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피를 신원(伸寃)하소서!

1534년 11월 18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직조공이 파리 노트르담 앞에서 공포스러운 정죄를 받았고, 곧바로 인근 도살장으로 끌려가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또 다른 순교자는 리브리(Livry)의 수도사였는데, 그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파리에서 개혁을 외치다가 죽은 네 번째 사람’이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는 내용의 고작이다. 그는 큰 고딕의 종탑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저 ‘파리 노트르담’이라 불리는 곳에서 산 채로 화형되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낙수홈(Gargouille). 빗물이 건물벽을 상하지 않도록 만든 장치이지만 불당의 나한상처럼 악한 세력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야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저 아래 보이는 광장이 악명 높은 화형 장소였다.

1534년 1월 21일 니꼴라 발르통(Nicolas Valeton)은 부르따뉴의 낭트에서 파리로 왔다. 프랑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의 방에 지금까지 쌓아 놓았던 모든 서적들을 다 내다 버렸다. 그의 집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알려져서 산 채로 화형된다. 형리들은 그의 집에서 가져 온 나무로 그를 불태워 죽였다. 그가 알게 된 복음의 사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인해 박해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죽임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였다. 그는 재산도 부모로서의 위치도 다 포기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킨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파리의 공공장소인 레알(Les Halles)에서 화형당하였다. 1535년에는 이 곳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이 발생하면서 공공에 많은 분노를 일으켰고, 이런 행동들이 모이고 쌓여 신앙의 자유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34년 10월 17일 밤부터 일어난 ‘벽보 사건’은 앙뚜완 막꾸흐(Antoine Marcourt)가 제작한 25x37cm 크기의 벽보를 프랑스 전역에 붙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프랑수와 1세는 개혁자들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반대 세력으로 판단하고 초강경으로 치달아 그들을 무섭게 처벌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프랑수와 1세는 개혁주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 셈이다. 이 사건으로 1백여명이 체포되었고, 11월 13일에 그 가운데 상당수가 화형 당하게 되었다.

▲미사의 부당성을 알리는 벽보 원본. 깔뱅 생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승천일 전날인 1535년 5월 5일, 후앙 출신으로 40대 나이의 왕실 변호사였던 에티엔느 베나흐( Étienne Bénard )라는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 믈랑(Melun) 출신이며 양재사였던 마랑 듀 발(Marin Du Val)이 개혁 신앙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체포 되었다. 2, 30명이 차례로, 혹은 한꺼번에 떼거리로 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어 여러 주간 동안 잔인한 고문을 가한 후에 처형하였다.

프랑수와 1세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동맹을 맺게 되자, 그는 이교도와 손을 잡을 뿐 아니라 자국의 이단도 옹호한다는 당시 국제 사회의 비난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프랑수와는 자신이 비가톨릭적이지 않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할 필요에 당면하게 된다. 당시 메링돌(Mérindol) 주변 도시들이 프랑스로 편입되는 상황에서 20여만 명의 트로테스탄트들이 도피하여 이 지역에 은거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기강이나 정권의 안보 차원에서는 눈엣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이 지역 교구장이던 뚜흐농(Tournon) 추기경이, “사도성을 갖고 있는 로마 교회를 따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들 개신교도들을 탄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때의 교구 책임자, 그것도 추기경의 위치였다면 모든 사법관들을 일언지하에 움직일 모든 권한을 가졌으므로 그의 의지는 즉시 시행되었다.

5일 동안 공식 집계가 가능한 숫자로만 약 2-3천명 내외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살해되었고, 670명은 노예선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 지역 프로테스탄트가 궤멸하였다.’ 할 정도였으므로, 실제로 순교한 이들의 숫자는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개신교도 여인들에게는 몹쓸 짓들을 행한 후에 살해하는 잔혹한 일들이 그림으로 전해올 만큼 악한 일들을 자행하였는데, 초대교회 신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로마식 폭력은 종교 권력 내지는 교회 권력이라는 형태로 옷을 바꿔 입었고, 교회 개혁을 외치는 위그노들을 그 권력 유지의 방패막이로 삼아 무참히 탄압하였던 것이다.

▲위그노들이 끌려가 노를 저었던 노예선의 모형. 깔뱅 생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546년 8월 3일에는 루터의 책을 번역하다가 체포되고 화형당한, 번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띠엔 돌레(Etienne Dolet)의 순교가 기록되고 있다.

1547년에 사망하는 프랑수와 1세는 1546년 프랑스 최초의 개신 교회인 모(Meaux) 교회 지도자 14명을 화형시키는 것으로, 개혁자들과 신자들에 대한 쓰라린 그의 박해 역사와 인생을 마감하였다. 참으로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뿌린 핏빛으로 물든 그의 재위 기간이었던 것이다.

앙리 2세(1547 ~1559) 치하의 순교

1547년 10월에 이단 엄벌을 위한 파리 의회에 종교 재판소를 개설하여 3년 동안 개신교 500명 이상을 체포하고 많은 개혁자들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탄압을 하였다. 하도 많이 처형하고 화형을 집행하였으므로, 그들은 이 종교 재판소를 ‘불타는 법정’(chambre Ardente)이라 불렀다.

1549년 11월 19일에는 종교 재판소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칙령이 나왔다. 같은 해, 당시 깔뱅의 책들을 쥬네브에서 가지고 와 판매하던 행상인 막세 모호(Marcé Moreau)가 뜨와(Troyes) 에서 체포되어 산 채로 화형 당했다.

1551년 6월 21일 앙리는 샤또브리앙 칙령(l'Édit de Chateaubriand)을 통하여 순교자들이 화형 당할 때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혀를 자르는 포고령을 냈고, 모든 종교 재판은 최대한 신속히 처리하여, 탄원이나 일체의 관용을 배제하도록 조치하였다. 화형자들이 죽으면서 자주 신앙을 고백하고, 마지막 마디의 삶을 통하여 간증하며, 그리스도와 복음을 외치면서 죽어가는 것을 보자, 이제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하고 죽도록 미리 혀를 먼저 자른 후에 끌어내어 화형시키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던 것이다.

1557년 9월 4일에는 3-4백명의 위그노들이 가톨릭 신학의 본산이라 할 소르본느 대학 근처 어느 가정 집에서 예배 모임을 갖다가 피습, 체포·구금당하였고, 일부는 화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20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7명은 9월 14일과 27일에 화형되었던 것이다.

1559년 6월 2일에 앙리 2세는 ‘이단자들을 화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에꾸엉 칙령(l'édit d’Ecouen)에 서명하지만, 몇 달 후 두 명의 파리 의회 소속 의원인 안느 듀 부흐(Anne du Bourg) 와 라뽁흐뜨(Laport)가 체포당하여 화형이 집행되었다. 안느 듀 부흐는 국왕이 참석한 의회에서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화형의 부당함을 의연하게 발언했던 사람이다. 왕은 그의 정견을 옹호하고 그의 인격과 사상을 흠모하여 보호하였는데, 가톨릭 권력은 그 왕이 잠시 출타한 사이에 그를 체포하였고, 곧바로 화형장으로 끌려갔다.

그 ‘충실한’ 종교성이 저지른 난센스, 그 ‘불편한’ 사실들

로마 기톨릭의 관용? 이상에서 보듯이 당시 가톨릭의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박해에는 아예 법도 칙령도 소용 없는 때가 허다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 ‘몰지각하고 무지하며 맹목적인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글들을 더러 볼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일부 몰지각한 수백, 수천 명이 이렇도록 여러 번, 끊임없이 반복해서? 그런 표현이 가능은 한 것인가? 수백 명을 때려 죽이고, 묶어서 끌고 가고, 잡아서 화형을 시키는 데는 과연 몇 명 정도가 힘을 써야 할까? 수천 명을 그리 하려면? 뭐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좋다. 일단 그렇다고 해 두고 다시 지나가 보자. 사실을 더 들여다 보면 실상, 이 정도는 별거 아닐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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