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크리스천이 꿈을 꾼 후 이에 대한 어떤 영적인 깨달음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찾는 일은 가능한 일인가요? 꿈속에 어떤 영적인 교훈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날 수 있는가요? 또 만일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석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해석의 올바른 자세나 방법은 어떠해야 될까요?

A) 지난번에 저는 우리가 경험하는 꿈은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일반적 꿈이든 특별한 꿈이든 아무런 이유 없이 꿈이 생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꿈도 지친 육체나 마음의 치유나 회복의 관점에서 그 작용을 이해할 수 있듯이, 특별한 꿈도 무언가 특별한 꿈이 주는 의미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꿈은 반드시 해석의 단계를 거쳐야만 그 사명을 다 한다고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간밤의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도 않는데 그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일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여러 날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꿈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 꿈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또 꿈으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받으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꿈의 해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심리학적 접근

꿈에 대한 해석이라 하면 누구든지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Karl G. Jüng)이 끼친 학문적 공헌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히 의식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인간의 의식을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고 무의식 세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이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꿈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꿈과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인간의 꿈은 성욕과 생활력의 근원으로서의 리비도(libido)의 작용에 기인한다는 점을 세상에 발표하였습니다.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은 프로이드가 주로 성적인 리비도에 관련시켜 꿈을 해석한 것과는 달리, 꿈에는 인간 심층 내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Karl G. Jüng, The Practical Uses of Dreams Analysis in Collective Works, Vol. 16).또 그는 인간 무의식 속의 깊은 영역에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의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개인과 관계되는 집단의 공동 의식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융은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마침내 인간 정신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인격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위와 같은 학문적 전통에 서있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식과 만나고 또 이를 돕기 원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올바른 해석을 통해 현재의식에 적용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또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강력한 내적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예언과 꿈과 환상 등의 직감적인 기능들을 통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있어서도 꿈 해석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직접적인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예언 활동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주후 200년경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지요. 그리고 3-4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대교회는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교권제도의 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성례전적 영성이 개인적 영성을 압도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롬(Jerome)은 이단사설을 억제하고 교권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가르치기를, 개인적인 꿈과 환상보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도심과 형식적인 교회 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영교(靈交)를 추구하기 원하는 자들이 사막과 산 속에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중세교회는 오랜 동안 프라토-어거스틴(Plato-Augustine) 유형의 실재론적인 영성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다시 도입하게 되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학문적으로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스콜라철학의 후기의 경향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힘입어 유명론(Nominalism)이 크게 부상하게 되자 신앙과 이성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그러자 신비롭고 반이성적으로만 여겨지던 꿈에 대한 해석 문제는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정통적 신앙의 권위로 인정하던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은 자연히 꿈에 대한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7세기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교리 논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때마침 불어 닥친 계몽주의의 소용돌이는 교회와 전통적 신앙을 합리주의적 비판으로 거의 질식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꿈과 같은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제는 신학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인해,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접근

그러면 과연 꿈에 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은 신학적으로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쉴라이엘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이라고 풀어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구분은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함이 비교되어 죄(罪)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겠죠.

마찬가지로 융의 심리학적 표현에 의하면, 죄성이란 무의식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분리된 현재의식이라고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현재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그에게 있어서 그 영역은 인간 정신의 신적(神的)인 핵이며 신성(神性)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래적(生來的)인 지각으로서의 신성(神性)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꿈에 나타나는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기독교 성화론(聖化論)의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배본철, 「52주 성령학교」, 190). 실제로 필자가 만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꿈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되고, 또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의 영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특별한 꿈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이타적인 목적의 꿈, 특히 복음전파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목적의 꿈이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 속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와 같은 목적의 꿈이 오늘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필요나 영적인 상황을 알려주시곤 합니다. 이럴 때 그들은 꿈에 나타난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또는 직접 물질로 돕곤 합니다. 또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복음 전할 대상자들을 꿈속에서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언제 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지시하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고백들이 진정 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꿈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신학의 인간론 내지는 성령론의 범주에 삽입될 필요를 요청 받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운동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 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이 복음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가온다고 보는데, 이를 통하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꿈 해석의 전통은 고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 정죄와 교권제도 발생 이후 현재까지 교회사 속에서 줄곧 외면을 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보주의 신학계에서는 꿈 해석에 관한 융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왔으며, 현대의 치유사역과 영성운동에서도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융의 이론은 마치 신학계의 진보와 보수 사이를 갈라놓은 격이 되어서, 진보 측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반면 보수 측에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과 질문은 현대의 기독교가 꿈 해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어도 책임성 있는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만 할 때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