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지난 1년간 ‘배본철 교수의 세계순회 성령사역’을 연재했던 본지는 배본철 교수(성결대)의 새 글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 & A’를 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이란 무엇인가’ ‘직통계시가 가능한가’ 등 성령론에 관한 많은 궁금증들을 질문(Q)과 대답(A) 형식으로 속시원히 풀어줄 예정입니다.

Q) 방언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분들은 방언을 못 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믿어야 할지 크게 혼동이 됩니다. 정말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말하게 되나요?

A) 방언에 대한 시각은 한 편에서는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신비한 능력 또는 은사라고 보면서 이를 매우 긍정하는 입장이 있고, 또 한 편에서는 이 현상을 매우 의문시하는 입장으로 대립됩니다. 저는 먼저 방언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시각을 대표하는 전통 오순절주의(Traditional Pentecostalism)에서는 방언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을 성령세례의 가장 뚜렷한 증거로서 강조합니다. 전통 오순절주의 신학자들인 더필드(Guy P. Duffield)와 크레이브(Nathaniel M. Van Cleave)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을 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가 사도들의 것과 동일한 순수한 오순절적 체험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성령, 그 자체이지 방언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성서적인 방법대로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확신하기 위하여 그러한 표적을 힘써 간구하는 것이다(Guy P. Duffield, Nathaniel M. Van Cleave, 「오순절신학기초」, 558-9).

더필드와 크레이브는 만일 성령의 모든 다른 사역과 구별될 수 있는 성령세례의 독특한 초자연적인 증거가 없다면 이 체험에 대하여 어떻게 확신을 느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최초의 증거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 하나님의교회 신학자인 거스(RoHollis Gause)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체험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 체험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는 거듭남과 구별된다. 이 체험 초기에 외적으로 주목할 만한 증거는 성령의 감동에 의한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RoHollis Gause, 「성령안에서 사는 삶」, 102).

이와 같이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의 표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최초의 증거로서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신조 제8조에는 ‘성령세례의 증거’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최초의 외적 표적(the initial physical sign)에 의하여 증거된다(행 2:4). 이 경우의 방언을 말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은사로서의 방언과 동일하다(고전 12:4-10,28). 그러나 그 목적과 용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순복음교육연구소 편, 「하나님의 성회 교회사」, 77-8).

우리나라 오순절 교단의 경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헌법에도 성령세례와 방언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신자들이 받은바 성령세례의 증거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방언이 그 최초의 외적 표적으로 나타난다(행 2:4). 이 방언은 본질상 방언의 은사와 같으나(고전 12:4-10,28), 그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헌법위원회, <2001년 헌법개정안>, 8).

그러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전통 오순절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조용기 목사는 방언과 성령세례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어리석고 나약한 자기 무능력에 빠진 변명을 단호히 버리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또 명령하고 있는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조용기, 「성령론」, 144)고 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을 때는 명확한 체험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성령을 받은 것도 같고 안 받은 것도 같은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정신적 투쟁을 계속하게 되기 때문에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을 전하되 ‘너희 보고 듣는 이것’으로 명확한 체험으로 전해야만 하겠다고 역설하였습니다(조용기, 「5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154). 그는 그러면 이제 ‘내가 성령세례를 받을 때 어떤 증거가 나타나느냐’는 문제가 당연한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될 것인데, 이 문제의 해답을 위해서는 성경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그 나타나는 증거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첫째, 성령세례의 증거는 다양하나 그 대표적인 외적 표적으로 방언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기록한 기사가 네 군데 나와 있는데(2:1-4; 8:4-24, 10장, 19:1-7), 8장의 사마리아 부흥회 때만 제외하고 모두 방언을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성령세례의 표적 중의 하나는 방언을 말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성령세례의 증거는 강력한 복음전파에 있습니다. 즉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그는 즉시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의 목적은 단지 표적만을 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신앙을 세우고 교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복음을 삶과 행동으로 전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유창하게 말하는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성령의 임재가 곧 복음증거로 연결될 때에 비로소 확실한 성령세례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방언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이 곧 성령세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세례에는 반드시 능력 있는 복음증거의 표적이 따라야 합니다.(「5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117-8).

조용기 목사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분명히 다른 별개의 체험이라고 전제하였습니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체험은 시기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기간을 두고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별개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방언 자체가 성령 충만은 아니지만, 방언은 성서적으로 확증된 성령 충만한 체험의 가장 강력한 외적 표적이라고 보았습니다(「성령론」, 167). 그는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를 크게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로 보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내적 증거로는 마음의 강한 확신과 평안으로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절대 감사와 절대 기쁨의 삶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며, 외적 증거로는 방언과 강력한 복음전파로 나타난다고 한 것입니다.(조용기, 「오중복음 이야기」, 78) <계속>