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방언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는 현재 어떤 결론에 이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 방언에 대한 인식이 한국교계에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는 빈야드운동(Vineyard Movement)을 중심으로 한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의 영향이 큽니다. ‘제 3의 물결’에서는 방언이 필수적인 성령세례의 표적이 아니라, 어떤 영적 사역이나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라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영향을 받으면서, 방언을 성령세례의 표적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인식은 현재 오순절파 교회의 신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점차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편,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교리적 입장을 취해 온 개혁파나 웨슬리안-성결 그룹 교회들 내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때 방언에 대해 크게 수용하고 있는 목회적 현실입니다.
 
와그너(Peter Wagner)는 ‘제 3의 물결’을 제 1기인 1900년 초 오순절운동이나 제 2기인 1960년대의 은사운동과는 구별하면서, 이 운동을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초교파적으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으로 일컬었습니다. 이 운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를 제 2차적인 체험으로 보지 않고 중생 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며, 그 후에 나타나는 성령의 충만을 받는 체험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보는 경향이 짙다고 봅니다(Donald Kamner, ‘The Perplexing Power of John Wimber's Power Encounters’, Churchman 106:1, 47). 그리고 성령세례 받은 명확한 증거로서 방언을 들지는 않는다는 점도 역시 제 3의 물결이 전통 오순절주의와는 구별되는 점이라고 봅니다. 그들 가운데는 방언이 필수적인 성령세례의 표적이 아니라 신자가 어떤 영적 사역이나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서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이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3의 물결에서는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나 능력 대결(power encounter)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타나곤 합니다.

이상과 같이 와그너는 제 3의 물결 운동가로서의 자신의 신념을 표시했는데, 그것은 방언은 성령세례의 표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는 성령에 충만한 자에게서 나타날 수도 있고 또는 안 나타날 수도 있는 하나의 영적 은사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입장은 자신이 처한 개혁주의 노선의 성령론에 강조를 둔 것이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에 대한 현대의 신학적 동향은 각 신학 노선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주로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는 ‘정결과 능력’ 모티브의 보전과 함께, 점차적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포용성이 눈에 띠게 나타납니다(배본철, ‘최근 북미의 웨슬리안 성결론 연구 경향성’, <역사신학 논총>, 창간호, 287). 이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웨슬리안-성결 그룹 내에서 방언 등 은사 문제로 인해 교단 분열이 잦았던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2) 개혁파에서는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던 방언이나 신유 등의 은사 사용이라든가 기사와 이적을 전도의 현장에 적용하는 일 등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참조: 권성수, 「종말과 영성」, 101; 하용조, 「성령받은 사람들」, I:522).

(3) 그런가 하면 은사적 기독교(Charismatic Christianity)에서 볼 때,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세례 받은 첫 증거가 방언이라고 보았지만, 은사갱신운동을 거쳐 ‘제 3의 물결’에 이르러서는 방언에 대한 강조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중의 하나라고 보는 입장으로 변화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통 오순절주의자들도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반드시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여러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든가 ‘정결’ 모티브 등의 강조가 전통 오순절주의에 많이 보강(補强)되고 있습니다.

중생과는 구별되는 성령세례를 받은 첫 표적으로서 방언을 강조하는 경향은 성령론에 있어서 전통 오순절주의의 특성을 만들어 준 바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특히 성령 받은 표적으로서 방언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목회적 상황은 성령세례의 표적으로서의 방언보다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서의 방언에 대한 이해가 점증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방언에 대한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재조명이 요청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단지 방언만을 특징화시켜서 전통 오순절주의를 규정하던 인식은 더 이상 가지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2의 물결인 은사갱신운동 이후에는 전통 오순절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방언을 하고 있으며, 특히 제 3의 물결운동 이후에는 더욱 범기독교적으로 보편화되었기 때문입니다(Donald W. Dayton, 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 15).

이러한 현상은 오순절주의의 중요한 주제인 방언에 대해 종래의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신학적 발전의 과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현대 오순절 그룹의 신학자들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연구방법에 있어서 방언에 대한 문제로 인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제한성들을 발견해 왔습니다;

(1) 방언이라는 문제를 가지고는 오순절운동을 다른 종교운동들로부터 충분히 구분할 만큼 오순절운동을 적절히 정의할 수 없다.

(2) 방언의 실행에 주의를 집중한 결과, 해석자들이 신학적 범주의 분석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사회학적, 심리학적 범주의 분석을 지향하게 되었다.

(3) 오순절운동을 해석하는 이들이 이처럼 방언에 대해 전념하는 것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더욱 폭넓은 이해를 저지한다(배본철, 「개신교 성령론의 역사」, 143-4).

한편, 방언 문제는 오순절교회 뿐 아니라 여타의 교단들에게도 신학적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방언하는 이들은 단지 오순절교회가 아니더라도 어떤 교단의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은 신학적으로는 분명히 방언이나 예언 등의 초자연적 은사의 종료를 말하고 있으나, 목회 현장에서는 이를 금지시키기 힘든 상황이 사실입니다. 또 대부분의 웨슬리안-성결 그룹의 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방언에 대한 거부감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목회적 현실은 대부분 이와는 반대되는 정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각 교단 교리적 노선에서 취해 온 입장과 목회적 현실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으로 현장을 위한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방언 문제를 둘러싼 각 교단 교리와 현 상황 사이의 신학적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