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혁 목사
우선 서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가르치고 정해주는 삶의 스승들이 있습니다. 첫째 스승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둘째 스승은 우리들의 보혜사인 성령이고 셋째 스승은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산 수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성경이 너무너무 중요하지만 성경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과 내용을 바로 알지도 바로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성경을 온 몸에 붙이고 다니던 바리새인들의 경우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너무너무 중요하지만 성령의 감화 감동 조명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과 내용을 바로 알지도 바로 깨닫지도 못합니다. 성령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 감동 조명을 받는 사람들이 부족하고 치우치고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산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또는 상치되는 삶의 모습을 비교하여 바라보면서 배우고 깨닫게 되는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과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심각한 약점과 문제점의 하나는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제대로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편협하고 배타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들이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만남과 대화를 힘써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첫째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이고, 둘째는 미래와 현재와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이고, 셋째는 하늘과 땅과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 즉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즉 알파와 오메가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온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리고 종말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바울과 요한이 지녔던,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안목’과 ‘역사적 통찰력’을 지닐 때 보다 겸허하고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균형 잡힌 삶의 자세를 지니게 되고 그래서 보다 여유롭고 보다 포용적이고 보다 용기 있고 보다 즐거운 삶의 자세를 지니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민족의 지도자들 특히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나다. 저들이 어떻게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끼치는 영적 리더십을 지니며 발휘했습니까? 저들이 지녔던 영적 리더십은 어떤 종류의 리더십이었습니까?

첫째,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님(1869-1935)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회개와 참회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교회를 태동시킨 1907년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님의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907년 1월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설교는 흐르는 시냇물 같이 회중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습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 원은 수고비 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하였습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습니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상원인 모씨는 살인 강도한 죄를 토설하여 투옥되었다가 선교사의 알선으로 방면된 후 좋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순검(경찰) 방은덕은 죄를 고백하는 남녀 중 형사의 저촉되는 자를 검거할 목적으로 예배당에 들어섰다가 길선생이 “네 선 땅이 어디냐? 지옥 불이 타오르는 곳이다” 라고 외치자 방순경은 소리를 지르고 통회하며 패검을 떼어 던지고 교인이 되어 고향 맹산으로 돌아가 맹산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픔 마음이 청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며 고뇌에 찬 모습으로 마루바닥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습니다.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그의 저서「한국의 오순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우리 집 요리사도 죄를 고백하고는 회중 가운데 주저앉아 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말씀해 주세요. 저 같은 사람도 소망이 있나요? 저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그러고는 마루바닥에 뒹굴면서 흐느껴 울었다. 고뇌에 찬 비명이었다. 죄를 고백한 후에 이따금씩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했는데 수백 명의 청중이 함께 모여 드린 이 통성기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 장로라는 분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바지 아바지’ 외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교회당 지붕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김장로 곁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이 전에 걸코 한번도 기도해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도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강력한 영적 리더십이 생겼습니까? 나는 길선주 장로님의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로부터 그런 강력한 리더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평생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님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다 쏟아바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한국교회와 사회를 회개와 헌신과 사랑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던 강력한 영적 리더십은 바로 그의 회개와 참회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풍 목사님도 한 평생 새벽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라고 통곡하며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영적 리더십은 회개와 참회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1865-1942)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회개와 함께 고난과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 삼열 목사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 일곱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는데 이 때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회개의 기도와 함께 제주도 주민들을 향한 고난을 무릅쓴 뜨거운 사랑과 섬김으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습니다.

홍수로 인해 강물로 떠내려가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이기풍 목사는 생명을 내 갈고 강물로 뛰어 들어 헤엄을 쳐서 그 여인을 구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미신과 불신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의 뜨거운 기도와 함께 헌신적인 사랑과 섬김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섬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습니다.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미신과 불신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강력한 영적 리더십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나는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제주도민들을 향한 고난과 사랑과 섬김에서 그런 강력한 리더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수 많은 인재를 키우고 3.1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이승훈 선생님 (1864-1930)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고난과 희생과 사랑과 긍정과 관용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조만식 장로님과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목사와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민족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돈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했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1907년 어느 날 일본의 침략의 손길이 깊이 뻗치고 있을 때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평양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은 그의 가슴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14살이 연하인 안창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승훈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가 43세 되던 1907년의 일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어이들을 볼 때마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보곤 했습니다. “저 놈은 눈망울을 보니깐 여간 총명한 게 아니야!” 어느 날 총명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정일선이라는 아이였습니다. 공부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지만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그의 부모에게로 갔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아이를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는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세운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애국심으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이승훈 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 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참으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을 했고,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적미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예수를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 고문 매 달리는 고문 두들겨 패는 고문 등을 당했지만 모든 고문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치소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구치소에 갇혀 그 동안 수 없는 고문을 달게 받으면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지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절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었듯이 저도 이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습니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 한 60이나 되셨을 겁니다(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습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 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네댓 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래요. 그래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또한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 10월에는 정주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습니다. 재목을 사 들이고 돌을 날랐습니다. 두 달 만에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오산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정주읍교회를 시무하던 정기정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두 번째 투옥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란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중에 보게 된 것입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라고 속으로 부르짖을 때 문득 창살과 햇빛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보다 더 밝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며 마치 신음하듯 ‘주님’ 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습니다. 3월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동료 학생들에게 깊은 인격적 감화를 끼쳤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고 합니다. 바로 그 4년 동안 한경직 목사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오산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월 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질풍 몰아치듯 서울에서 선천으로, 선천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뛰어다녔다. 서울에서는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을 만나 동지로 포섭하였고, 만약 천도교에서 주저한다면 기독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과 연락을 긴밀히 취하면서 천도교의 의견을 잘 조절하여 민족의 총의를 묶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습니다.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손병희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입니다.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 후 세 번째로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다 당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오산으로 달려가서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다시 재건했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이런 기도를 신음처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구하여 주옵소서!”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이승훈 선생이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이승훈 선생도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민족과 학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10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인 한경직 목사였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민족과 학교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조선 교회와 사회에 나타내 보인 강력한 리더십은 고난과 희생과 사랑과 긍정과 관용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1902-1950)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고난과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는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한국과 일본과 세계에 미치고 있는 감화력은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강력한 감화력과 리더십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손양원 목사님이 그의 삶으로 나타내 보인 고난과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애양원에 손양원 목사를 지독하게 미워하고 헐뜯는 폐병에 걸린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마치면, 자기를 가장 미워하고 헐뜯는 그의 집을 심방하여 안수 기도를 해주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가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계속해서 손 목사를 미워했습니다. 목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 집엘 갑니까?”고 물으면,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당회가 그를 치리하자고 했지만 손 목사는 결국 사랑으로 그 여자의 마음을 녹여 항복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와 나환자들을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돌아보면서도 전국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해방 후 한 번은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게시판에 “세계 성자 손양원 목사님”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그것을 보자마자 그 포스터를 떼지 않으면 설교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것을 떼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능력 있는 목회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극히 싫어했습니다. 한 번은 부산 초량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설교가 그렇게 우렁차고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빽빽히 들어선 성도들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한 모퉁이에서 누군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내 눈에 보여요. 내가, 내가 눈을 떴어요.” 그 사람은 소경이었는데 눈이 보이게 되었다며 너무 기쁜 나머지 팔짝 팔짝 뛰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모인 교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 사람을 쳐다보며 여기저기서 감탄과 찬양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가 소란을 잠재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 성도님들, 조용히 하십시요. 다들 앉으십시오. 저 사람이 눈 뜬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 눈을 뜬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기를 너무너무 싫어한 온유 겸손을 몸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설교 원고지 맨 위에 다음과 같이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능을 의지하고 나의 지를 믿지 말 것.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나를 나타낼까 삼가 조심할 것. 성경 윈리 잘 모르고 내 지식대로 거짓말 하지 않게 할 것. 간증 시에 침소봉대하여 거짓말되지 않게 할 것. 나도 못 행하는 것을 남에게 무거운 짐 지우게 말 것.”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나타내기를 너무너무 싫어한 온유 겸손을 몸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을 몸에 지닌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45년 8월 해방 후 다시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그의 남은 생애를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출옥 후인 1946년 3월에야 비로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 목사는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병든 육신일지언정 저 바깥의 표리부동한 자들보다 몇 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라 하며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손양원 목사의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도 아니었고 형식으로 하는 사랑도 아니었고 명에나 상급을 위한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노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 권사는 나환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냈다. 틈만 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늘 가슴 한 구석이 빈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 놓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다. 보통의 나환자들보다 훨씬 병이 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14호실이다. 아버지는 14호실 환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더욱 많이 쏟았다. 환자들이 거부하는데도 그들의 손을 잡고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피고름 나는 손을 거침없이 부여잡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 자주 스스럼없이 나환자들과 어울리는 아버지였기에 결국 나병에 걸렸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극구 사양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피 검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피가 더 맑다는 것이다. 검사 결과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그래? 그러면 이번에도 틀린 건가?’ 할 뿐이었다. 자신의 나병 감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손양원 목사가 지녔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 목사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1948년 10월 27일 애양원에서 치러진 두 아들의 장례식 때 9가지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 감사의 조목들을 읽을 때 우리는 한 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수년 전 여수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에 걸려 있는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여수 바닷가에 떠 있는 배 한 척의 사진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애양원 식구들이 1950년 7월 경 손 목사님과 가족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배 한 척을 마련했습니다. 손 목사님의 짐을 다 실었습니다. 부흥 집회에서 돌아온 손 목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자기는 피난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마지막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배에 올라 피난을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자기들도 다 손 목사님과 함께 애양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짐을 다시 내려 놓았습니다.

손 목사는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마지막까지 몸으로 실천한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와 고문을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손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에게 총을 쏜 공산당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는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교회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과 합장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가 순교하던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난 아기 동길은 후에 커서 아버지를 따라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 지금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순교적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들이었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산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우리들 모두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강력하면서도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영적 리더십은 고난과 온유와 겸손과 함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한국교회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1902-2000)이 지니셨던 리더십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한국교회와 사회로부터 그리고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 누구보다 광범한 영향력과 감화력을 끼친 비결은 그가 지녔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리더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물론 한경직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좌에서 인간 한경직과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의 특징을 여덟 가지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약함의 사람이었고 참회와 회개의 사람이었고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고 삶이 깨끗한 청빈의 사람이었으며 설교와 복음전파의 목회자였고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고 화평의 목회자였고 역사의식의 목회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사역과 리더십의 특징을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으로 묘사하는 것도 올바른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 주님께서 사신 삶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삶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극히 약한 삶을 사셨습니다.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헤롯이 잡아 죽이려고 하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33년 동안의 삶은 가난하고 약한 삶이었습니다. 마지막에 골고다로 끌려가실 때는 너무너무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때리면 맞고 침을 뱉으면 그대로 뱉음을 당하고 죽이면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약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둘째, 주님께서 사신 삶은 착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착한 삶을 사셨습니다. 마지막 3년 동안 공 생애의 삶은 모든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도와주시고 먹여주시고 치료하시는 착한 삶을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극도로 착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라고 지적했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사신 삶은 주변성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심에 머물지 않고 항상 주변으로 달려가시곤 했습니다. 천국을 떠나서 우주의 끝인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사마리아로 주변으로 가셨습니다. 상류층에 머물지 않으시고 창기와 세리와 이방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나중에는 저주의 땅인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보고 땅 끝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주변으로 이방으로 땅 끝으로 달려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주님 닮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에서 강력한 영적 리더십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너무 강해질 때, 교회가 너무 능력이 많아질 때, 교회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 될 때, 강력한 영적 및 도덕적 영향력과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한경직 목사는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경직이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문 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기도 했습니다.

한경직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도 건강도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지요. 이렇게 몸이 약해지니 공부할 의욕도 사라지고 말았어요. 처음엔 낙심 천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제이교회와 영락교회의 목회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6.25 전쟁 중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어느 대담에서 괴로운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일생을 연약한 몸으로 살아온 것이 제일 괴로움이었지요.” 라고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2년 동안 두 다리를 수술하는 고통도 겪었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당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6개월 동안은 가래가 너무 끓어서 목에 구멍을 뚫고 지내는 극심한 괴로움도 겪었습니다. 그는 나의 손을 붙잡고 “늙는 것이 재미 없어!” 라고 그의 노약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69년 8월 3일에 행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약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 자기 자신의 약함과 민족의 약함을 절감한 사람인 동시에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한 사람이었습니다. 1972년 4월 23일에 행한 ‘약할 때에 강하니라’란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약할 때는 흔히 겸손하여 집니다. 건강하던 이가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하여 집니다. 교만은 만죄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둘째, 인간이 약하여 질 때에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깊은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셋째, 우리가 약할 때에 기도를 더하게 됩니다. 벌써 오래 전에 내가 미국 뉴멕시코주 알바컬키라는 도시에 있던 요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 제가 폐가 약하여 약 2년간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에 병석에 고요히 누워서 ‘약할 때에 강하니라’ 하는 성구를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한경직 목사는 착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착한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복순이라는 다리 하나 없는 가엾은 어린 소녀를 돌보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1939년에는 남 신의주에 땅을 얻어 벽돌집을 신축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들었습니다. 1942년 일본경찰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된 후에는 보린원 원장으로 그의 모든 시간과 정성을 고아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다 쏟아 바쳤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는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피난민을 구호하고 국군을 위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기독교구국회' 운동을 벌이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밥 피얼스 목사와 함께 기도회를 개최하고 피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피얼스 박사로 하여금 미국에 돌아가서 월드 비젼을 창시하여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피난민들을 돕게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정진경 목사는 약한 자들과 함께 한 한경직 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의 삶의 자세는 예수님과 같이 눌린 자의 편에 섰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소외되고 병든 자, 외로운 자의 벗이 되어 사셨습니다.” 조향록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겸손의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습니다. 영락교회의 집사인 이우근 부장판사도 한경직 목사의 설교는 삶으로 설교하는 설교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사자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모르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는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 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가장 안락한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그것을 마다하고, ‘월셋방에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산꼭대기 20평짜리 교회사택에 들어갔습니다.”

시인 고훈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기리며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라고 목이 메어 불렀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 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여.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한경직 목사가 빌리 그레함 목사를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그의 말이나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었고 그의 착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프랜시스요 한국의 슈바이쳐요 한국의 테레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자기 과시와 자기 명성을 위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한 선전시대에 이름도 소리도 없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모두 허비한 착함과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합니다.

셋째 한경직 목사는 주변지향적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처음부터 가난한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는 주변지향적 삶을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32년 귀국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의주를 첫 목회지로 선택했고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주변적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