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투데이는 총신대학교 총장 정일웅 박사의 논문 ‘독일교회를 통해 배우는 한국교회의 통일노력’을 매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정 박사는 이 논문에서 독일교회가 독일의 통일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분석하며, 이것이 한국의 통일과 한국교회의 연합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 박사는 얼마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서로 연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때 독일교회가 독일의 통일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연구한 적이 있다. 결론은 당시 독일교회가 하나로 연대했었다는 것이다. 에카데(독일개신교협의회)라는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엄청난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감리교단을 비롯한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번 연재가 한국교회 연합의 길을 모색하는 의미있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정일웅 박사
3) 니케아와 칼세톤 종교회의를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

로마의 통치자 콘스탄틴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는 크게 번창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황제의 정치적인 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후 황제의 도움으로 로마교회는 처음으로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게 된다(325년). 이 종교회의를 소집하게 된 이유는 역시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교회는 처음으로 총회를 통해 니케아 신조를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게 된다.

특히 교리적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가 이전에 하나님과 동등하게 있었는지 아니면 신의 절반에 해당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서로 대변하며 대립했던 신학자로는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라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매우 보수적인 입장에 있었던 아타나시우스의 견해가 수용되고 아리우스는 정죄당하게 된다. 물론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확증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신앙의 교리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2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연합된 총회에서 다시금 확인됐다. 그리고 그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다시금 확인하는 동시에 아리안주의자들을 비롯해 중도파, 친근파 모두가 저주를 받게 된 회의였다.

이러한 종교회의에서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깊이 생각되었고, 형성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건에 관한 근원적인 증거에 서로 결합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물음들과 인간들의 사고 형태들은 변화하기 때문에 오래된 복음의 소식은 항상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고 해석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진통이 생겨나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 복음의 보존과 현재화의 과정을 전통(전승의 과정)이라 불렀던 것이다. 450년 경에 죽었다는 레리눔의 빈젠즈(Vinzenz von Lerinum)는 곳곳에서 항상 모든 이에게서 믿어진 그것이 참된 전통이라는 원칙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 후 451년에 이르러 여자 황제 풀케리아에 의해 칼세톤에서 제4차 종교회의가 개최된다. 이 총회 역시 교리적 논쟁을 종식시키고 교회의 통일과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 논쟁이 된 교리의 쟁점은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것으로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이 이단으로 정죄됐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431년부터 시작된 것인데,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키릴과 콘스탄티노플의 교부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했다. 역시 네스토리우스 뒤에는 안디옥 학파가 있었다. 이 총회의 논쟁은 역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논쟁이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초기교회의 노력이었다 할 것이다.

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중심은 도시를 근거로 이뤄졌는데 콘스탄틴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아름다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그곳으로 이주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은 동방교회의 중심지가 됐다. 동방교회는 희랍문화권에 존재한 교회들을 통칭한 이름이다. 그리고 벌써 로마교회는 여러 곳에 대주교의 통치를 허락했는데 이 당시 벌써 예루살렘과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도 대주교가 교회의 통일을 견지하는 조직의 책임자로 있었다. 서방교회는 역시 로마를 중심한 구라파 교회를 뜻했다.

로마교회는 이 모든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교회 외적인 조직력을 강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과 서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구별된 삶의 습관들과 사고하는 관습에서 점점 차이를 드러내고 또한 이러한 차이들로 인해 논쟁을 벌이게 됐다. 그러다 1054년 마침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와 희랍어를 사용하던 동방교회는 서로 분리되게 된다. 이러한 분리는 오래 전부터 시작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여러 대립적인 차이점이 극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벌써 교리적으로 니케아 신조 후에 삽입된 필리오케의 문제에서 서로 대립했으며, 로마교회가 설정한 교황제도 역시 동방교회가 거절했고, 또한 성상숭배 문제 등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 대립했다.

또한 양자 간의 결정적 분열은 역시 십자군 운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제1차 십자군들이 1096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알렉시우스 황제는 그들을 환대했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황제를 불신하고 증오해 마침내 황제 때문에 그들이 화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동서방교회 분열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후 예루살렘의 성지순례와 관련해 발생한 터키군의 방해는 아랍세계를 수 차례에 걸쳐 원정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연결됐고 이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13세기에 이르러 동서방교회가 서로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시도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 1274년 5월에 리용에서 개최된 제2차 교회회의는 동서방 교회의 연합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고, 같은 해 7월에 비잔틴의 교회대표들이 동서방교회의 연합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치적인 음모와 술수에 의해 그 연합은 결국 결렬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는 그리스도 교회과 연합과 일치를 극복하지 못한 최초의 실패 사례가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