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윤함애 사모님이 자녀들에게 남긴 10가지 유언 중 두번째 유언은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5분 이상 예수님을 잊는 때가 많지만 그래도 “주님, 주님” 하고 중얼거리면서 예수님을 잊지 않으려고 주님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늘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저의 대부분 글과 설교에는 항상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가 늘 나옵니다. 제가 2007년 10월 22일 저녁에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어린 아들 철원이를 비롯해서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 몇 사람들의 이름만 적어본다. 우선 박윤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가식과 꾸밈이 없는 분이었고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나는 장경재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착하신 분이었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약하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착하신 분이었다. 모두를 품고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이 넓으신 분이었다.

한 목사님은 또한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나는 특별한 인연으로 한 살때부터 한 목사님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내가 홀로 월남한 후 한 목사님은 언제나 나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 아버지’ 하시며 나의 아버지를 부르시곤 했다. 양극화가 극심한 이 시대에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존경받는 지도자가 많지 않은 이때 나는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싶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내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나에게 깊은 신앙적인 감화를 끼치신 분이다. 나는 이성봉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내가 중학생 시절, 내가 홀로 월남하여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시절, 나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었다.

나는 강원용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그분은 폭 넓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분이었고 모두를 품고 아우르는 넓은 분이었다. 나는 이중표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이 목사님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어버린 순수하고 착한 분이었다.” 이것이 제가 3년 전에 쓴 글의 일부입니다.

저는 지금 정진경 목사님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집니다. 물론 어제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도 보고 싶어집니다. 정진경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야기할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분은 온유 겸손하신 분이셨고 부드럽고 따뜻하신 분이셨고 모두를 품는 넓으신 분이셨고 욕심이 없는 깨끗하신 분이셨고 한국교회와 남북을 사랑하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스승이셨습니다.

몇 가지만 추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함께 다니기에 너무너무 편한 분이셨고 소박하시고 따뜻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훌륭하시지만 함께 다닐 때 좀 불편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진경 목사님은 함께 여행하고 함께 다니고 함께 먹고 함께 놀고 함께 자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아주 편하고 즐거운 분이셨습니다. 저와 룸 메이트 한 경우가 참 많았는데 러시아와 중국을 여행할 때 저의 집 사람은 다른 여 집사님과 함께 자고 저는 정 목사님과 같은 방에서 함께 자기도 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격려하시는데 아낌이 없으셨습니다.다. 지난 1999년 설날인 화요일 저녁에는 KBS 방송에서 <내가 존경하는 이 사람> 이란 생방송 프로를 진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프로를 진행하는 동안 정진경 목사님께서 부족한 저를 정 목사님께서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지목하시면서 지나치게 칭찬하시고 격려하셔서 몸둘 바를 모른 일도 있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북한 동포 돕는 일에 대해서 폭넓은 입장을 지니셨고 타 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서도 폭넓은 입장을 지니셨습니다. 아마 제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시며 격려하셨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북에 퍼 주는 것이 잘못이라고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를 때 정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먹으면 어떻습니까? 그들도 우리 동족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난 2009년 3월 13일 5개 종단의 종교 지도자들이 ‘3·1 운동 90주년을 맞으며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경동교회에서 함께 모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모임도 전적으로 후원하며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원로이신 99세의 방지일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기도’를 최희범 목사와 박경조 주교와 김상복 목사가 드렸고, 이응준 원불교 교무가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노래한 후, 이만열 교수와 임형진 교수와 법륜 스님과 김홍진 신부가 각각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김대선 교무와 손봉호 교수가 응답을 했고,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서 애국가와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한 후 정진경 목사님이 축도를 했는데 참석자 300여 명이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고 방지일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은 그 모임이 너무너무 좋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정진경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날인 2009년 9월 3일 아침 정 목사님께 전화를 걸고 인사를 드렸는데 정 목사님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 지금 병원에 와 있어. 기침이 나서 주사 맞으려고 병원에 왔어.” “빨리 나으셔서 청평에 놀러 가셔야지요.” “그래, 그래.” 저는 정 목사님과 전화를 한 후 방지일 목사님께 전화를 걸고 오는 15일 청평으로 놀러 가자고 말씀했더니 “좋아, 좋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진경 목사님께서 주사 맞고 집에 돌아 오셨는데 바로 그날 밤 9시경 목사님께서 몸이 아파서 다시 병원에 가셨다가 10시 15분경 세상을 떠나셨다는 청천병력과도 같은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병원 빈소로 달려갔고, 9월 7일 월요일에는 신촌성결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달려가서 조사를 읽었고, 그리고 벽제 화장터에도 오산리 메모리얼 파크 납골당에도 달려갔습니다. 너무너무 허전하고 너무너무 아쉽고 슬펐습니다. 그러나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저는 지금 정진경 목사님이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림인식 목사님께서 입관 예배 설교에서 지적하신 대로 정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영성과 사명과 실천과 영광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사시면서 예수님의 흔적과 모습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또한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격려와 칭찬의 삶이 무엇인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갈등과 분열과 분노가 가득한 한국교회에 포용과 연합과 일치가 무엇인지를 삶과 사역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은 우리들 곁을 너무 빨리 떠나셔서 지금도 너무 공허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하실 일을 다 하시고 많이 앓지 않으시고 평안하게 하늘 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정진경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천국에서 사랑하는 정 목사님을 반갑게 만나뵙기를 바리며, 천국을 준비하는 참회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봉사와 연합과 일치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2010년 9월 3일 아침 목사님의 사랑받던 제자 김명혁 목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