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방언 통역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방언 통역은 우리가 공부해서 외국어를 통역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가요? 그리고 방언 통역을 못 하면 방언은 아무 유익이 없는 건가요? 예언하고 방언 통역하고는 또 무엇이 다른 건가요?

A)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령의 나타남은 표현 양식상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그것은 깨달음을 통한 성령의 나타남, 발성을 통한 성령의 나타남, 그리고 믿음의 행위를 통한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발성을 통한 성령의 나타남에는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종 방언 말함과 방언들 통역함과 예언함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이들 모두가 영혼 내부에서 일어난 성령의 감동이 우리의 발성 기관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발성 기관을 통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리 내면에 성령의 감동이 있다 할지라도 방언,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입을 결코 열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발성 기관을 통해 이런 감동을 나타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각종 방언 말함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방언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여러 번에 걸쳐 설명을 드렸으니, 지금은 다른 발성의 나타남과의 관계성의 차원에서만 방언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성령의 발성적 나타남인 방언, 방언 통역, 예언의 은사들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시는데, 성경 말씀이나 설교나 상담 내용이나 꿈이나 여러 상징들 그리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까지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방언은 본질상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14:2)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혼을 통하여 드러내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성령께서 우리의 음성을 통해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 자체만 가지고는 영혼의 잠재의식에 표현된 성령의 뜻을 현재의식이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자는 또한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14:13).

둘째, 방언들 통역함입니다. 이 통역이란 우리가 외국어를 배워서 하는 그런 통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휘의 뜻을 알아내거나 말의 해석을 통해서 통역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감을 통해 전달되는 초이성적인 은사입니다. 방언들 통역함은 소리로서 표현된 성령의 메시지인 방언이 마음에도 열매 맺도록, 즉 현재의식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석되는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4:5).

방언 통역은 방언하는 자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입니다. 방언하는 자에게 따라서 나타날 수 있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내가 말하는 성령의 은사가 나에게서만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14:3).

방언하는 자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할 이유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통역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통역을 하기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4:14)

방언의 기도는 우리의 영의 기도이지만 통역을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도 그 뜻이 깨달아지므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열매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14:15).

현실적으로 방언 통역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찬송할 때 방언에 대한 감동이 일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영으로 기도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도와 찬송의 감동이 생길 때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이런 마음의 기도와 찬송은 당연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를 번갈아 가면서 하다 보면, 전에는 마음에 아무런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던 방언의 기도를 할 때 동시에 마음에 깨달음이 주어지게 되곤 합니다. 물론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그 감동이 우리의 발성 기관을 통해 표현될 때 그것을 방언 통역이라 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14:26).

이 말씀은 모여서 예배하거나 기도할 때 덕을 세우기 위해 질서를 잘 따라 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게 감동이 생겼다고 해서 나의 발성 기관을 통해 사람들 앞에 방언하고 통역한다면 교회의 질서가 흐트러진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함부로 방언을 말하는 것은 교회에 별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볼 때 “미쳤다”(고전 12:23) 할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예배 가운데 방언 통역의 은사는 설교자를 통해 나타나곤 합니다. 기도회라고 하면 기도회 인도자에게 영적인 질서의 비중이 실리곤 합니다. 물론 기도회에 따라서 이런 은사들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표현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령의 발성의 나타남인 방언,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모임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말함으로 어지러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를 위해 준비하는 동안 방언으로 기도할 때 통역이 주어지면, 그는 방언 통역을 통해 주어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기억하거나 메모하여 설교문에 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14:27).

모임 가운데서 누군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방언을 말하게 되면 옆 사람들은 잠시 기다렸다가 그 사람의 방언이 끝나고 난 후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방언을 말하는 것이 교회의 영적 질서에 맞습니다. 이럴 때 누군가에게 통역의 감동이 있으면 통역하시면 됩니다.

방언이 길다고 해서 반드시 통역도 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방언이 짧게 나왔다고 해서 통역도 반드시 짧은 것은 아닙니다. 방언의 어구나 음절 그리고 단어의 뜻을 해석해서 통역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표현이 길든 짧든 그것에 관계없이, 통역은 자기나 또는 남이 방언하는 동안 나름대로 자기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의 감동을 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14:28).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예배 때나 기도회 가운데 말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당에서는 절대 방언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당에서도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 방언은 필요합니다.

셋째, 예언에 대해 소개합니다. 예언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드렸으므로, 역시 고린도전서 14장을 중심으로 다른 발성의 은사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4:1).

특별히 예언을 하려 사모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3).

그 이유는 예언은 우선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이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14:4).

예언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감동된 예언이 교회 앞에 적절하게 표현될 때 온 교회는 크게 힘을 얻습니다. 설교자는 특별히 성령으로 감동된 예언을 받아 회중 앞에 전달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전하는 설교의 말씀은 교회를 위해 설교자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것입니다. 회중들은 그 설교를 들을 때 성령으로 감동된 예언의 말씀을 전해들을 수 있게 됩니다. 교회에 임명된 설교자를 통해 예언의 메시지를 회중에서 충분히 전달하실 수 있다면, 성령께서는 더 이상의 교회 전체를 향한 예언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주실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14:39).

1절에서 언급한 예언을 사모하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요한 핵심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 이 모두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방향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 14장 전체에 흐르고 있는 대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방언이 우리의 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을 인식할 때, 이럴 경우 방언을 말하고 또 통역을 하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위해 주어지는 예언이 있을 때 지도자는 겸비하고 청결한 심령으로 이를 받아 교회의 질서를 따라 회중 앞에 전달하십시오, 이 세 가지의 성령께서 주시는 발성의 나타남을 지식과 질서를 따라 활용함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치유와 위로와 능력을 공급 받는 힘 있는 공동체로서 세워져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