선고 결정하여 집행된 것이었고, 사람들은 손발이 묶인 채 살해되거나 서로 꾸러미처럼 엮여 산 채로 강에 던져졌으며, 수 일이 지나 온 거리와 강이 시체로 가득 찼을 때 궁성에까지 시체 썩는 악취가 진동했더라는 기록은 나중 재론(再論)을 위해 기억해 두고 넘어가자. 굵직하게 기록된 것만 짚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영화의 상징인 엉부와즈 성과, 박해 학살의 추억을 품은 르와흐 강의 콘트라스트. 저 성벽에서 내던져진 위그노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 강에 포개져 쌓여 핏물 가득 흘렀다.

관용? 그런 게 이 어느 구석에 있었는지 여기 한 번 찾아 보라. 바로 그 가톨릭 교회와 그 후예들이 이 죽임 당한 위그노와 그 후예들을 욕하고, 그 시대 위그노 지도자들을 비관용의 모본으로 만들어 비난해 대고 있다. 바로 이 시간까지도.

폭력을 구사하던 실체의 진의, 자기 권력과 이권을 수호하려는 단순하고도 세속적인 목적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고 학살을 피하지 못했던 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매겨지는 처형의 근거는 늘, 미사와 마리아 숭배의 비성경성을 주장한다는 것, 성상 경배에 관한 이해 차이 등이었다. 자신들이 아는 한 이런 것들이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끌어 간 죄목이었다. 오늘 일부 가톨릭 신자들과 거의 대부분 개신교인들이 매일 그리고 매주일 고백하는 바로 그 신앙 내용이 그 시대에는 화형감의 이단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만약 약간의 시공간적 차이가 은혜로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의 대부분은 이 때 이 무참한 죽음에 엮였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를 이해하는 우리의 느낌이 참 새로워진다. 우리도 다 맞아 죽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가톨릭 성당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성모 품의 아기 예수상. 성인 예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의 신앙 내용? 크고 중하신 마리아, 그리고 어리고 작으신 예수……. 혹 이들의 신앙 대상의 크기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세르베, 가톨릭이 붙잡아 가톨릭이 화형 언도

앙리 2세(1547-59) 때인 1553년 9월, 프랑스 인근의 쥬네브(Genève)라는 스위스 도시에서는 교회와 공권에 의하여 체포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비엔느(Vienne)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자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역사적 교회가 믿는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출판물 등을 통하여 반복 반대·공격한 혐의 등으로 그에게 화형을 언도했다. 그는 용케도 구금 중이던 곳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하여 어느 기간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가톨릭에서도 또 프로테스탄트에서도 수용할 수 없던, 자신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니테리안 이단 사상을 어떻게든 더 주창하고 옮겨보려 시도하다 엉뚱한 곳에서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람을 체포한 그 도시 정부는, 당시의 예로 보기에는 매우 특이하게도 5개월여의 지리한 공판을 진행하고 조사하며, 그 이단자의 주장을 반복 청취하고 심리했다. 주변의 여러 독립 도시들이 모두 개입하여 이 사건에 대하여 의견을 내고 공박과 논쟁, 심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쥬네브 시의회가 운영하는 사법 당국의 결정으로 이 사람은 다시 정죄되었고, 계속되는 설득에도 이 이단 사상의 공표를 취하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나름대로 당시의 도시 정부 내부와 인근 도시간의 관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 복잡한 긴장의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를 시도했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고 의도와는 다르게 그만 화형을 언도받게 되었으며, 결국 그 형이 집행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가톨릭에 의해 당시와 그 후에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나 그 수하의 종교 권력이 아닌,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진행 중이던 도시에서 일어난 특이 사건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수백 년간 벌어진 다른 수십만 건의 학살 사건들과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그룹에 속한 도시가 그들 가톨릭의 정죄에 동의하고 한 이단자를 처형한 일은, 사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처형된 그 사람의 이름이 미셸 세르베(영어식으로는 마이클 세르베투스) 였다.

▲폭력에 대한 양심의 자유를 외친 선구자로 소개된 세르베의 석상(파리 14구 시청 앞). 숭고하고 늠름한 모습과는 달리 역사 자료를 통하여 보는 그의 사상, 죽음을 앞두었던 그의 태도에는 참 아쉬운 구석이 많다.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지난 글 보기]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