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관용’ (La Tolérance),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양해(諒解)함을 의미하는 이 용어를 일부 학자들은 마치 1553년 쥬네브(Genève)에서 발생한 세르베의 처형으로부터 기원하는 말처럼 쓰고 있는데, 사실 이 단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556년에 출판된 소책자 ‘1545년 메링돌(Mérindol) 지역 개혁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에 대하여 기억할 역사적 사실’에서였다. 그리고 16세기 프랑스 개신교 대학살 시대가 지나간 후 1598년 4월 13일에 앙리 4세가 개신교를 또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면서 역사적·사회학적으로 개념화한 용어이다. 이를테면 이 종교적 ‘관용’이라는 말은 결정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혹독한 박해를 염두에 두고 쓰기 시작한 용어였던 것이다.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을 서명, 발표했던 건물.

▲이 르네상스 양식 건물을 ‘왕의 거소’ 또는 ‘작은 행정부’라 불렀다.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을 발표한 바로 이곳을 역대 여러 왕들이 들렀었다.

똘레랑스(La Tolérance)의 유래

애초 로마 가톨릭 교회나 그 교회 권력의 언저리에서 행사하는 폭력에 의하여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처형되던 죄목은 거의 대부분 ‘미사의 비성경성 주장 또는, 성상(聖像) 숭배를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가톨릭 외에 어떤 다른 종파나 종교도, 종교 행위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강력하고 분명한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수월하게 수백 년이 지나갔다 하여, 오늘날 가톨릭 사제들이나 역사가들이 ‘종교적 관용’ 문제를 들먹이며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고, 심지어 종교적 관용을 문제삼아 그 시대의 누구를 비방하려 손가락을 드는 것 자체가 한심스런 난센스에다 아예 어불성설(語不成說)인 셈이다.

그들이 수백 년에 걸친 긴 시대에 모든 시점의 종교적 융통성 논의와 여하한 종류의 재고(再考) 자체를 깨부수어 다 죽이려 했고, 실제로 무수히 죽였으며, 결국 죽여도 죽여도 다 죽일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에 굴복하여 억지로 개워내듯이 토한 것의 결과가 이 ‘관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개혁자들에 대하여 입이 닳도록 ‘종교적 비관용’으로 비방하고, 특히 깔뱅에 대하여 이를 문제 삼는다는 이 사실은 참, 그 논의 자체가 좀 황당하고, 어쩌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 그들은 우리 선배들이 분명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니 당대의 가톨릭이 너희들에게 무슨 짓을 했건 우리는 오늘을 주장할 수 있고, 우리가 뭐라고 하든 이거 다 그대로 말이 될 뿐이다”라는 식이라면, 도둑이 몽둥이를 들고 도둑맞은 사람을 두들겨 패겠다는 격에 전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일 하나는, 당시 종교 권력이 행사하는 세속적 폭력에 의하여 가장 처참하게 고통당한 장본인으로서, 이 종교적 관용을 호소하고 정의해 내어, 죽기까지 견디면서 그 모범을 만들어 보고자 노력했던 사람을 거꾸로 뒤집어 ‘비종교적 관용’으로 몰아치는 의도적 왜곡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깔뱅이라는 이 개혁자야말로 ‘설교’라는 단 하나의 수단만으로 폭력과 핍박을 견디며 ‘관용’을 가르치고 정직하게 실천한 개혁자였으며, 이를 위해 스스로 철저히 희생한 사람이었음에도 로마 가톨릭은 자신들이 정죄한 이단자들과 이교도들을 내세워 반복, 조직적으로 깔뱅의 의지와 노력을 왜곡 선전하는가 하면, 있지도 않은 가지가지의 상황들과 사건들을 날조, 이 깔뱅을 종교 권력을 남용한 가해자로 몰아 묻어 버리고자 획책했더라는 사실이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신앙으로 죽이고 죽은 사건들

본 연재를 시작하면서,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종교라는 권력의 끝없는 폭력성’을 동 티모르의 예에서 설명해 보려한 것이나, 바로 이 시간 한국 사회 한 언저리에서 타종교와의 불편한 관계 가운데 속 비좁은 크리스차너티를 처참하게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맹목파 형제들이 생각나도록 조선 사림파 관련 사화(士禍)들을 열거해 본 것이나, ‘호랑이 잡아먹는 토끼의 설화’를 이야기해 본 이유들 모두가 이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구부러진 종교성이라는 충실한(?) 넌센스가 저지르는 가장 부도덕하고도 불편한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는 셈이다.

▲수많은 위그노 희생자를 낸 라 호셀(La Rochelle) 지역 가톨릭 성당에 걸린 그림. 오랜 옛날 가톨릭 순교자들에 대한 이들의 애틋한 추억이, 이 지역 근세사를 아는 이들의 가슴을 더 쓰라리게 한다. 가톨릭 교권은 라 호셀에서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을 굶겨 죽였다.

프랑수와 1세 치하(1515 ~ 1547)

잘 알려진대로 이 프랑수와 1세는 깔뱅이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여 개혁 신앙에 대한 이해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호소했던 바로 그 왕이다. 상당한 기간 동안 그는 개혁 신앙과 이를 따르는 무리들의 개인적 지지와 지원도 받았고, 심정적으로 그들과 동행하려는 의지를 보인 적도 있었으나 결국 그의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이해(利害)에 의하여 엄청난 수(數)의, 너무나 위대한 인간들과 신앙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아간 왕이었다.

1523년, 소년 깔뱅이 파리로 공부하러 오던 해 8월에 프랑스 최초의 루터주의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혀를 잘리고 쇠줄로 사형대에 묶여 산 채로 화형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리에르는 리브리(Livry) 지역의 어거스틴파 수도사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신적 존재이시나 성모 마리아는 그렇지 않기에, ‘크고 위대한 마리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죄로 카톨릭 교회 권력에 절대 추종하는 정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이 외침 이후에 프랑스 곳곳에서 성모 마리아 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일을 저지른 이들은 하나같이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죄’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을 면치 못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이렇게 죽었다.

1525년 모(Meaux) 그룹에 속한 개혁자들을 탄압하는 사건이 일어나, 르페브르(Lefebvre d'Etaples)를 비롯한 기욤 파렐, 제라흐 후셀 등이 도피했다. 프랑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설립된 바 있었던 모(Meaux), 파리 인근에서 일어났던 이 의미있는 개혁운동은 이런 탄압으로 단번에 해체되고 말았다.

1527년, 잘 알려진 두 번째 프로테스탄트 순교자 룩 달롱(Luc d'Aillon)이 있다. 그는 프랑수와 1세의 누이 마흐그리트 드 발루와 (Marguerite de Valois)와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çonnet)등과 자주 서신을 왕래하였다. 그의 누나 가운데 한 사람인 루이제 달롱(Louise d'Aillon)은 위에 나오는 프랑수와 1세의 누이, 위그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마흐그리트 드 발루와의 할머니가 된다. 그런 그는 1527년 4월 4일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프랑스의 왕이었던 이 프랑수와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패권을 차지하여 당대 유럽을 장악하는 명실상부한 황제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지만, 엄청난 자금을 뿌리며 합스부르크가(家)를 등에 업었던 스페인의 카알 5세와의 경쟁에서 보기 좋게 꺾이고 말았다.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완패하고 잡혀서는 마드리드에 투옥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을 수용하면서 석방되었는데, 그의 누이 등을 통하여 엄청난 금액의 석방금을 지불한 것 외에도 자기의 아들들을 볼모로 내주어야 했으며, 자승자박이라 할 여러 불편한 조항을 포함하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1527년에 서명한 이 마드리드 조약에는, ‘이단 루터에 반대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년 쟈크 뿌엉(Jacques Pouent)은 독일의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접하고, 그 책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다 체포되었다. 화형의 협박 앞에 맞딱뜨린 이 젊은이는 자신의 생각들을 철회하고 목숨을 부지해, 7년 교화형을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의 확신은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되었고, 자신의 신앙을 철회한 그 어리석음에 대해 눈물과 애통으로 회개하였다. 그는 1524년 10월 5일, 이미 도피의 길에 올라있던 기욤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파리와 모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면서 “하나님은 자신이 기록하게 하신 능력의 복음의 말씀이 세상 모든 곳에 펼쳐지기를 원하신다”는 서신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한때 죽음이 두려워 철회한 바 있었던 그 신앙을 다시 고백함으로써, 1526년 8월 28일, 화형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항소할 기회를 가졌으나 이를 거부하고 1527년 3월 4일 36살의 나이로 오늘날 파리 시청이 서 있는 광장에서시 장대에 메달려 화형된다.

1529년에는 베르껑이 순교한다. 국왕의 측근 귀족이며 뛰어난 학자였던 루이 드 베르껑(Louis de Berquin)은 개혁 운동이 서서히 일어서고 있을 당시, 열정적으로 이에 동의하고 교회 개혁의 필요를 외쳤다. 그는 당시 교회의 개혁을 위해 루터와 멜랑흐톤의 용기 있는 노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교회 개혁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루터와 멜랑흐톤과 에라스무스의 책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사실 독자적인 그의 생각이었다기보다 모(Meaux)의 주교였던 기욤 브리소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귀족 가운데 최대의 학자”로 인정받던 그는 훌륭한 성품과 웅변적 재능, 불굴의 용기와 열심으로 프랑수와 1세의 총애를 받는 궁내의 개혁 프로테스탄트였던 것이다.

베즈(Beze)는 말하기를 “만일 프랑수와 1세가 좋은 왕이었다면 베르껑은 분명 제2의 루터가 되었을 것이다”고 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그를 ‘루터보다 더욱 나쁜 사람’으로 볼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의 저술을 근거로 이단자로 낙인찍어 세 번이나 투옥시켰지만 왕이 그를 석방시켰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고 전쟁으로 힘을 잃었던 왕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베르껑은 자신이 당할 위험에 대해서 여러 번 경고를 받고, 망명을 권고 받았으나,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진리를 위하여 생명과 명예를 내던질 기백은 갖지 못했던 기회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와는 아주 달랐다. 심지어 국왕은 베르껑에게 독일 대사로 파견되어 나가 있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험이 증가될수록 베르껑의 처신은 더욱 단호하였다. 그는 진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오류를 공격하였다. 그는 성경의 진리와 신학적 논의를 통하여 로마교가 자기에게 씌우고자 하는 이단의 비난을 그들에게 돌려주고자 하였다. 베르껑은 소르본느 대학 학자들의 오류들을 조목 조목 뽑아 그것들의 비성경성과 이단성을 오히려 비판해 주었던 것이다.

하루는 호지에 거리(rue des Rosiers)에 세워진 마리아상이 파손되는 일이 일어났다. 군중들은 그 곳에 모여 분노를 터뜨렸고, 왕의 마음도 심히 흔들렸다. 사제들은 베르껑의 가르침과 그 영향이 종교와 법률과 왕위 자체까지 전복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르껭은 다시 체포되었다. 하필 왕은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사제들은 그 틈을 이용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왕이 돌아와 또 다시 그를 석방시킬 수 없도록 선고 다음날 형을 집행하였다.

1529년 4월 17일 정오, 베르껑은 사형장으로 끌려 나왔고, 이를 보러 나온 군중들은 말 그대로 인상인해를 이루었다. 군중들은 경악, 분노, 조소, 증오심으로 가득하였지만 정작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도 없었다. ‘주께서 그 자신과 함께 계심을 의식’하였다. 작은 수레가 그를 처형장으로 옮겼으나 그가 당할 죽음의 공포와 고통, 이런 모든 것들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 돌아가셨다가 다시 일으켜지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께서 그의 곁에 계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그의 침착한 자세와 태도, 흐트러짐이 없는 화평과 승리의 기쁨을 보고 놀랐다.’ 베르껑은 처형대에서 무리들을 향하여 몇 마디를 하고자 했으나, 사제들과 군인들이 외친 방해의 소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베르껑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사체는 불태워졌다. 세르베 사건보다 24년이나 먼저 발생한 이 베르껑의 순교에서 우리는, 불리하면 숨거나 자신의 아이덴티티까지 부인하고 자신의 주장과 저술까지 절대 아니라 하던 미셸 세르베의 표정은 결코 한 꼬투리도 찾아볼 수 없다. 인간 역사가 공정하고 참다운 것이었다면 후예들은 당연히, ‘세르베’에게 씌우려 했던 그 관(冠)을 이 베르껑을 위해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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